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상업은행 출신 ‘구C’는 CASS(카스) 맥주만 마시고,
옛 한일은행 출신 ‘구H’는 HITE(하이트) 맥주만 마시고,
옛 평화은행 출신 ‘구P’는 PRIME(프라임) 맥주만 마신다.”
 
요즘 민영화로 떠들썩한 우리은행 노동자들 이야기다. 옛 상업은행과 옛 한일은행은 외환위기 사태 직후인 지난 99년 옛 한빛은행으로 통합했다. 한빛은행은 이후 2002년 우리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 지붕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8년째다. 그러나 ‘출신은행’은 여전히 존재한다. 외형적으로는 모두 우리은행에 속해 있지만 내부적인 조직통합을 묻는 질문에는 대다수 은행노동자들이 손사래를 친다.

외환위기 당시 은행권을 휩쓸었던 인수합병(M&A) ‘광풍’이 최근 또다시 불고 있다. 우리금융지주 민영화가 진원지다. 우리·KB국민·하나·외환은행을 비롯해 경남·광주 등 지방은행에 이르기까지 인수합병 시장에 거론되는 은행만 6곳에 달한다. 정부는 ‘아시아 금융리더’로 도약한다는 슬로건 아래 4대 전제조건으로 규제완화·대형화·독자산업화·겸업화를 내세웠다. 2015년까지 1개 이상의 ‘아시아 톱 10’ 은행을 배출한다는 게 정부의 청사진이다. 문제는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인수합병의 주요 과제인 조직통합 문제가 뒷전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출신은행 일컫는 그들만의 용어
 
대형화를 위한 은행 간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주된 목적은 규모의 경제 실현과 시너지 효과다. 반면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과 함께 합병에 따른 자신의 고용과 새로운 조직의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실제 외환위기를 전후해 전혀 다른 은행에서 일하다 헤쳐모인 노동자들은 합병된 은행 안에서도 여전히 “○○ 은행 출신”이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이른바 ‘1채널’은 옛 국민은행 출신, ‘2채널’은 옛 주택은행 출신이다. 나머지는 채널도 없다. 2003년 통합한 옛 국민카드 출신, 대동은행·동남은행·장기신용은행 출신도 존재한다.

어윤대 KB국민지주 회장은 지난 7월 임시주총에서 “여기 와서 보니까 채널1, 채널2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출신 이야기를 하던데, 앞으로 그와 같은 생각이 없어야 조직융화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은행은 크게 상업은행(구C) 출신과 한일은행(구H) 출신, 통합 이후 우리은행 출신(W) 등으로 구분된다. 2001년 우리은행과 통합한 평화은행(구P) 출신, 2004년 3월에 통합한 우리신용카드 출신도 있다.

2006년 4월 조흥은행과 합병한 신한은행은 ‘신한 출신’과 ‘조흥 출신’으로 나뉜다. 신한 출신 조합원과 조흥 출신 조합원이 각각 절반이다. 조흥-신한 통합 이후 지난해까지 공동위원장 체제였던 금융노조 신한은행지부는 지난해 통합 1기 선거를 치렀다. 당시 선거에서는 조흥과 신한 조합원 비율이 반반이라서 그런지 통합 이후 입사자들 그룹인 ‘더뱅크’가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통합과 갈등 그리고 부작용들
 
조직통합은 직원들에게 일종의 ‘문화 충돌’이다. 옛 국민카드 출신인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관계자는 “2003년 통합 이후 팀장은 국민은행 출신, 차장은 주택은행 출신이었는데, 전에 있던 직장에서처럼 회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다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 직장인 국민카드에서는 상사에게 회사의 문제점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통합이 됐고, 상사와 한 달 내내 영업점 평가방식을 놓고 언쟁을 벌였다. 결국 팀장은 “그러다 조만간 잘린다”는 말을 건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일하라는 말로 들렸고, 이후에는 회사 내 제도적인 문제점을 보고도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통합 이후 조직문화는커녕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통합을 이루지 못한 곳도 있다. 하나은행은 98년 충청은행, 99년 보람은행, 2002년 서울은행과 합병했다. 하나은행은 98년 충청은행을 인수할 당시 설치했던 ‘충청사업본부’를 지금도 두고 있다. 충청사업본부 직원들은 임금과 인사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은행 직원임에도 단지 충청은행 출신이라는 이유로 임금을 적게 받고 있는 것이다.

