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의 운동적 의미

탄압하는 보수, 발목 잡는 진보

보수에 탄압 받고 진보에 발목 잡혀 있다는 것은 대중들이 이중의 질곡에 눌려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보수와 진보는 어떤 차원에서 서로 공모해 대중들을 짓누르고 있는가. 여러 가지 차원이 있겠지만 이념적 영역에서 보수와 진보가 교차하는 지점은 근대적 인식론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보수의 가치는 시장경제주의, 사유재산 보호,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는 이념체계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간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입장을 가진다. 한국의 경우 특정한 가치를 가진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기보다는 단지 기득권의 보호를 주요한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이념적 정체성보다는 반공주의 혹은 반노동이라는 부정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공격적이다. 이것은 지켜야 할 가치가 공허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더욱 강하게 공격해야만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기에 극렬성은 더욱 심화된다. 다시 말해 보수가 자유시장경제 이념을 중심으로 한다면 자유라는 이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이념과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반면 타락한 보수는 이해관계 추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위협이 되는 상대-민주노총 같은-에 대해 더욱 ‘과장된 악마성’을 강조한다. 그래야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근래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들의 논조는 논리가 아니라 그냥 ‘욕이나 저주’에 속한다.

한편 진보는 변화를 추구하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나 사민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강력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과 함께 90년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서 진보적 이념이 뚜렷한 가치를 드러내고 있지 못하다. 한국에서 보수란 재벌족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이란 시장경제주의를 기반으로 평등적 가치를 보완하는 이념 형태를 의미한다. 진보란 좀 더 사회주의적 지향을 추구하는 세력이지만 그것을 명시해서 대중적 토대를 구축하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념적 지형은 매우 척박하다. 보수와 개혁 그리고 진보의 공통점은 ‘서로의 안티테제’라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애초 보수와 개혁진보의 대립이 정치노선의 명확한 대립에서 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세력 간 충돌로 진행되면서 이념은 장식물이 됐고, 누가 얼마나 더 많은 표를 획득하는 세력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됐다. 이것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념형 정당보다는 실용주의적 정당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띠게 만들었다. 이것은 진보세력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줬다. 실용주의를 빙자한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방치 혹은 방조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지적 게으름이 낳는 치명적 결과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 빈곤은 스스로의 책임이다. 경쟁이 생산성의 원천이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밥 먹을 자격이 없다. 이러한 언명은 몰역사적인 진리를 가장한 자본주의적 이해를 반영한 구호다. 이러한 구호의 근대적 한계를 돌파할 이론적 힘도 의지도 없는 정치집단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구호와 영합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보수양당 구조 속에서 존재감 없는 소수정당으로 연명하는 것이다.

흘러가는 강물에서 열심히 노를 젓지 않으면 제자리에도 있을 수 없듯이 진보진영의 이론적 게으름은 진보진영이 대중의 강물 속에서 계속 떠내려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진보의 지적 게으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근대주의적 인식론에 안주함을 의미한다. 근대적 인식론9)은 일반적으로 합리주의·실증주의·과학주의·계몽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 주요한 희망을 부여한 것은 과학의 진전이었다. 19세기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 기초해 인간 이성의 힘을 자만하기 시작하면서 실증주의가 시작됐다. 불치병을 고치고 인간이 하늘을 날게 되면서 인간 이성의 힘으로 유토피아 건설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실증주의 탄생의 기반이다. 실증주의에서 절정을 이룬 합리주의적 인식은 이성, 혹은 합리성의 이름 아래 주관적 감성·동물성·본능·자연·우연·무질서 등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거나 배척의 대상으로 본다. 계몽주의는 합리주의를 인간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이성의 요구가 아니라 욕망과 본능에 따른 행동은 당연히 규제되고 계몽돼야 할 대상이었다. 대중들은 무지몽매하고 욕망과 본능에 따르는 자들로 간주됐다. 따라서 엘리트들에 의해 지식의 빛으로 계몽돼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결국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인식 기능에 차등을 부여하고, 종국에는 인간의 문화에까지 차등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인식론의 결과, 선진문명과 미개문명이 나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이 정당화10)되기에 이른다. 불행히도 이런 인식론적 태도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선진 한국’ ‘성장주의’ 등의 가치관을 통해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09년 마지막 국회에서 해를 넘겨 통과된 노조법도 마찬가지다.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사유에 ‘건전한 노사관계’라는 항목이 들어간다. 도대체 무엇이 건강한 노사관계일까. 합리성 이성주의의 절정에서 인류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는 것과 건전한 노사관계라는 담론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학살이 겹치게 보이는 것이 단순한 피해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한국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나는 이념 따위는 믿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나는 데카르트주의자요’, ‘나는 칸트주의자요’라고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 하면 그런 근대주의적 사상들은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 주위에 존재하면서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지침11)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깨우치는 계기가 없는 한 그냥 그렇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개혁·진보주의자들의 설교가 진부한 이유

현실생활 차원에서 말해 보면 근대적 인식론이란 과학, 이성, 눈에 보이는 것, 확실한 것, 그리고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이 절대적 의미를 가진다는 태도다. 수치화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물어보자. 누구에게 유리한가. 시간으로 계산해 지불하는 자본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그림자노동들은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측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계량화주의-모든 것을 측정가능한 양으로 환산하는-는 이런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에 힘입어 인식론의 주요한 기초가 된 것이다.

