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적 역사 이해(소위 역사유물론의 경제적 영역에 대한 강조)는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에 특권적 위상을 부여하는데 일조했다.8)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 단순히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와 관련돼 있다면, 사회변화의 동력을 발견하는 측면은 중요하다. 그만큼 자본주의를 넘는 동력의 발견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 동력은 (노동자) 계급투쟁이나 생산력주의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 사이에서 논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서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양자의 입장은 노동중심성이 지배적이었다는 관점에서는 유사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발전과정에서 생산력 발전이 중요하다는 관점이 관철됐고,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도 자본에 대한 저항에서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힘에 기초하고 있었다.

생산력주의는 경제결정론적 성향이 강한데,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사회변화의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특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채 일부 국가만이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다(물론 그렇다고 계급투쟁적인 관점이 간과됐다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은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발전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니라, 러시아·중국 등 후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했다. 혁명 후의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낙후되고 피폐해진 사회를 우선 재건해야 했고,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서구의 산업화된 민주주의 국가에 도달하는 것도 벅찬 상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생산력을 중시하는 노선이 중심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역사유물론의 입장에서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자본주의는 필연적 단계로 상정된다. 생산력주의의 입장에서 다시 노동이 강조됐고, 열심히 일해 사회주의 조국을 달성하자는 목표가 대대적으로 선전됐고, 게으름은 인민의 적으로 배격됐다(차문석, 2002, 2003).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입장도 노동자주의에 매몰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투쟁적인 이 입장은 경제결정론적 생산력주의의 비투쟁적인 진화론적 관점에 반발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존재론적으로 혁명적인 계급으로 생각했으며,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둔 혁명을 시도했다. 그래서 변혁주체의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비혁명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에 신뢰를 보내며 그들을 호명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립으로 단순화했고, 노동자계급의 국가장악을 사회주의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혁명성과 창의성을 찬양했지만, 노동자들이 비혁명적이거나 반동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의 상황은 노동자계급에 기초한 사회변혁에 의문을 던졌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처참하게 몰락했고, 그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엄격했다. 존재론적인 혁명적 계급의 위상을 가졌던 노동자계급은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해 보인 보수적 관점과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시기의 타협적인 자세 때문에, 과연 보편적 인간해방의 주체인지도 의문시되기도 했다.

또한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의 재구조화 속에서 거대 규모의 산업에 기반을 둔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그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노동으로 포섭될 수 없는 부문운동의 성장(특히 여성·생태·평화·인종·빈민·인권 등 가치에 기반을 둔 신사회운동의 성장)은 노동자계급 중심성에 기초한 변혁노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Eley, 2008).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생산력주의와 노동자 계급투쟁론은 실질적으로 노동에 기초하며, 노동을 사회분석의 척도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양자는 각각의 방식으로 노동의 실현을 도모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대안 프로그램으로 제시되고 있는 기본소득은 근본적으로 노동을 중심에 둔 사고 방식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노동을 초역사적 범주로 신비화할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 특수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생산적이라는 시각을 열어주며 노동의 관점이 아닌 시각에서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비판의 길을 제시해준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이 과도하게 강조되면서 과잉과 중독 현상이 초래되고 있다. 기본소득은 탈노동 사회,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Heide, 2000)를 도모하려는 이들에게 변화를 위한 진전된 길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소득과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비판
 
기본소득은 기본적으로 사회복지제도의 한 형식이다. 자산심사나 노동과의 연계 없이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한다는 원칙 하의 새로운 분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부를 일정한 방식으로 재분배하는 분배 사회주의의 형식이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생산방식의 변화 없이 분배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Marx, 1972: 22쪽). 20세기 서구의 사회복지제도가 좌파에게 계급 타협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이유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그대로 유지한 채 생산성 향상을 담보로 사회적 부의 재분배를 통해 마치 사회변화를 실현한 것처럼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도 그러한 분배 사회주의의 한 변종일 뿐인데, 왜 기본소득은 마치 거대한 대안사회 프로그램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인가? 기본소득은 생산방식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노동연계복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중심성에서 벗어난 길을 보여준다.

