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상당수 노조들이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거나 관심을 보이고 있다. 노조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비해 다소 생소한 게 사실이다. 자칫 기업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경우 근무평가에 사회공헌활동을 반영하는 등 본래의 취지가 훼손되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그럼에도 노조의 사회적 책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나 ISO(국제표준화기구) 26000 도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만간 노조의 사회적 책임 요구가 공론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활동 폭 넓히는 노동계
 
“인터뷰 기사를 보고 전화를 했죠. 우리 노조도 사회공헌활동에 주도적으로 나설 계획이었거든요. 기사에 난 수자원공사노조의 사례가 흥미로웠습니다.”
지난달 <매일노동뉴스>에 소개된 수공노조의 사회공헌활동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장병훈 위원장에게 전화를 했다는 한 정부산하기관 노조위원장의 얘기다. 당시 수공노조는 공기업노조로는 처음으로 ‘노조의 사회공헌활동’을 표방하고 나서 관심을 모았다. 수공노조는 사회공헌활동을 전담할 조직을 만들고, 노사협의를 통해 사회공헌 재단법인을 출범시키는 한편 상급단체인 공기업노조연맹 산하 노조와의 사회공헌 연대사업을 고민 중이다.

고용허가제 송출업무를 담당하는 산업인력공단은 지난 28~29일 한국어능력시험 집행을 위해 네팔에 간 김에 노사가 봉사활동을 벌였다. 노동부유관기관노조 산업인력공단지부가 봉사활동을 제안했다. 지부는 그간 ‘사랑의 물품 모으기 운동’을 통해 확보한 아동복과 학용품·완구 등을 네팔의 한 고아원에 전달했다. 노사는 건물 내부 페인트칠과 주변 청소도 했다. 공단 노사가 고용허가제 송출국에서 사회공헌활동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G전자노조는 올해 1월 ‘노조의 사회적 책임’을 선언했다. 5월에는 노조 간부와 회사 경영진 등 150명으로 구성된 ‘USR 서포터즈’를 발족하기도 했다.
 
“노조의 사회공헌활동 역사 길어”
 
노조가 벌이는 사회공헌활동은 생각보다 많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보건의료노조는 2008년부터 사회연대기금으로 조합원 1인당 연간 1천원씩 기금을 모아 제3세계노조나 사회취약계층 돕기에 쓰고 있다. 지금까지 태백시 가뭄 돕기·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투쟁지원·아이티 지진참사 지원 등에 보탰다.

금융노조는 올해 임금인상 요구율 3.7% 가운데 0.7%를 사회공헌기금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는 2005년부터 매년 단체교섭에서 30억원, 지난해부터 40억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적립하고 있다. 지부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기금을 배분해 복지단체에 차량을 지원하거나, 학교에 책을 전달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데 사용한다.

전국교직원노조의 사례도 눈에 띈다. 전교조는 조합원의 연말 성과금을 중앙에서 모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하거나 지역공부방을 돕고, 지역별 장학금으로 지출하고 있다. 연세의료원노조는 단체교섭에서 노사공익기금 조성에 합의한 뒤 노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노사공익기금운영위원회를 두고 있다.

대규모 노조만 사회공헌활동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전국여성노조 목원대청소용역분회는 평균 연령 50대 후반의 조합원들이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목원대의 어려운 학생 2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노조의 사회공헌활동이 뜻하지 않게 공직선거에 도움이 된 사례도 있다. 조택상 인천 동구청장은 현대제철노조 위원장 시절 조합원들의 월급에서 끝전을 모아 매년 연말에 노인회관과 지역복지관을 도왔다. 그러다 지난 6·2 지방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구청장에 도전했는데, 마침 그를 알아본 이들이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서면서 어렵지 않게 구청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자발이 아닌 강요 사례도 보여”
 
반면에 노조에 사회공헌활동을 강요하는 사례도 있다. ‘1촌1사 운동’ 등 평소에 봉사활동을 강조해 온 서울시의 한 공기업노조는 올해 하반기 노사협의에서 봉사활동 여부를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것을 검토해 조합원의 반발을 사고 있다. 봉사활동 실적을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는 사측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한 조합원은 “직장인이 일로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봉사활동으로 평가를 받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자율을 가장한 봉사활동은 그만둬야 한다”고 비판했다.