충청은행에는 하나은행에 합병된 98년부터 2007년까지 노조가 없었다. 이후 금융노조 하나은행지부가 이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였다. 지부 관계자는 “충청사업본부의 차별적 임금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지만 은행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 지붕에 있으면서도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라며 “임금과 인사 차별은 직원의 사기저하를 불러오고 이런 사기저하는 결국 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강요된 조직 통합, ‘인재를 놓치다’
 
통합에 불안감을 느낀 노동자들은 때때로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특히 인수합병 협상 기간이 길어지면서 직원들이 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합병 시너지 효과를 보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다. 국내 한 증권사의 경우 2003년부터 인수합병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고, 2005년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됐다. 그러나 이른바 ‘잘나가던’ 핵심인재 100여명은 이미 자기 길을 찾아 조직을 떠난 뒤였다.

98년 옛 국민은행과 옛 장기신용은행이 합병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장기신용은행 직원들이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퇴사를 택했다.
2003년 9월 옛 국민은행과 합병한 옛 국민카드 출신인 곽노은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정책본부국장은 “가장 큰 문제는 정말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들이 나간다는 것”이라며 “합병 당시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 다른 카드사로 옮겼다”고 귀띔했다.
 
KB국민은행지부 간부 출신인 손경욱씨는 고려대 노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성공적인 조직통합을 위한 조직문화와 인적자원관리 연구’에서 “남아 있는 직원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떠나고 힘 없는 자기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패배의식을 갖게 됐다”며 “조직은 인재를 잃었고, 원래 가지고 있는 인적자원의 활용도마저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조직통합 과제 푸는 해법은?
 
손씨는 이 논문에서 조직융화를 위한 과제로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 △핵심인력 유지 프로그램 △문화통합 노력의 기획·주도 △새로운 일체감 조성을 위한 노력 △직원의 변화 수용을 위한 지원·배려 △조직구성과 인력배치 △태도·참여에 대한 직원 모니터링을 제안했다.

합병 이후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는 이유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가 ‘조직문화의 차이’다. 그렇지만 합병 과정에서 인적자원관리와 조직문화의 중요성이 얼마나 부각됐는지, 합병 과정에서 핵심적 요소로 다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에 따라 은행권 인수합병 과정에서 조직통합 대책을 주요하게 다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외환위기 이후 조직문화 차이에 따른 갈등을 10년 가까이 숱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금융권 노동계 내에서도 출신은행에 따라 조직문화에 대한 시각이 다소 엇갈리긴 하지만 출신은행 위주의 노조 활동에는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출신은행 간 갈등은 평상시에 잠재돼 있다가 은행권 노조 선거 때 표출되곤 한다. 평상시 영업점 현장에서는 출신은행을 따지는 일은 흔치 않다.

금융노조 우리은행지부 관계자는 “조직을 구분하는 것은 경영진과 노조뿐”이라며 “영업점에 가면 후배들은 출신은행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출신은행) 호적을 다 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부터 ‘채널의식’을 해소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KB국민은행지부 관계자는 “친한 사람한테는 잘못을 지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는 무관심한 것이 현실”이라며 “채널 간 소통을 통해 먼저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직통합, 노조부터 나서야
“IMF 이후 벌써 10년이 넘었잖아요. 속은 멀쩡한 것처럼 보이지만 출신은행 간 갈등은 여전합니다. 어떨 때 보면 피를 튀길 정도로 치열해요.”
어찌 보면 출신은행 간 갈등에 노조도 한몫했다. 사실 출신은행별 간극은 노조가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시중은행지부들은 오히려 이를 선거에 활용한다. 가장 융화가 안 되는 곳이 노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한 시중은행지부 관계자는 “밥도 같은 은행 출신과 먹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식사하러 가서 출신은행 이야기가 나올까 긴장한다”며 “서로 안 친해서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고 털어놨다.
출신은행별로 나뉜 조직갈등은 노조 선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선거 결과에 따라 어느 은행 출신이 혜택을 더 받는다는 인식과 인사에서 불이익을 덜 받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이 같은 은행 출신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중은행지부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전에는 어디 출신이 했으니 이번에는 어디 출신이 해야 하지 않겠냐”라는 말이 나오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금융노조도 2007년 발간한 ‘IMF 10년 백서’에서 합병-피합병 은행 관계에 따른 출신은행 간 균열을 지적했다. 노조는 백서에서 “은행 간 인수합병이 오래된 사례는 벌써 10년을 헤아릴 정도지만 아직도 조직문화나 노동자들의 동질감 측면에서는 갈 길이 먼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오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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