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가 블랙리스트에 맞서려면 조직화 필요”
경기도의 한 보습학원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국어를 가르치는 이아무개(29)씨는 최근 새 후임이 출근하고 나서야 자신이 해고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당함을 호소할 틈도 없이 당일 바로 해고됐다. 원장은 도난사고 예방명목으로 설치한 폐쇄회로(CC)TV에 녹화된 이씨의 강연을 보여 주며 “강연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고 사유를 밝혔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자를 해고할 때 적어도 30일 전에 예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학원에서는 후임 강사를 미리 뽑아 놓은 뒤 당일에 해고하는 경우가 많다. 해고사실을 미리 알릴 경우 수업을 소홀히 해 학생들이 빠져 나갈 수도 있다는 학원장의 우려 때문이다.

3년 전 지방의 한 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임시방편으로 학원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학원수업에 쫓겨 시험준비는 뒷전이 돼 버렸다. 구두로 계약한 근무시간은 번번이 초과근무로 이어졌다. 초과수당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저녁 먹는 시간은 아예 없었다.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시간을 이용해 빵을 먹어야 했다. 만성 위염까지 얻었다. 이씨는 “원장이 던진 재떨이에 맞거나 성희롱을 당하는 친구들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한 수준”이라며 “수모를 당해도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다 보니 부당한 사례가 확대 재생산 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중소·영세 학원강사로 몰리는 청년 노동자들의 신음이 깊어지고 있다. 근로자로서의 법적 지위도 불안정해 피해 구제나 권리 주장은 언감생심이다.<상자기사 참조>

문제는 수년째 이어진 취업난으로 인해 이 같은 사례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교육개발원이 펴낸 ‘2009년 교육통계분석 자료집’에 따르면 지난해 인문·교육·자연 계열을 전공한 4년제 대학 졸업자가 가장 많이 취업한 직종이 학원강사였다. 교육개발원은 “경기침체에 따른 취업난과 사교육 시장 팽창이 겹치면서 5년째 계속되는 현상”이라고 밝혔다. 특히 남성의 경우 해마다 1위 직종이 변했지만, 여성은 5년 내내 학원강사가 1위를 차지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학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학원, 가장 많이 취업한 직종 1위

이들이 학원강사를  선택하는 이유는 일반 기업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장 외에 별다른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 편의점 등 다른 아르바이트나 중소기업에 비하면 시간당 보수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대학원을 준비하며 서울 목동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박지윤(27·가명)씨는 “최소한의 생활유지가 가능하고, 다른 취업준비를 병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 같아 학원강사를 택했다”며 “직장이라는 개념보다는 취업준비를 위해 잠시 거쳐 가는 임시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취업난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경우 학원에 눌러앉는 경우도 많다. 학원강사와 취업준비를 병행하며 20대를 보낸 뒤 서른이 되면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서울 목동의 한 종합반 학원 전임강사로 일하는 ㅈ(28)씨는 “졸업 후 2년 넘게 학원강사 외에 다른 경력을 쌓지 못했다”며 “학원강사보다 처우가 낮은 영세한 중소기업으로 가느니 차라리 경력을 살려 스타강사를 목표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가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채용이 쉬운 만큼 해고 또한 쉽게 이뤄진다. 그나마 대형학원은 사정이 낫지만 대다수 중소·영세 규모의 학원강사들은 낮은 보수와 열악한 근무여건 등에 시달려야 한다. 수요보다 공급이 넘치다 보니 학원측이 우월적 지위를 내세워 일방적인 내용의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것조차도 쓰지 않는 곳이 태반이다.

특히 중소·영세 학원일 경우 임금체불을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다. 경기도의 한 보습학원에서 일했던 이씨는 두 달치 임금 200만원을 받지 못했다. 학원 형편이 어렵다는 걸 잘 알기에 원장을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씨가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다른 학원으로 옮긴 사이 원장은 휴대전화 번호를 바꾼 채 잠적해 버렸다. 이씨는 “아무리 사교육 시장이라고 해도 엄연히 교육자가 모인 곳인데 인간적인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고 말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처우가 나은 곳을 찾아 떠나는 학원강사들의 속성상 이직률도 높다. 대략 1년 정도면 학원을 옮기는데, 이에 대비해 학원가에서는 예치금이나 보험금 명목으로 강사들의 월급을 떼어 두는 게 관행화돼 있다. 학생 이탈에 따른 손해나 후임 강사 모집비용을 강사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주로 경력이 짧은 초년생 강사들을 대상으로 발생한다. 
 