이것은 진보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운동의 정책 역시 계량화되지 않으면 과학적이지 않고 무언가 빠져 있다는 평을 듣게 된다. 따라서 진보운동 세력도 그런 계량화의 신화를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다. 그것이 부족하면 더 강하게 주장할 근거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심리적 효과는 바로 대중의 폭발적 불만을 위로부터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시민단체나 개혁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노동운동 혹은 진보진영의 대안에 대해 ‘대안에 구체성이 없어 미덥지 못하다’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에 매몰돼 있다’ ‘세계 경제질서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스스로 변하려하지 않는다’ ‘고용유연화에 대해 노동은 너무 경직적 대응만 한다’ 등의 지적을 한다. 그래서 진보도 실용주의가 필요하다고 판정을 내린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뭔가 공허한 느낌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노동운동이 전투적이다’라는 것은 왜곡된 허구라는 사실임은 이미 밝혔다. 현장에서는 속임수가 아니고 실제 고용이 유지된다면 유연성에 대해 얼마든지 협상할 수 있다. 지금 유연안정성을 가장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자본 측이라는 현실을 못 보고 있다. 둘째, 실증적으로 계량화된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면 그것을 인정할 것인가. 예를 들어 기본소득의 경제적 효과를 실증 분석한 최근 연구결과12)에 따르면 기본소득 도입할 경우 국내총생산(GDP) 증가분은 금액으로는 31.9조원, GDP의 3.5%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효과보다 10배 이상의 경제적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진보적 대안이다.  

이런 진보적 대안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실증분석 자체의 계산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별로 상관없이 이제 그 대안의 비현실성과 지나친 급진성을 제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바로 이지점! 명확히 대안을 제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은 이제 근대주의의 포로가 된 인식론의 문제다. 제 눈의 색안경을 벗어 놓지 않고서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사상에서 과학주의가 나오고 그것이 엘리트로 하여금 대중을 기죽인다. 칸트의 사상에서 불가지론이 나와 대중의 변혁적 진출에 물타기를 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되 반쯤 잠들어 있는 것과 같다. 그 몽롱한 공간에서 자본의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이해를 관철하고 있는데 막상 그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모습 아닐까.
 
노동 그 자체의 변화에 주목하기

사실 근대적 인식론의 한계를 처음 새롭게 제기한 것은 마르크스였지만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서 다시 근대주의의 함정에 빠졌다. 그는 근대철학의 근본 문제, 즉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냐라는 질문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제기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이고 사회인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개별이자 곧 인류라는 덩어리라는 것이다. 물론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전  인류나 사회 전체가 아니라 개별의 인간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개개의 인간이 없다면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개개의 인간 자체가 서로 일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주어진 사회조직의 단계에서 입수한 생산수단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것은 기본소득 논의와 관련해 주요한 철학적 출발점이 된다. 객관적 관념론은 의식·이성이 어느 한 명의 구체적 인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이 특수성을 신비화해 그 자신의 논리에 따라 운동하는 자립적 본질로 묘사했다. 때문에 주체와 상호작용하는 객체와의 관계를 올바로 인식할 수 없었다. 이 모호한 지점에서 기본소득이 당연한 보편적 권리로 주장될 수 있는가, 아니면 여러 선택 가능한 정책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냐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 모호한 지점을 해결한 것은 ‘실천’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그가 인식론에서 이룬 성취는 근대적 문제 설정, 즉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제3자의 필요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에 있다. 실천이라는 개념의 의미는 쉽게 말해 인식주체의 지각 감각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 속에서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명하고 확실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주체란 없다. 오직 실천적 활동 속에서 지각되고 사고하며 판단하는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실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물질적 생활 속에서 주체의 지각과 사고 등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로써 근대적 주체와 대상의 개념은 존재론 상에서나 인식론 상에서나 근본적으로 해체된다. 주체란 단어는 개념적 변용을 겪는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개념 자체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전혀 새로운 정의를 얻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사회적 생산물은 본질적으로 인류의 집단적 실천활동의 결과물이다.
△ 인간과 인류 즉 개별과 덩어리를 이어 주는 것은 실천을 매개로 한다.
△ 실천이란 주체와 객체사이의 일치성 혹은 진리성을 보장해 주는 제3자를 대신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다.
△ 자명하고 확실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주체란 없으며 오직 실천적 활동 속에서 지각하고 사고하며 판단하는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시 사람들의 실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물질적 생활과정 속에서 주체의 지각과 사고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나아간다.
△ 근대적 주체, 대상의 개념은 존재론 상에서나 인식론 상에서나 근본적으로 해체되고 주체란 단어는 개념적 변용을 겪는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개념자체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전혀 새로운 정의를 얻게 된다.
 
