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랑하는 아내 순영에게  -김주성-
 
우리 아성이 엄마,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 이제는 날도 짧아지고 밤 날씨도 꽤 쌀쌀해지는 것이 완연한 가을로 깊어가고 있는 것 같아. 몸은 춥고 싸늘하지만 당신한테 미안한 것 빼고는 마음에 온기가 감도는 것 같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순영이는 이해하겠지? 암튼, 우리 아성이, 복덩이 엄마, 고생 많아. 순영이와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이 더, 볼 때마다 새록새록한 마음이 생기는 건 왜일까? 그 무뚝뚝한 순영이 맘을 이제야 하나둘 알아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나야 뭐,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고 숨기는 놈이 아니기에 당신 또한 속내를 드러내라고 보채기도 하고 자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역시 성격이라는 게 쉽게 변하지 않나 봐. 하지만 지금의 순영이는 두 아이의 엄마, 한 남편의 아내로서, 또 힘든 역경을 이겨내면서 많이 단련되고 단단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수만 번의 담금질로 강철이 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나 또한 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 단련하는 과정이고, 이런 단련과 경험이 우리가 앞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야 할 자양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주길….
여기 들어와서 느낀 점 몇 가지를 이야기할게.
첫째로 여기 계신 분들이 감옥에 있다는 자체가 좀 이해가 안 돼. 얼마나 선하고 정이 많은지 잘 매치가 안 되더라고. 물론 습관적인 사람도 있지만 생활 경제범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둘째로 가정에는 소홀한 게 미안하지만 규칙적인 일정, 운동, 식사로 인해 생활습관, 건강 등등 많이 좋아졌고, 출소해서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다짐한다.(내가 좀 게으른 것 알지? 이젠 좀 고쳐야지!)
셋째로 엇갈리고 엉켜 있던 내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고 나가서 돈 벌 계획, 쌍용 현안 문제들을 좀 고민해서 가정의 웃음꽃 좀 펴야 되지 않겠니?
암튼,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라도 듣고 배워서 사회에 나가면 유용하게 써먹어야겠다.
 
다들 아성이 엄마 칭찬에 난리다. 힘들어도 꿋꿋하게 잘 참고 견딘다고…. 그리고 바람인데, 힘들 땐 참지 말고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나 없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많이 사먹고…. 핸드폰 없으니까, 농담 아니니까 꼭 그렇게 해. 기분전환도 하고. 알았지?
항상 행복해야 할 의무를 띠고 태어난 우리 아성이, 그리고 복덩이, 늘 아가씨처럼 새침한 날 영원히 사랑해 줄 우리 순영이.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자구나.
 

41. 쌍용자동차 투쟁을 돌아보며  -서희-
 
올해 내 나이 마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2009년 5월 13일부터 8월 6일까지가 지금껏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에서 살며 쓰디쓴 경험을 한 날들이었습니다.
5월 13일 아침, 남편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하늘이 참 맑다.’ - “웬 뜬금없는 소리.” 하며 남편에게 전화를 해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 속상하다며 하소연만 하고 끊어 버렸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한심하고 미안했습니다. 70m 높이 굴뚝농성에 돌입한 날, 미안한 마음에 남편이 나에게 보낸 문자였을 텐데….
 
5월 16일, 비가 많이 내렸지만 아이들과 함께 평택으로 갔습니다. 열흘 만에 만난 남편은 70m 굴뚝 위에서 우리는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며 상봉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온 우리 아들은 그날부터 날씨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오늘 날씨는 덥대. 비가 온대.” 딸은 매일 아빠에게 전화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말이 되면 자전거 타는 것도, 게임을 하는 것도 포기하고, 아빠 얼굴 보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작게 보이는 얼굴이라도 보려고 발을 높이 들어 보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여 보기도 했지만, 늘 마음 한쪽은 쓰리고 아팠습니다. 비오는 날은 걱정이 되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더운 날에는 미안한 마음에 선풍기도 켤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날들이 지날 때마다 나와 가족의 마음은 하루하루 더 힘들고 지쳐만 갔습니다. 그래서 ‘가족대책위’ 모임에 가입했고, 정비지회도 별도의 ‘가대위’를 결성하여 대표직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대위 모임에서는 서로를 위로해 주었으며, 주말에 함께 평택에 내려가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6월 27일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고 두렵습니다. 경찰은 헬리콥터를 낮게 날아 모래바람을 날렸고 용역 깡패와 한 편이 되어 우리를 막고 잡아갔습니다. 그때 흘린 눈물만 모아도 몇 년 동안 울 눈물일 겁니다.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싸움은 꼭 전쟁터 같았습니다. 전쟁터 속에서 우리 ‘가대위’는 남편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애원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아마 위에서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은 더 아팠을 겁니다. 동료들을 도울 수도 없고 밖에서 싸우고 있는 부인을 도울 수도 없다는 사실에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늦게까지 계속되는 싸움이 갑자기 잠잠해지더니, 사측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면서 우리 ‘가대위’에게 욕을 퍼부으며 물통을 던져 아이를 다치게 하였고, ‘가대위’들의 머리를 때리며 지나갔습니다.
 