사회공헌활동이 공공기관 평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자발적인 봉사활동’이 어느새 ‘강요받은 노동’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오동진 (가칭)사회공헌센터준비모임 실무책임자는 “공기업들이 수익성과 공공성 충돌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공헌활동을 생각하는 것 같다”며 “노조를 참여의 대상이 아니라 회사의 파트너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ISO 26000과 노조의 사회적 책임
 
이에 따라 노조가 사회적 책임을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된다. 회사에 이끌려 조합원들을 참여시키고, 기업 이미지 제고에 활용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조가 기금을 모아 사회복지단체에만 기부하는 수동적 사회공헌활동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CSR은 국제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최근에는 기업(Corporate)을 뗀, 모든 영역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SR 논의로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ISO 26000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다국적기업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노동의 근본원리 및 권리에 대한 선언’(1989)을 발표한 바 있다. 국제연합(UN)은 글로벌콤팩트(세계협약/2000) 추진하고 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환경·인권·노동부문에서 CSR을 기업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UN이 글로벌콤팩트의 연장선에서 ISO와 협력해 2005년부터 추진한 것이 사회적 책임의 국제표준지침인 ISO 26000이다.

ISO 26000가 말하는 사회적 책임은 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종교기관·정부·NGO, 그리고 노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이 대상이 된다.
한국정부도 오는 11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ISO 26000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국내 사회적 책임 논의가 정부 주도로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노동계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사회공헌활동에서 사회연대전략으로
 
물론 CSR이 정부의 역할을 대체하거나 노조의 단체교섭을 무력화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CSR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는 마당에 마냥 반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동운동이 CSR을 활용해 기업지배구조에 참여하거나 단체교섭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추동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런 맥락에서 제기된다.

사회적 책임을 단순히 봉사활동이나 공헌활동으로 축소해 볼 게 아니라 단체교섭 활동을 보완하고 사회연대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사회적으로 큰 역량을 갖춘 노조는 외부의 강제적 수단이 아니라 사회연대전략으로 노조의 사회적 책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존의 사회공헌활동을 넘어 단체교섭에서 장애인 3% 고용이나 여성의 관리직 진출·비정규 노동자 보호 등 국민과 지역사회·미조직 노동자와 함께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초기에 의료·교육·조세개혁 등 사회개혁투쟁을 통한 사회변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고용안정 투쟁에 집중하다 보니 사회적으로 고립돼 버렸습니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노조의 사회연대 차원에서 사회공헌활동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오동진 (51·사진) (가칭)사회공헌센터준비모임 실무책임자의 설명이다. 준비모임은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제안으로, 몇몇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오씨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금속노조 현대차지부가 매년 기금을 확보해 지역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과 같은 사회공헌활동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오씨가 대표적으로 꼽은 사업장은 금속노조 GM대우자동차지부다. GM대우는 그동안 사측의 제안으로 ‘한마음재단’을 설립해 사회공헌활동을 벌여 왔다. 조합원들도 매달 기금을 모았다. 그러나 활동은 모두 GM대우 이름으로만 이뤄졌다. 이에 지부는 지난달 단체교섭에서 ‘노조의 사회공헌기금’으로 매년 12억원을 확보했다. 여기에 조합원의 자발적 기부를 더해 지부 주도로 지역공헌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한편 준비모임은 최근  노조의 사회공헌활동과 관련해 전국 노조간부 500명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벌이고 있다. 또 노조 100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오씨는 “실태조사 결과를 분석해 노조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사업계획을 제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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