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은 석탄먼지로 뒤덮인 암흑의 땅이었다. 석탄만큼 어두웠던 계엄령을 뚫고 탄광노동자의 목소리가 민주화의 빛으로 솟아올랐다. 그로부터 30년. 탄광은 사라지고 근처에 카지노(강원랜드)가 들어섰다. 각종 휴양시설로 밤조차 휘황찬란해진 사북. 이곳엔 아직도 80년 4월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이제는 화해하고 싶은데, 그럴 때도 됐는데…. 우리 사회의 품은 아직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이제는 화해하고 싶다
 
“참 많이 맞았지. 말로만 듣던, 글에서만 보던 아비규환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더랬어.”
사북항쟁 당시 동원탄좌노조(전국광산노조 동원탄좌지부)의 민주파를 이끌면서 항쟁을 주도했던 이원갑(70·사진)씨. 그는 상의를 추켜올리면서 휘어진 갈비뼈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왼쪽 갈비뼈 한쪽 끝이 살 위로 불룩 솟아 있었다. 군홧발에 맞아 뼈가 휘어져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라고 했다. 왼손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의 마디는 화상을 입은 것처럼 찢어졌다가 살이 붙은 흔적이 역력했다.

“사북항쟁이 끝나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150명 정도가 계엄군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어. 고문조가 순회하듯이 돌면서 군홧발로 차고 고무호스로 때리고 물고문 하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가득했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매일노동뉴스>가 사북항쟁 30주년을 맞아 지난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을 찾았다. 이날은 마침 사북항쟁동지회와 고환·사북·남면 지역살리기 공동추진위원회가 사북항쟁 30주년 기념식을 열던 날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200여명의 사람들이 기념식이 열린 사북읍 뿌리관 공개홀을 가득 채웠다. 뿌리관은 사북항쟁의 결과로 탄광노동자를 위해 지어졌던 동원복지관이 전신이다. 2008년 탄광촌 주민들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됐다.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 경기도 수원·광주, 전라도 나주, 경상도 안강 등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국내 최대 민영 탄광업체인 동원탄좌가 있었던 사북은 한때 탄광노동자만 6천명에 달했던 곳이다.

사북은 더 이상 탄광촌이 아니다. 사북항쟁 당시 탄광노동자 가운데 지금까지 사북읍에 사는 이는 많지 않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다는 30년이라는 세월이 가져온 변화다. 사는 모습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80년 4월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2000년부터 사북항쟁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운동이 펼쳐졌다. 그해 1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기 때문이다. 탄광노동자들은 “우리는 폭도가 아니었다”고 외쳤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었다”
 
“감방에서 1년6개월을 살고 81년 말에 나왔지. 복직하려고 했는데 받아 주지 않더만. 그래도 사북을 떠나지는 않았어. 보험외판원도 했고 식당도 운영했지.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이라고는 석탄 캐는 것밖에 몰랐는데 살려고 바동대니까 살아지더라고.”

사북항쟁의 주역으로 사북항쟁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씨. 그는 80년 당시에는 폭도의 수괴였고, 이후 사회로부터 낙인 찍혀 하루하루 먹고살 걱정을 했던 일개 무명인이었다.
나이도 들고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을 90년대 중반 무렵, 이씨는 사북지역 정치인과 유지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북항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는 해고되고 고문받고 폭도로 몰렸던 사람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항쟁 당시 서로 싸웠던 사람들을 만나 화해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동원탄좌는 지역에서 가장 큰 업체였다. 지역유지들 또한 동원탄좌와 연관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열심히 지역유지들을 찾아다녔는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지. 암담했어. 그렇게 절치부심하고 있는데 2000년에 민주화 보상법이 공포된 거야. ‘그래 다시 한 번 해 보자’ 그런 생각을 했어.”

5년의 노력 끝에 이씨를 포함한 두 명이 2005년 8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운동심의위)로부터 민주화관련 운동자로 인정받았다. 2008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사북항쟁은 당시 국가 공권력이 광부들의 쟁의에 부당하게 개입하면서 발생했고, 사건 수사 과정에서도 고문·가혹행위 등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인정하고 국가에 사과와 보상을 권고했다.