내가 왜 저들에게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연두색 티셔츠를 보면 무섭고 화가 난다는 사측 사람들. 지금도 그때 그 일은 나에게 큰 충격이고 아픔입니다. 그날 사측이 물러서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하루를 같이 보냈습니다. 그날 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남편들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에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날 이후 사측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습니다. 더 이상 공장 안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먹을 것, 약, 물 등을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의료진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쌍용자동차 사태를 알리기 위해 선전전을 하며 이곳저곳을 다니고 도와달라고 호소도 했습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찾아가면 혹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그곳에도 가보았고, 종교계의 높은 분들을 만나면 도와줄 수 있을까 하여 밤을 지새우며 만나기도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 아이들은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며 보살폈으며, 집안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약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약이 떨어지기 전에 약을 넣어줘야 하는데, 그것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애원도 해보고 호소도 해 보았지만 사측은 내려와서 먹으라고만 합니다. 정말 그 순간은 사측 사람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쁜 놈들, 너희도 인간이냐.’ 화를 참고 욕을 참아야 했습니다.

공권력이 투입되는 날도 또 한 번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경찰은 사측과 한패가 되어 힘없는 우리 ‘가대위’와 우리를 도와주려고 온 동지들을 마구 때리고 ‘가대위’ 천막도 부숴버렸습니다. 그날은 한 편의 공포 영화를 본 것 같았습니다. 사측은 가지고 나온 몽둥이로 천막을 때려 부수더니, ‘가대위’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동지들을 끌고 가서 집단 폭행을 했습니다. 사측의 만행을 찍는 기자들을 폭행하고, 기자들의 차도 때려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들은 남편이 있는 공장 안에는 절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가대위’를 잡아 남편들 앞에 데리고 가서 협박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서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장 근처에는 갈 수도 없었습니다.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찾아가 애원을 해 보았지만 불법 집회라며 경찰서로 끌고 가서, 조사를 받는 경험도 해보았습니다. 생전 처음 가본 경찰서,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우리 남편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하며 밤낮으로 뛰어다녔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아 마음이 아픕니다.
 
8월 6일 오후 6시, 헬기를 타고 땅을 밟았다는 연락을 받은 후 눈물이 흘렸습니다. ‘무사히 내려왔구나, 이제는 살았구나….’ 얼굴을 보려고 기다리는 몇 시간이 몇 날 며칠보다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평택경찰서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가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탄 차가 경찰서로 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차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편의 이름을 불렀고 드디어 남편을 만나, 손을 잡아볼 수 있었습니다. 86일 동안 높은 고공에서 있었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것조차도 힘들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며, 저는 또 한 번 울었습니다.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법은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먼저 잘못된 점에 대해 조사를 받고 형을 살아야 한답니다.
 
남편은 이틀 만에 경찰서를 나와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생했다고 서로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새벽녘에 잠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은 끝났습니다.
 
남들은 말합니다. 77일 옥쇄파업, 86일 굴뚝농성을 했지만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사측과 정부가 짜놓은 각본대로 다 되었다고. 저만 살겠다고 함께 하지 않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처음에는 그들도 가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이해했지만 지금은 화가 납니다. 밉습니다. 모두 함께 했더라면 이렇게 마음 아프고 쓴 경험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도 교도소 안에 있는 동지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더 아프고 쓰립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미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구로동에 있는 정비지회 앞을 지나갈 때면 욕이라도 신나게 해주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우리 가족은 쌍용사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해야겠다는 생각과 마음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내 인생과 우리 가족의 인생을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을 얻은 것 같습니다. 끝까지 함께 했던 동료들, 동지들, 아내, 그리고 친구들, 우리 모두 소중히 여기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구속된 동지들이 무사히 가정으로 복귀하는 그날까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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