2장에서 우리는 노동이 근대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매개원리일 뿐 아니라 초역사적 개념으로 이해됐다는 것을 살펴봤다. 진보세력조차도 노동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과 노동의 실현을 통한 노동의 해방과 사회비판의 길을 제시했다.

그것은 사회의 부가 노동에 의해 사회적으로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사적 소유관계에 의해 소수의 계급이 그 부를 전유하는 불합리한 소외된 사회적 관계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 노동자계급의 존재론적인 혁명적 계급성의 의문과 한계,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 탈계급적 신사회운동의 출현, 자본주의의 재구조화 등은 노동중심성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를 의문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방향으로 ‘노동에 입각한 비판’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비판’이 보편적 해방과 사회 비판의 방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9)

마르크스에게서도 노동중심적 사유에 대한 비판은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근대사회의 구성원리로 중요시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모든 것을 노동을 통해 설명하려거나 노동을 인간의 자기실현이자 창조적 활동의 근원으로 간주했는지는 의문시된다. 오히려 근대사상가인 로크·칸트·헤겔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나 스미스·리카도 등의 정치경제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세워졌다.

마르크스는 이런 노동중심적 사고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 위에 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Marx, 1972: 15쪽)는 강령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10) 이 부분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근원한다기보다는 라살레 일파의 관점이 통합대회에서 강령으로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무원칙한 통합에 반대하면서 이 부분을 비판했다. 노동을 강조한 마르크스를 생각한다면, 그가 이 강령의 내용을 비판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자본』에서도 유사한 노동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물론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개념이 제시되지만,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노동이 그것을 통해 생산되는 사용가치나 소재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 노동은 소재적 부의 아버지이고 땅은 그 어머니이다”(Marx, 1988: 58).

부의 생산에 땅(자연)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확장해서 생산수단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칫 부의 원천으로 노동만이 강조된다면, 빈곤의 원인으로 개인의 게으름에 책임이 돌아갈 수도 있다. 왜 한 인간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가? 그것은 그가 생산을 위한 자신의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노동자로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이런 과정을 놓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초기에(특히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노동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했다. 노동은 인간 본성과 자기 목적의 실현이자 창조적 활동으로, 노동의 실현을 통한 보편적 해방을 구상했다. 해방은 소외된 노동과 현실을 초래하는 사적 소유의 철폐를 통한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이다. 이는 소외된 노동을 초래하는 현실에 대한 노동의 관점에서의 비판이다.

그리고 유물론적 역사 이해에서도 노동은 특별한 위상을 가진다. 사회의 구조와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경제적 영역이 최종 심급의 위상을 가지며, 그래서 때로는 경제결정론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노동의 실현을 통한 혁명의 길이 제시됐고, 노동자 계급은 혁명적 주체로 격상됐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에서는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노동에 대한 시각이 제시된다. 그 작업에서도 노동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이나 목적의 실현 또는 인간 창의성의 발휘라는 관점의 초역사적 차원에서 노동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근대사회의 구성원리로서 인간의 생활의 한 영역인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에 가해지는 여러 조건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노동을 한다. 그렇다면 노동의 실현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실현이 된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와 노동조건에 대한 비판적 모색을 목표로 한다면, 단순히 노동의 초역사화에 기초한 노동의 실현이 보편적 인간해방의 완성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비판이 사회 비판과 해방의 계기가 된다면, 노동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보다는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노동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 오히려 우리의 목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노동과 노동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노동의 온전한 실현을 방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비판(노동으로부터의 벗어나기)을 통해 보편적 인간해방과 자유의 성취가 모색될 필요가 있다.

노동자운동은 대규모 산업의 조직된 노동의 힘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 소수가 강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은 타격 지점에 집중적인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 산업에 고용된 다수의 노동자는 바로 조직화의 대상이 되곤 했다. 또한 생산력주의적 관점에서도 생산성 향상이나 중요 산업의 노동경험이라는 측면에서도 고용된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보편적 시민이면서도 배제된 존재인 프롤레타리아를 고용된 노동자로 한정시켜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실업자를 ‘룸펜’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활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존재라면, 고용여부의 문제로 프롤레타리아의 규정을 한정하고 고용된 노동자에게 운동의 방향을 집중하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다.

