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 노사의 올해 임금·단체협상은 노동계는 물론이고 경영계와 정부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가 노조 전임자의 처우 보전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지난 17일과 20일 교섭 상견례가 두 차례 무산되는 등 본격적인 교섭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회사측과 언론, 정부는 연합전선을 구축해 지부의 요구안을 흔들어 대는 모양새다.

반면 노동계는 금속노조의 주요 사업장이면서 이른바 ‘강성노조’로 분류되는 기아차지부가 전임자 투쟁국면에 구원투수로 등판해 노동계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아차가 노동계와 경영계, 노동계와 정부의 대리전을 치르는 셈이다.

당장 이달 말 시작되는 금속노조의 총파업도 기아차지부의 참여 여부에 따라 파업수위와 위력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일 오후 기아차 소하리공장 지부사무실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김성락(46) 기아차지부장은 “올해는 교섭력보다는 현장력으로 돌파하겠다”고 강조했다. 교섭만으로는 올해 임단협에서 다뤄질 굵직한 의제를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자본과 정부·보수언론은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려는 전략을 공세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최근 회사측의 여론 호도작업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는 (잘못된 정보를 통해 왜곡된) 국민 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직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본과의 싸움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회하기보다는 정공법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기아차지부, 노동계 구원투수 될까

기아차 임단협의 1라운드는 이른바 ‘600명 요구설’로 시작됐다. 지부가 현재 136명인 전임자를 600명으로 늘려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 ‘600명 요구설’의 핵심이다. 600명 요구설은 자극을 좇는 언론에 좋은 먹잇감이 됐다. 지부는 졸지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개정한 정부에 딴죽을 거는 시대역행적 집단으로 그려졌다.

싸움을 먼저 시작한 쪽은 회사측이다. 현대·기아차그룹 홍보실이 지난 6일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의 제목은 ‘법 위의 노조? 기아차노조 전임자 확대 요구’다. 회사측은 이 자료에서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가 발표한 기아차의 유급 근로시간 면제한도는 18명으로 상당수의 전임자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지부의 임단협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기아차에서 조합활동으로 인정되는 인원은 600명을 넘어서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지부장은 “회사가 의도적으로 지부의 요구를 왜곡했다”며 “지부의 요구는 올해 4월1일을 기준으로 관례와 노사협의에 의해 인정해 온 지부 간부의 지위에 따른 활동을 보장하라는 것이지 전임자를 늘리라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전임자를 유지하라”는 지부의 요구, “전임자를 지금보다 세 배 이상 늘리라는 지부의 요구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회사측의 주장. 이 같은 현격한 의견 차이는 지부의 임단협 요구안에 대한 노사의 해석 차이에서 비롯됐다.

전임자 유지냐, 전임자 확대냐

지부는 임단협 요구안에 기존 단협 9조(조합활동 시간 보장)의 내용을 보강해 간부의 범위를 △본조·지부·지회·분회의 임원 및 감사위원 △실장·부서장 등 집행간부 △본조·지부·지회의 대의원 및 중앙위원으로 명시했다. 또 이들 간부가 근무시간 중 조합원총회·대의원대회·운영위원회·교섭·회계감사·상급단체 및 외부단체 행사에 참석할 경우 근태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실제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시간을 100% 면제받는 대신 지부 활동에만 전념하는 전임자는 물론, 특정시기에만 활동하는 감사위원·대의원 등 각급 지부·지회 간부의 활동을 명시하고, 각각의 활동에 따른 처우를 기존대로 인정하라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늘 그랬듯이 대의원대회에 참석하는 대의원의 근태를 인정해 달라는 식이다.

