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 시행 하루 전이었던 지난달 30일 새벽. 경북 구미시 공단1동 149번지에 위치한 반조체 전문업체 KEC에 400명에 달하는 사설경비용역이 투입됐다. 용역원들은 가슴에 KEC라는 회사명이 새겨진 검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공장 안에 들어와 파업농성 중이던 조합원들을 완력으로 몰아냈다.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생활하는 회사 기숙사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용역원들은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물리력을 동원해 여성조합원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성추행도 발생했다. 용역원들은 쇠파이프와 소화기·벽돌 등을 소지한 상태였다.

직원들이 다 쫓겨나가자 회사는 직장폐쇄와 생산중단을 공고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지난 5일 회사측이 직장폐쇄를 일부 해지했지만, 파업 중인 조합원들에 대한 출입 제한은 계속되고 있다. 회사는 주요 노조간부들을 중징계했다. 지회장에게는 징계해고, 수석부지회장 등 3명에게는 권고사직, 부지회장 등 4명에게는 직위해제와 대기발령 3개월이 통보됐다. 회사는 이들 노조간부를 업무방해와 불법파업 혐의로 고소·고발했다. 이들에게는 소환장이 발부됐고, 파업을 지휘하느라 경찰 조사에 응할 수 없었던 간부들은 수배됐다. <매일노동뉴스>가 8일 수배 상태에 놓인 현정호(46·사진) 금속노조 KEC지회 지회장을 모처에서 만났다.

노조 설립 22년 만에 '불법파업' 공방

KEC는 구미산업단지의 역사와 함께한 구미의 대표기업이다. 전자부품 회사로 시작해 반도체와 LED로 생산영역을 넓혀 왔다. 기술력과 수익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다. 전기자동차용 부품생산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직원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보니 88년 노조가 생긴 이래 노사관계도 원만한 편이었다. 노사는 큰 마찰 없이 22년을 함께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처음으로 ‘불법파업’ 딱지가 붙었다.

“올해는 임금·단체협상에서 노조 전임자 문제를 병합해 다뤘어요. 회사는 예년과 달리 공격적으로 교섭에 임했어요. 관행상 교섭이 잘 안 풀리면 회사측에서 실무교섭을 제안했는데, 올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지회는 지난달 9·11·15·16·18일 부분파업을 벌인 데 이어 같은달 21일부터 전면파업을 벌이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타임오프 한도를 적용하면 전임자수는 7명에서 3명으로 줄어든다. 현 지회장은 "노조 활동의 무력화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지만, 지회 입장에서 쉽게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지회는 금속노조 구미지부 4개 사업장 중 최대 조직이다. 조합원수는 714명으로, 대우라이프·한국오웬스코닝·한국합섬HK지회의 조합원을 합친 것보다 많다.
“KEC지회 한 놈만 때려잡으면 구미지역은 평정되는 셈이죠. 사용자들의 사전교감 속에 노조 무력화 시나리오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회사가 조합원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얼마 전 경주 발레오전장시스템스코리아에서 벌어진 상황과 똑같습니다. 심지어 발레오전장에 투입됐던 용역원들이 우리 공장에 투입됐을 정도니까요.”

"노조 무력화 시나리오에 맞설 것"

파업이 장기화되고 있지만 500명에 달하는 파업 참여 조합원수는 줄지 않고 있다. 조합원들은 회사 주차장에 대형 텐트를 쳐 놓고 주야 맞교대로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회사는 농성조합원들이 이용할 만한 화장실을 폐쇄하고 수돗물 공급도 차단했다.
“파업대오가 급격하게 약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조합원들이 똘똘 뭉쳐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됐을 때 외곽에서 지원해 주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경주 발레오전장의 사례가 경북지역 노동계에 미치는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노사가 파업과 직장폐쇄로 대치하다 파업 조합원들이 급격히 이탈하고, 급기야 민주노총 탈퇴로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이 ‘노조 파괴 매뉴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KEC지회의 파업투쟁이 무력하게 마무리되면, 다른 사업장에서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겁니다. 금속노조 내 중소형 노조들이 소리 없이 무너질 수 있어요. 타임오프로 시작된 노조 무력화 시나리오에 맞서고 있는 KEC 조합원들의 투쟁에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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