또한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에서 완전고용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조건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안 논의는 일자리 창출과 확보라는 노동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경제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업과 빈곤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11) 물론 일정한 경제의 성장과 새로운 산업 분야의 개척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성장에 의한 자본의 축적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구매의 비용인 가변자본의 상대적 축소로 나타날 수도 있다.12)  특히 19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상황을 ‘고용 없는 성장’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고용의 상황은 좋지 않으며, 고용된다고 하더라도 사회복지 체제가 미비한 상태에서 비정규직이 확대되는 등 노동조건은 열악해지고 있다.13) <계속이어짐>
 
[각주]
6) 노동가치론은 노동과 시간이라는 두 핵심적 개념을 통해 근대 세계의 경제적 삶을 설명하려고 한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 분업에 기초한 상품 생산 체계가 발전한다. 상품의 교환가치는 기본적으로 투입된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되며, 그 노동량은 시간을 통해 그 지속시간이 계산된다.
8) 마르크스는 사회구성(구조)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건축학적 은유를 동원해 설명한다. 국가, 법,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의식 등의 상부구조는 사회적 관계의 하부구조에 의해 제약되며, 조건 지어진다. 사회적 관계의 핵심은 생산관계와 생산력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렇다면 사회를 분석할 때 중요한 영역으로 생산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9)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노동에 입각한 비판’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비판’으로 보면서 리카도적 노동가치론 해석에 대한 비판 작업은-Postone(2003) 참조-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정치 경제학의 이론적 기초를 노동가치론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노동가치론의 창시자들은, 로크도 노동가치론의 형성에 기여를 했지만, 오히려 스미스나 리카도와 같이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이며 마르크스 자신도 일정한 존경심을 가지고 이들을 대한다. 노동가치론자로서 마르크스를 보는 시각에서는 이들이 제시한 노동가치론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그가 이 불완전한 노동가치론을 이론적으로 일관되고 세련되게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도 근대 사회의 구성적 매개로 노동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이 노동가치론의 한계에 한정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기도 한다.
10)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 정도로 사용가치의 원천이며, 노동 자체는 하나의 자연력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일 뿐이다. … 부르주아들에게는, 노동에 초자연적인 창조력이 있다고 덮어씌울 매우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노동이 자연적인 제약을 받는다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소유물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인간은 어떠한 사회 상태와 문화 상태에서도, 대상적 노동 조건의 소유자가 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앞의 사람은 뒤의 사람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노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생활할 수 있다(Marx, 1972: 15).”
11) “취업난은 말 그래도 취업이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 그 이유로 대부분 기업의 (신규)고용의 축소, 경력자 우선 채용, 고용 불안정, 특히 IMF 경제위기 이후 불어닥친 경기불황, 기업의 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정리해고(명예퇴직), ‘세계화’된 국제 시장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동의 유연화 등을 들고 있다”(김만수, 2004: 58쪽).
12)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총자본에서 가변자본의 비율이 불변자본의 비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경향, 불변자본의 비율이 가변자본의 비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경향(김만수, 2004: 63쪽)”을 가리키는데, “고용감소와 취업난은 기업이 노동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임금과 관련해서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 총 자본 중에서 임금으로 지불하는 자본 부분의 상대적 감소가 결국 취업난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본다”(김만수, 2004: 58쪽) “원론적 차원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분석하여 실업을 설명한 부분으로” 김만수(2004: 161~182쪽) 참조.
13) 지금의 한국 사회를 ‘실업사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업사회는 실업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 비정규 노동자 그리고 온갖 형태의 불완전취업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다. 실업사회에서는 사회의 소수만이 정규직에 취업하고 극소수만이 매우 높은 소득을 올리게 된다. 부와 빈곤의 극심한 편중현상이 심화된다”(김만수, 20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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