그런데 회사측은 이를 다르게 해석했다. 각급 간부의 수를 모두 더해 600명 요구설을 유포한 것이다. 회사측은 특히 “지부의 요구안은 교섭대상이 아니다”며 임단협 상견례도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노동부가 회사측을 지원하고 나섰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지난 19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아차의 임단협을 언급하며 “법정 한도 이상으로 전임자를 허용하는 사업자는 일벌백계 차원에서 단호하게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임 장관은 “경영계가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뭔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인터뷰를 읽고 나서 노동부가 엄포를 놓는 대상이 경영계가 아니라 노동계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전기차 시대, 지금부터 준비해야"

기아차 노사의 갈등은 김성락 집행부가 출범한 지난해 11월 이후 계속돼 왔다. 회사측은 지난 6개월 사이 90여명의 지부·지회 간부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했다. 지부도 20여건의 사건에 대해 회사측을 맞고소했다. 대부분 노사합의 이행을 둘러싼 갈등이다.

고용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첨예하다. 최근 소하리 1공장에서는 프라이드 혼류생산을 놓고 마찰이 빚어졌다. 기존 소하리 2공장에서 생산되던 프라이드는 2008년 12월부터 1공장 카니발 라인에서 혼류생산되기 시작했는데, 최근 1·2공장의 잔업과 특근이 줄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어 회사측이 사업설명회 자리에서 “공장 편성률을 높이기 위해 공정을 재편성하고 500여명을 줄이겠다”고 밝히면서 노사갈등이 증폭됐다.

김 지부장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회사측이 인원감축 계획을 철회했지만, 설비 투자와 신차 투입이 정체된 상황에서 소하리공장의 고용 문제는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엔진과 변속기 같은 주요 부품의 외주화도 고용 문제로 귀결된다. 소하리공장의 경우 봉고와 카니발에 탑재되는 ‘KJ 엔진’이 단종되면서 노동자들이 고용불안 상태에 놓였다. 광주공장은 엔진물량이 꾸준히 줄어든 끝에 지난해 엔진 관련 부서가 사라지기도 했다. 엔진과 변속기를 모터로 바꿔 놓을 ‘전기차 시대’의 도래 역시 고용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요소다. 김 지부장은 “전기차 시대에 대비한 노동계 차원의 고용안전판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지부는 이와 관련해 ‘엔진 중장기적 전망 확보를 위한 TFT’를 가동 중이다. 전문가까지 참여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엔진이 모터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용 문제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전기차 개발이 초기 단계에 있는 지금부터 대책을 마련해야죠.”

"해외생산 비율제로 국내 일자리 창출"

지부는 올해 임단협 요구안에 전임자 문제 외에도 자동차 노사의 오랜 과제인 주간연속 2교제대와 월급제 도입, 해외공장 생산비율제 도입, 기본급 인상, 사내하청 비정규직 처우개선 등 중량감 있는 요구를 대거 포함시켰다. 올해 금속노조가 중앙교섭 자동차분과 요구안에 포함시킨 해외공장 생산비율제 도입 문제는 기아차의 교섭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다시 조명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아차의 해외공장 생산능력은 중국·슬로바키아·미국을 합쳐 약 105만대에 달한다. 문제는 이미 가동 중인 해외공장의 가동률이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기아차 중국공장의 생산능력 대비 실적달성률은 2008년 32.2%, 2009년 54.1%에 불과하다. 슬로바키아공장의 지난해 실적달성률도 50%에 미치지 못했다.

“해외에 공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국내 공장에 대한 투자는 사실상 중단됐습니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청년실업자가 증가해도 현대·기아차그룹은 국내 일자리 창출을 외면해 왔다는 뜻입니다. 국민들은 해외공장으로 인해 현대·기아차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믿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 번 돈으로 해외공장의 손실을 메우고 있어요.”

해외공장 생산비율제가 국내공장과 해외공장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현대·기아차그룹이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현실적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지부는 올해 임단협에서 전임자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고용안정을 위한 장기 비전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교섭의 장기화가 예상된다. 지부도 파업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 지부장은 "갈 길이 멀지만, 노사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여지도 충분하다"며 "회사측은 더 이상 교섭을 지연하지 말고 교섭테이블에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파국을 막을 길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뿐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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