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0년대 말 대학에 들어갔을 때 부모님께서는 절대로 시위대 앞에 나서지 말고 중간이나 뒤에서 적당히 해 달라고 당부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모난 돌이 정 맞으니 튀지 말라는 경고를 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괜히 나섰다가는 혼자만 다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흘려들었던 말이건만 요즘은 무섭고 무겁게 다가온다. 나설 수 없는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발암물질을 찾아내러 여러 현장을 다니고 있다. 현장에서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정보는 노동자들이 들려준 얘기들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에게 말을 걸기 쉽지 않은 사업장들이 있다. 회사의 통제가 강한 사업장에서는 외부인과 작업환경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꽤나 부담되는 모험일 수 있다. 작업환경이나 회사의 부당함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은 사례를 본 노동자들은 아무래도 껄끄럽다. 그런데 최근에는 말을 걸기는커녕 눈도 마주치기 힘든 노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바로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자칫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어떤 피해를 볼지 모른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외부인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를 자신을 위협하는 행위로 여겼다.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과거 정규직이 수행하던 일이었지만, 유해물질이나 사고위험 때문에 외주화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면 마스크 하나 착용한 채 지하에 쌓인 주물사를 삽으로 퍼내러 들어가는 비정규 노동자를 보면서, 그에게 닥칠 폐암의 위험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은 무척 무겁고 견디기 힘들다.

노동자의 건강권은 사회권의 하나로 자유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침해당하면 안 되는 권리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교육받을 권리도 사회권의 하나다. 그래서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 국가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을 의무교육으로 정해 국민 모두가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이와 같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그래서 만들어진 제도다. 그런데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산업안전보건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위험한 작업을 도급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한들 지켜지지 않는다. 근로감독관들이 감독을 나와 사업주를 처벌하면 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의 의무를 정한 법이므로 노동자가 사업주에게 의무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면 법이 효력을 갖게 된다. 노동조합은 사업주에게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통해 문제제기를 하고, 사업주가 그래도 책임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노동부에 고소·고발이나 진정을 넣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안전보건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이 그나마 지켜지게 된다. 문제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조합에 가입돼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사업주의 책임을 요구하려면 해고의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조직되지 못한 비정규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보호받지 않는다'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깨달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유엔의 사회권위원회에서는 국가가 법만 만들어 놓아서는 안 되며 법이 제대로 집행되기 위한 제반 조건도 갖출 것을 요구한다. 노동조합이 조직돼 있지 않은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국가가 만들어야 함은 물론이다.

유럽의 안전보건대표자제도는 이러한 고민과 맥락이 닿아 있다. 안전보건대표자란 사업장이나 지역별로 노동자 중에서 안전보건대표자를 두도록 하고, 사업장 조사권을 준 뒤 사업주에게 환경개선을 요구하거나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과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조직된 노동자들만의 것이지만, 유럽에서는 노동조합이 없는 비정규 노동자나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해 산별노조에서 지역안전보건대표자를 임명하도록 해서 미조직된 노동자들까지 보호할 수 있게 고민한 사례들이 있다. “해고나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작업환경의 문제를 말할 수 있게 노동자들의 대표를 두자”는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별 노동자들에게 맡겨 놓을 것이 아니라 이미 조직된 산별노조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조직된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대책을 모색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자. 우리가 던질 질문은 하나다.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해고의 두려움 없는 발언권을 어떻게 갖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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