[각주]
9) 역사적으로 근대란 중세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넘어가면서 시작하지만 철학적 의미에서 근대란 나를 신으로부터 떼어 냄으로써 시작된다. 중세의 중심이었던 신의 자리를 인간 이성이 차지했지만  그 이성의 완전성에 대해서는 불안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당시 철학의 1차적 과제였다. 데카르트는 나, 즉 주체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이것이 자명한 출발점이라고 봤다. 이러한 독립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 길을 둘러싼 다양한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영역이었다. 인간이 이성에 눈을 뜨고 이성에 의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합리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아직 추상적 관념을 낳을 뿐이었다 -필자주
10) 뒤랑이 서구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이다. 뒤랑은 인간학이 진정으로 보편적인 인간학이 되려면 인간에 관한 것이면 그 어느 것도 낯설지 않은 관점을 단호하게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학이 보편적 인간학이 되려면 서구 합리주의 이름하에 배척되었던 것들, 즉 인간성 내부의 주관성, 동물적 본능뿐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우연·무질서 등을 모두 포괄하는 인간학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능에 그는 상상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진형준,「실증주의 시대의 힘. 상상력」 살림, 33쪽
11) 예를 들어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 그 분야에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수학을 못한다는 강박 관념과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고 이것은 학교 교육에 의해 체계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 열등감은 사회에서 계량화와 지배계급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한다  실제 학교에서 배운 수학적 지식은 거의 쓸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고3까지 엄청나게 어려운 수학공식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좌절감이 체제유지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지배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때문에 오늘도 수많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필자주
12) 지금까지 기본소득 논의에서 승수효과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저소득층의 소비 성향과 고소득층의 소비 성향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일차적 효과는 승수효과라고 할 수 있다. 승수효과는 기본소득을 지급할 때 고소득층의 소비감소보다 저소득층의 소비증가가 크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 승수를 기본소득승수라고 불러보자. 간단한 모형을 만들어 기본소득승수를 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70조원(=△T) 정도의 세금을 추가로 걷어 나눠 주는 우리의 기본소득 모형에서, 상위 분위의 소득이 감소하는 만큼 하위 분위의 소득이 증가하고, 중위 분위는 소득변화가 없다고 가정할 수 있다. 기본소득조세 중에서 상위로부터 하위로 이전되는 소득의 비율을 1/d라고 표현해 보자.
다시 말해 상위 분위가 1/d*△T(예를 들어 42.5조원)를 순부담하고 하위 분위가 같은 금액의 순이득을 본다고 가정하자. 상위 분위의 한계소비성향을 c1, 하위 분위의 한계소비성향을 c2, 경제 전체의 한계소비성향을 c, 한계수입성향을 m이라고 할 때(기타 조세는 무시), 상위의 소비감소로 인한 GDP감소는이고(2번째 단계부터는 경제 전체의 소비성향 c를 사용했음), 하위의 소비증가로 인한 GDP 증가는 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전체적인기본소득승수효과는다음과같다.  
   
위의 식 중에서 를 기본소득승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통계를 기초로 하고, c1이 상위 두 분위의 소비성향이고, c2가 하위 여섯 분위의 소비성향이라고 생각해서, c2=0.9, c1=0.6, c=0.8, m=0.2 의 값을 가진다고 가정하자. 이 값들을 대입해 보면, 기본소득승수는 0.75 정도가 된다. 조세 징수분을 170조원이라고 보고, d=4를 대입해 보면, GDP 증가분은 금액으로는 31.9조원, GDP의 3.5% 정도가 될 것이다.쪹  
이러한 승수효과는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이자율이라든지 물가, 노동시장 변수 등과 같은 다른 거시변수들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므로 해석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을 통화개혁 형태로 공급하지 않는 한, 기본소득제도는 화폐발행 증가 없이 수요를 증가시키는 것이고, 증가된 수요는 대부분 쉽게 공급을 늘릴 수 있는 저소득층의 생필품 수요일 것이므로 인플레이션의 우려는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승수는 기본소득의 도입을 통한 분배 상태의 개선만으로도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순한 경제성장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가 성장하면 기본소득조세도 더 많이 걷힌다. 위에서 기본소득이 GDP의 3.5%를 증가시킨다면(장기간에 걸쳐서), 현재 세율이 50% 정도가 되니까 조세수입도 1.75% 정도 증가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기본소득 제도 자체가 기본소득 조세 수입을 증가시키는 일종의 재정안정장치(financial stabilizer)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경제의 구조도 바뀌게 된다. 기본소득은 생필품을 중심으로 하는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기본소득은 내수중심 경제를 건설하는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강남훈-기본소득의 경제적 효과 -2010 국제세미나발표문
▷ 정부는 한미 FTA로 인해 10년 내지 15년 동안 GDP가 6% 증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주장은 과장된 것이지만(신범철. 2008),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하면 매년 3.5% 증가하게 되므로, 그 효과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한미 FTA의 10배 이상의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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