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다만 스트레스의 정도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들의 직무스트레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인 반면 직무에 대한 만족도는 최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에 따르면 직무스트레스를 느끼는 직장인의 비중은 한국이 87%로 가장 높았고 미국 79%, 일본 72%, 멕시코 60% 등으로 조사됐다. 평균은 78%였다. 한국의 경우 직장인의 87%가 직무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무기력증과 스트레스성 소화기질환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 같은 직무스트레스는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법원은 직무에 따른 우울증을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하고 있을까.

국내 굴지의 통신회사에 다니던 ㄱ씨(2003년 당시 47세)는 평소 주변에서 낙천적인 성격이라는 평을 받았다. 건강과 가족관계, 경제적 측면에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ㄱ씨는 80년 이 회사에 기능직으로 입사한 이래 2003년 3월 영업국 시장관리팀으로 전보되기 전까지 전화국 선로계·소통관리과·고장접수과·품질관리팀에서 고객 AS·회선개통 등 통신전람직으로 근무했다. 99년 통신선로기능사, 2001년 정보통신기술자 중급, 2003년 정보통신기술자 고급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기능직 23년 근무 후 영업직 발령

이 회사는 91년까지 국내 통신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러나 97년 3개 사업자가 이동전화사업을 개시하면서 통신시장이 경쟁체제로 전환됐다. 이에 회사는 비핵심업무를 외주화하고 본사와 전국 전화국조직을 슬림화하면서 약 1만5천명의 정규직 인원을 감축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2001년 6월 114 안내서비스 사업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독립시켰고, 2003년에는 조직을 개편해 영업무문을 강화했다. 같은해 10월 5천500명의 직원에 대해 명예·희망퇴직을 실시했다.

ㄱ씨는 당시 고객시설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지점장·지사장으로부터 개별적으로 명예퇴직을 권고받았다. 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이후 시장관리팀으로 전보됐다. 20년 넘게 기술직으로 근무하다가 돌연 영업부서로 전보된 것이다. 회사는 전보 이유에 대해 “근무평점에서 3년 연속 최저등급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ㄱ씨를 비롯해 영업부서로 발령된 기술직 노동자들은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거나 114 분사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ㄱ씨는 97년부터 99년까지 노조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ㄱ씨가 전보발령된 영업부 시장관리팀은 정보통신서비스 이용자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나 회사·학교·병원·공공기관 등 대형고객을 대상으로 경쟁업체로 이탈되지 않도록 관리하거나 고객을 유치하는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ㄱ씨가 전보된 팀의 팀원은 모두 13명이었는데, 9명은 대형고객을 상대로 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RM(Regional Marketer)라고 호칭됐던 반면, ㄱ씨를 비롯한 4명은 그런 업무가 배정되지 않았다. ㄱ씨에게는 개개인을 상대로 통신상품을 판매하는 업무가 부여됐고, 호칭도 ‘RM'이 아닌 상품판매전담직원이었다. 상품판매전담직원에게는 RM과는 달리 판매활동을 위한 판촉물·기업카드도 지원되지 않았다.

전보발령 후 우울증 생겨

ㄱ씨는 시장관리팀으로 전보된 이후 우울감과 흥미·의욕상실, 수면장애·식욕저하·피곤함·대인관계 기피 등의 증상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2004년 3월부터는 매월 두세 차례 의료원을 방문해 치료를 받았다. ㄱ씨는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에게 “직장일이 힘들다”, “보직이 변경돼 적응이 안 된다”, “괜찮다가도 일이 생기면 다시 나빠진다”고 호소했다. 의료진은 ㄱ씨에 대해 임상심리학적 평가를 실시한 결과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인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고 있다”며 “분노나 정서적 혼란의 원인이 내부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스트레스와 관련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ㄱ씨는 결국 ‘주요우울장애’라는 진단을 받았고, 2004년 9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을 신청했다. 공단은 한 달 뒤 요양을 승인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공단이 근로자의 일방적 진술만을 받아들여 요양을 승인했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회사측의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ㄱ씨는 입사 후 23년 이상을 기술계통의 업무만 처리해 왔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47세의 나이에 갑자기 영업부서로 발령받아 낯선 영업업무를 취급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ㄱ씨가 치료를 받을 당시 직장과 관련한 스트레스를 주로 호소했고 그 이외의 개인적인 사유에 기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한 바 있었음을 인정할 증거도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상병은 ㄱ씨가 전보발령 및 그 이후의 과정에서 겪게 된 업무와 관련한 분노감·모욕감·자괴감 등 업무환경적인 요인이 주된 발병원인이 됐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덧붙였다.

[관련판례]
서울행정법원 2007년5월3일 선고 2005구단11237 요양결정처분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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