그러나 함께 명예회복을 신청한 다른 19명에 대한 결정은 아직 아무것도 내려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심의위에 전화하면 5년째 계류 중이라는 말만 들어. 같은 사건으로 같이 고문당했는데 2명만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받았잖아. 계속 계류 중이라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겠냐고. 뭐, 진짜 계류 중인 것인지도 모르지.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은 적이 없으니. 과거사정리위가 국가에 사과와 보상을 권고한지도 2년이 지났어. 그런데도 정부는 묵묵부답이야. 이명박 정부, 그러면 안 돼.”

 

과거사정리위  “국가가 보상해야”  정부는 묵묵부답
 
올해 초 사북항쟁 3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모인 옛 동지들은 5월에 다시 한 번 서울에 올라가기로 뜻을 모았다. 이번에는 민주화운동심의위 관계자를 면담해 확실한 대답을 듣던지, 건물에서 농성을 하던지 끝장을 볼 참이라고 했다.
“벌써 30년이야. 그때 고문당했던 사람들은 다 늙은이가 됐고, 그때 태어난 아이들도 서른 살이 됐어. 이제는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지. 정부가 성의가 없어, 성의가.”

사북항쟁은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렸던 당시 동원탄좌 지부장(노조위원장)이 비밀리에 회사측과 임금인상에 합의하면서 광산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섰던 사건이다. 80년 4월21일 경찰(계엄군)이 집회를 불허하자 광산노동자들은 정선경찰서를 둘러싸고 시위를 했다. 이를 피해 도망치던 정선경찰서장이 지프차로 일부 노동자를 들이받으면서 사건은 지역 전체로 확산됐다. 가족과 지역주민까지 가세했다. 탄광노동자 3천여명은 경찰의 최루탄에 돌을 던지면서 맞섰다. 경찰은 결국 사북지역에서 철수했고 광산노동자들은 지역을 장악했다.

정부는 24일 광산노동자에게 △노조 집행부 사퇴 △임금인상 △경찰 실력행사 중단 △부상자 치료 및 보상금 지급 △사태 해결에 최대 노력 등 11가지를 약속했다. 그 기간 동안 사북지역은 광산노동자에게 해방구였다.
“광산노동자들이 무식해서 용감했던 거야. 박정희 대통령 죽고,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였지. 다들 무서워서 숨죽일 때였잖아. 그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일어섰던 거야.”
 
국가권력에 맞서 싸웠던 사북민주노동항쟁
 
이씨는 “사북민주노동항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광산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 싸웠다는 의미다. 당시는 노동3권마저도 정부 권력에 제약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민영회사라도 석탄 생산량을 정부가 정했어. 석유 파동 직후라 석탄 생산량을 늘릴 때였지. 사람은 그대로인데 생산량만 늘리면 어떻겠어. 혹사시켜야지. 일이 힘들다는 게 아니야.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회사도 정부도 신경 쓰지 않았어. 탄광에서 사람 죽는 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옆 동료가 죽어도 항의 한번 못하고. 말은 못해도 한은 마음에 쌓이는 법이야.”

광산 관련 산업재해 통계를 살펴보면 79년 전국 탄광노동자는 5만3천명 정도였는데, 같은해 사고로 죽거나 다친 탄광노동자는 5천300명에 달했다. 산업재해율이 무려 10%였고, 산재사망자만 220여명에 달했다. 탄광 갱도 붕괴사고는 저녁 방송뉴스의 단골메뉴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말은 ‘명예회복과 화해’였다. 외부 시선은 둘째치더라도 폭도로 몰려 부끄러운 아버지·어머니로 살아온 인생이 30년. 그 가족의 아픔을 보듬어 달라는 것이다.

“다 늙어서 바랄 것도 없어. 명예회복 그리고 화해. 그것만 하면 돼. 우리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사북지역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고. 항쟁 때 일부 사람들이 노조 지부장이 도망가자 흥분해서 그 부인을 폭행한 사건 있지? 어찌 됐든 그건 우리가 잘못한 거야. 그분한테도 사과하고 싶어. 이제는 화해할 때가 됐어. 아니 지났지.”

30년.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아무도 되새기려 하지 않는 사북, 그리고 석탄 캐던 노동자. 산업전사로 불리면서도 방진마스크를 쓰고 생명을 담보로 갱도를 드나들었던 그들의 바람. 그의 말대로 이제는 그럴 때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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