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미국 미시간주에 사는 40대 여성이 자신의 어깨에 총을 쐈다. 이 여성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으면서 평소 아팠던 어깨도 치료할 생각이었지만, 끝내 어깨 통증을 치료받지 못했다. 수입이 없는 데다,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경찰조사에서 “비싼 병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2007년 미국에서 개봉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cko)는 미국 의료제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손가락이 두 개 잘린 노동자는 보험에 들지 못해 손가락 하나만 봉합했고, 아픈 미국인들이 무상진료를 받기 위해 보트를 타고 쿠바로 건너갔다. 이런 가운데 올해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의 보건의료개혁법안에 서명했다. 서명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암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보험회사와 싸워야 했던 나의 어머니를 대신해 이 법안에 서명한다.”
 
미국, 1세기에 걸친 도전 

미국 의료개혁법안의 핵심인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는 2014년부터 시행된다. 현재 5천400만명 수준인 무보험자 중 3천200만명이 보험 혜택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1912년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공약한 후 100년 동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의료보험개혁에 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번 개혁안은 수혜대상이 저소득층에 집중됐다. 높은 보험료에 시달리는 중산층의 부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과제로 남았다. 아파도 병원비가 없어 진료를 포기해야하는 현실은 과연 미국만의 이야기일까. 이미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역설적으로 점점 미국을 닮아 가고 있다. 지난해 사회동향연구소가 성인남녀 1천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4명은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를 포기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은 세계적으로도 모범적인 모델로 꼽힌다. 보험료는 소득능력에 따라 납부하지만 보장수준은 똑같다. 최단 기간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보험을 확대해 2008년 현재 전체 국민의 96.3%(4천800만명)가 보험 적용 대상자다. 나머지 3.7%(180만명)는 의료급여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일은 왜 일어날까.  
 
낮은 건강보험 보장성, 높은 본인 부담금 

국민들의 병원비 부담이 줄지 않는 이유는 건강보험의 보장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2008년 기준 국민건강보험 보장률은 62.2%였다. 병원비가 100만원이 나왔다면 이 중 62만2천원은 국민건강보험에서 지불하고, 나머지 37만원8천원은 환자 본인이 부담한 셈이다. 암·심장질환·뇌혈관질환 같은 중증질환 보장률은 이보다 약간 높은 70%였다.

그런데 골수이식과 항암치료를 받는 백혈병 환자의 연간 치료비는 1억원이 넘는다. 본인 부담금만 4천만원에서 8천만원에 이른다. 안기종 한국백혈병환우회 대표는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했더라도 치료비 부담은 여전하다”며 “정액형보험은 보험금을 한 번만 지급하고, 실손형보험은 3년 뒤 갱신할 때 보험료가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병원비에 대한 부담은 민간의료보험 가입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맹장수술을 한 김영철(가명·32)씨는 퇴원 후 바로 실손형보험에 가입했다. 김씨는 “주변 사람들이 맹장수술은 간단해서 비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다”며 “퇴원할 때 병원 원무과에서 진료비 내역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맹장수술 한 번 받고 한 달 월급을 대부분을 써 버린 그는 퇴원 후 내친 김에 아내 몫까지 합해 실손형보험에 가입했다.
그는 “매달 나가는 15만원의 보험금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며 “건강보험이 더 많은 항목을 보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국민들이 매년 민간의료보험에 지불하는 보험료는 2008년 기준 12조원에 달했다. 2003년 6조원에서 5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표 참조>
 

모든 병원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그런 가운데 최근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자는 시민운동이 시작됐다.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가 다음달 14일 공식 출범을 앞두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국민 1인당 건강보험료를 월평균 1만1천원씩 더 내고 보장성을 90%까지 확대하자는 것이다. 1만1천원을 더 내면 6조2천억원의 조성되고, 여기에 기업주 부담금 3조6천억원과 정부의 법정 국고지원금 2조7천억원을 더하면 관리운영비를 제외하더라도 12조원의 재원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모인 12조원으로 진료 성격을 지닌 비급여를 모두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로 전환하고, 환자 1인당 본인 부담금이 연간 100만원을 넘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과 관련해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병원 현장에서는 보호자 없는 병원과 함께 환자와 보호자들의 반응이 뜨겁다”고 전했다.
 
