▲ 장형창 건설노조 조직쟁의실장

기록적인 폭우다. 여러 곳에서 침수피해를 입었다. 산사태가 난 곳도 있다. 어떤 곳은 전봇대도 쓰러졌다. 저 쓰러진 전봇대는 누가 세울까?

당연히 한국전력이다. 쓰러진 전봇대를 보면 당신은 아주 상식적으로 한전에 전화를 할 것이다. 한전에서도 친절하게 사고를 접수한다. 비가 오는 와중에 신속하게 복구작업도 해 준다. 한전에는 지역마다 돌발사고 대기팀이 있어서 소방관들처럼 24시간 출동한다.

이 상식은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리다. 현장에 출동해 비를 맞아 가며 쓰러진 전봇대를 세우는 사람들, 그들은 한전 직원이 아니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이다.

한전은 전봇대와 배전선로 유지·보수작업을 위해 지역마다 2년 단위로 하청업체와 계약한다. 이 계약방식을 단가계약이라고 한다. 서울은 각 자치구에 두세 개 업체, 그리고 각 지역은 시·군 단위별로 역시 두세 개 업체와 하청계약을 맺는다. 한전의 2019~2020년 고압 단가계약 하청업체는 456개다. 한 업체당 약 10명의 전기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니 전국적으로 5천명 정도의 전기노동자가 있는 셈이다. 모두 한전의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전기는 그야말로 국가 기간산업이다. 그 기간산업 중 필수적인 배전 분야를 100% 하청업체에 맡기는 실정이다. 그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2년마다 실업자가 된다. 사실은 이름을 바꾼 업체에서 다시 일하기를 반복한다. 그 한전 하청업체 노동자 중 한 명이 지난 8월3일 세상을 떠났다. 지병이라고는 하지만 1년반에 걸친 해고의 고통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게 유가족과 동료들의 증언이다.

사망한 한전 하청업체 전기노동자는 21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신분, 2년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운명은 베테랑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2019~2020년 단가계약을 한 그 업체는 2017~2018년보다 낮은 보수를 제시했다. 사망한 노동자와 그 동료들이 거부하자 하청회사는 바로 해고했다. 그들이 해고된 자리에는 그 낮은 보수라도 받고 일하려는 다른 전기노동자들로 채워졌다. 한 다리 걸치면 알 법한 동료 전기노동자들이지만 2년짜리 비정규직 신분이 만들어 낸 비극이다.

사망한 노동자와 동료들은 부당해고에 맞서 싸웠다. 그 하청업체 앞에서 100일 넘게 시위를 했다. 한전을 찾아가 대책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해당 한전 지역본부는 한전 직원이 아니라며 나 몰라라 했다.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해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역시 부당해고 판정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 하청회사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그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다. 무려 1년8개월에 걸친 과정이다.

21년 동안 전봇대를 세운 그 전기노동자는 그사이 병을 얻었다. 승소가 예상되는 행정소송 결과를 끝내 보지 못했다. 21년 동안 한국전력의 전봇대를 세웠지만 끝내 한전에서 외면당했다.

공사는 하청업체들이 하지만 하청업체에서 고용해야 할 전기노동자 숫자와 보유해야 할 장비, 심지어 공사방식까지 모든 건 한전이 지시한다. 한전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전기를 죽이지 않고 2만2천900볼트(V)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공사하는 이른바 직접활선 공법을 요구했다. 그 공법으로 죽은 사람이 십수 명이다. 십수 명이 죽고 나서야 직접활선 공법은 사라졌다.

또 얼마나 죽어야 2년짜리 간접고용 하청노동자의 신분이 바뀔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조사를 한 바 있다. 당시 5천명에 이르는 한전의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들은 그 조사에서도 빠졌다. 공기업 한전은 대한민국 전봇대를 유령이 세운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 억울한 죽음에 답해야 할 곳은 한전이다. 촛불시민들의 힘으로 대통령이 바뀌고 그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천명했지만 한전은 일선에서 보란 듯이 거부한 것이다. 선언만 했지 제대로 집행하지 않은 정부와 간접고용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유령으로 만들어 버린 한전이 이 죽음의 책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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