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는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됐다. 삼성반도체 등 삼성계열사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에 걸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업무상재해를 인정받은 사례는 아직 한 건도 없다. 피해자 일부는 현재 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행정법원(행정5단독 전대규 판사)은 지난 8월 도장작업 등으로 발암물질인 벤젠에 장기간 노출돼 유사백혈병인 골수이형성증후군 진단을 받았다면 업무상재해라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벤젠은 백혈병을 유발시키는 독성물질로 인정돼 미국에서 1987년 공기 중 허용농도를 0.1피피엠(ppm)으로 낮추도록 권장했으나, 우리나라는 2003년 7월 이전까지 대부분 사업장에서 1피피엠 이상 벤젠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았던 점 등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김아무개(60)씨는 83년 보일러와 가스레인지를 만드는 업체에 입사했다. 입사 후 그는 생산부에서 가스레인지 조립·페인트 스프레이·도장완성품 검사 등을 담당했다. 86년부터 88년까지 도장반에서 일할 때는 기계로 자동도장이 이뤄진 제품에 대해 스프레이 페인트로 보강도장을 했다. 호흡보호구는 지급됐지만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할 때가 더 많았다. 하루 도장작업 시간은 2~4시간 정도였다. 95년부터 확인 가능한 이 사업장의 작업환경 측정결과에 따르면 도장부의 유기용제 노출수준은 매우 낮았다. 98년 이후 셀롤솔브 아세테이트나 크실렌이 1피피엠 이하로 검출됐고 혼합유기용제도 0.01피피엠 이하 수준이었다. 98년을 제외하고는 벤젠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년간 페인트 도장업무

김씨는 95년 정기검진 당시 빈혈 진단을 받았고 98년에는 골수이형성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그러자 2002년 12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을 신청했고, 공단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심의를 의뢰했다. 산안공단은 “원고의 작업환경측정이나 물질분석자료를 근거로 볼 때 벤젠의 노출정도가 백혈병을 일으키기에는 낮은 수준으로 벤젠 등의 유해인자에 의해 골수이형성증후군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회신을 보냈다. 복지공단은 이듬해 5월 요양을 불승인했다.

김씨는 2008년 11월 다시 ‘골수이형성증후군, 불응성 빈혈, 기능성대장장애’에 대해 요양을 신청했다. 그러나 복지공단은 다시 요양을 불승인했다. 김씨는 심사청구를 제기했고 공단은 2009년 5월 또다시 요양을 불승인했다. 이에 김씨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산안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업무상질병 심의결과 보고서에서 “원고는 작업 중 벤젠에 노출됐을 가능성은 확인됐으나 86~89년 직접 도장작업을 한 이후에는 도장작업을 직접 수행하지 않았다”며 “과거에는 불순물로 함유된 벤젠의 농도가 더 높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작업환경측정이나 물질분석자료를 근거로 할 때 도장작업자의 벤젠 노출정도는 백혈병을 일으키기에는 낮은 수준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이 사실조회를 의뢰한 가천의대 길병원은 “벤젠에 대한 반응은 개인차가 심하고 미량에 노출된 후에도 재생불량성빈혈 등 질병이 발생한다”며 “0.006~0.034피피엠의 낮은 농도에서도 벤젠의 독성으로 인해 질병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법원 “위험성 인식 없이 노출 가능성 높아”

법원은 원고인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원고가 근무한 사업장에서 96년부터 2002년까지의 작업환경 측정결과 98년을 제외하고 벤젠이 검출된 적이 없다고는 하나 이는 1년에 1회 정도 측정된 결과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2003년 7월 이전에는 벤젠 검출량이 10피피엠 이하이기만 하면 검출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며 “위 검사결과만 가지고 이 사건 사업장이 항시 벤젠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이어 “벤젠에 대한 노출기준을 제정한 86년 이전에는 노출기준이나 기준을 초과할 경우 취해야 할 보호조치 등에 대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원고를 비롯한 도장작업 근로자들은 벤젠에 대한 위험성에 대한 인식 없이 1피피엠 이상의 벤젠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보여진다”며 “재생불량성 빈혈·골수이형성증후군·백혈병은 모두 조혈기계(혈액을 만드는 조직)와 관련한 질병으로 모두 벤젠의 노출과 관련한 질병으로 알려져 있는 점 등에 비춰 보면 원고가 도장업무 등을 수행하면서 골수이형성증후군의 발병과 관련성이 있을 정도의 벤젠에 노출됐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법원은 특히 “원고의 상병이 다른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는 특단의 사정이 엿보이지 않아 원고가 업무수행 중 불가피하게 노출된 벤젠이 원고의 체질 등 기타 요인과 함께 작용해 발병케 했거나 적어도 발병을 촉진한 하나의 원인이 됐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관련판례]
서울행정법원 2010년8월19일 선고 2009구단1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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