‘풀뿌리 운동’으로 확산될까 

이 운동의 특징은 ‘풀뿌리 운동’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시민단체 중심의 상층운동에서 벗어나 시민 개개인을 운동의 주체로 만들자는 것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에서 보여 준 시민들의 건강권에 대한 관심을 돌아보면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오히려 노동계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민주노총 소속으로는 보건의료노조와 공공노조 사회보험지부만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어 조직 전체가 참여하기는 쉽지 않은 조건”이라며 “(건강보험제도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보험료 인상만으로 보장성을 확대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로서는 민간의료보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고용불안도 딜레마다. 그런데 당사자들도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운동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한 손해보험노조 관계자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대해 “손해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실손형보험 시장이 위축돼 고용이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면서도 “그래도 전 국민이 많은 혜택을 본다는 데 손을 들고 싶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하나로 준비위도 민간의료보험 종사자의 고용불안을 해소할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 민간의료보험업계에 종사했던 노동자들이 공적영역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사회적 수준의 전환배치’도 검토하고 있다. 오건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치료 중심의 건강보험을 예방 중심으로 개편하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업무 영역이 확대될 것”이라며 “숙련도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이 노후 자산관리나 건강보험공단 서비스영역에서 일할 수 있도록 완충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의료보험 시장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팽창하기 전에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건강보험료 인상이 보장성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진보진영 내부의 이견을 설득하는 것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의료민영화 법안 국회에 줄줄이

건강보험 하나로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노력이 절실하다. 건강보험 국고지원금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매년 제기돼 왔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건강보험료 수입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국고로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지원금은 16%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의료비 상승이 우려되는 영리병원 도입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영리병원 도입에 따른 의료비 상승 부작용은 지난해 정부 용역 보고서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최근에는 변웅전 자유선진당 의원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건강관리서비스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치료행위를 제외한 모든 의료행위를 국민건강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국회에는 이 밖에도 △의료법인 부대사업에 병원경영지원사업을 추가하는 의료법 개정안 △비영리법인에 의료채권 발행을 허용하는 의료채권 발행에 관한 법률안 △개인질병정보 열람을 허용하는 보험업법 개정안 △영리병원을 허용하는 제주특별자치도 특별법 개정안 등 이른바 ‘의료민영화 법안’이 줄줄이 계류돼 있다.
정부의 의료민영화 시도는 전 국민 의료보험을 도입하고자 하는 미국의 흐름과는 정반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의료민영화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 ‘뜨거운 감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은 “월드컵 16강에 대한 꿈은 꿔도 사회복지에 대한 꿈은 꾸지 못했다”며 “건강보험 재정을 확보해 보장성 90%를 확보하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줘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쟁점으로 떠오른 것처럼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 오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대표적인 복지공약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민간의료보험에 보험료 더 낸다
선진국, 월수입 10% 내외 건강보험료로 납부 
올해 기준으로 국민건강보험 지역 가입자는 1인당 월평균 3만6천원, 직장 가입자는 2만9천원의 건강보험료를 내고 있다. 직장 가입자는 월수입의 5.33%를 건강보험료로 낸다. 고소득자일수록 보험료를 더 내는 구조다.
지난해 사회동향연구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6명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료는 5만원에서 10만원 미만이 22.4%로 가장 많았고, 10만~20만원이 15.6%, 5만원 미만이 14.2%로 조사됐다. 건강보험료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이미 민간보험료로 지출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준비위원회에 따르면 보험 방식으로 의료보장제도를 운영하는 선진국의 경우 보통 월수입의 10% 내외를 건강보험료로 납부한다.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외국의 건강보험제도’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국민건강보험 보험료율은 8.5%, 대만은 9.1%, 독일은 14%, 프랑스는 19.3%였다. 대신 대부분의 병원비는 건강보험으로 해결된다.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지정한 30종류의 중증질환이나 200유로(32만원) 이상 부과되는 입원진료비의 경우 본인 부담을 면제해 준다.
대만과 일본은 보험료 수입의 30%를 국고로 지원한다. 국영의료제도를 운영하는 영국·스웨덴은 별도의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않고 일반 조세수입으로 의료재정을 확충한다.
건강보험료를 더 내서 보장성을 확대할 것인가, 아니면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 개인이 병원비를 부담할 것인가.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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