임금체불하고도 예치금 손배 제기

서울 노원구의 한 보습학원에서 초등부 강의를 맡았던 권아무개(26)씨는 “월급이 40만원이었는데 학원이 예치금 명목으로 돈을 떼어가 10만~15만원씩 세 번 정도 월급을 나눠 받았다”며 “결국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뒀는데 한 달치 월급 40만원을 못 받았다”고 말했다. 학원은 권씨가 약속한 1년을 못 채웠고, 후임 강사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두었기 때문에 돈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권씨는 코앞으로 다가온 임용고시에 전념하기 위해 결국 돈을 포기했다.

학원이 밀린 임금을 주지 않기 위해 손해배상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건강상의 문제로 학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배아무개(25)씨는 원장이 대체강사 모집광고비 등을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받아 내겠다고 압박하는 바람에 체불임금 받기를 포기했다. 배씨는 “소송을 하는 것이 번거롭고 무엇보다도 문제를 제기했다가 원장들이 돌려보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면 다른 학원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아 그냥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학원강사가 주로 여성이다 보니 성희롱도 발생한다. 김아무개(29)씨는 경기도 안산의 논술학원 면접자리에서 원장에게 여성으로서 모멸감을 느끼는 질문을 받았다. 김씨는 합격 통보를 받았으나, 성희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다른 이유를 핑계로 학원을 나가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김씨는 인근의 다른 학원에 취업했는데, 두 학원장끼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김씨는 “우연찮게 성희롱한 학원장이 내가 일하는 학원에 놀러왔다가 날 보게 됐는데, 나에 대해 담당 학원장에게 무책임하다는 식의 안 좋은 얘기를 했다”며 “일하는 곳의 원장과 좋은 관계를 맺기까지 진땀을 빼야 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학원강사들은 처우개선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기준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학원계는 해고도 임금도 모두 ‘원장님 마음’이다. 규격화된 기준이 없다. 학원의 규모와 내용에 따라 임금수준과 근무조건이 다르고, 심지어 같은 학원에서조차 강사들 간에 소득격차가 크다. 서울 강서구 입시전문 학원에서 고등부 국어를 맡고 있는 박아무개(30)씨는 “사교육을 악이 아니라 공교육과 병행할 수 있는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며 “학원강사들을 양지로 끌어내고 처우에 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씨는 “학원강사를 쉽게 보고 왔다가 무책임하게 잠적하는 초년생 강사들이 많다”며 “이젠 학원강사들도 교육전문가로서 책임감을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원강사 처우개선 위해 조직화 필요

전문가들은 중소·영세 보습학원 강사들의 권익대변을 위해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대성학원강사노조 등 몇 차례 노조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좌초됐기 때문이다. 10년차 학원강사인 김아무개(34)씨는 “거칠게 말해 학원강사에는 취직 전까지 임시 아르바이트로 여기는 사람들과 학원장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며 “이들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 하나의 목소리로 담아내기가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성학원강사노조에서 활동을 했던 한 관계자는 “대성학원강사노조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당사자들이 단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대 학원강사모임(cafe.daum.net/ educationpark)의 김상철 공인노무사(노무법인 노모스)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학원가에 맞서려면 학원강사도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단체행동을 통해 부당행위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며 “단위노조를 만들기 어려운 만큼 지역별 일반노조 등을 조직해 처우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근본적으로는 학원강사가 대졸자 취업 직종 1위로 굳어지는 현상을 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학을 졸업한 인력이 사교육 시장에 쏠리는 것은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낭비라는 지적이다.
“사교육 시장이 팽창해 청년실업을 흡수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어요. 어쩌면 사교육 시장이 10대와 20대 모두에게서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학원가에 청년 구직자가 몰리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모순이 압축돼 있는 건 아닐까요?”
학원강사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박지윤씨가 자신의 모습을 보며 불편해하는 이유다.

  “학원강사,  스타강사 빼면  99%가 노동자”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31일 기준으로 중고등학교 사교육 시장을 담당하는 입시 검정·보습 학원수는 3만5천712개에 달한다. 교과부에 등록된 입시 검정·보습학원 강사는 12만809명이다.
학원강사는 학원장에 의해 직원으로 등록되거나, 사업소득자로 신고된다. 하지만 관행상 소수 대형학원을 제하고는, 대다수 학원은 학원강사를 사업소득자로 신고한다. 학원강사를 사업소득자로 신고하게 되면 급여지급시 3.3%를 원천징수하고, 4대 보험은 가입하지 않는다.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은 학원강사가 지역가입자로 별도 가입해야 한다. 관할 교육청은 학원강사 조건으로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이거나, 전과 등의 결격사유만 없으면 학원강사 등록을 받아 준다. 그러나 동네 보습학원의 경우 교육부 허가를 받지 않은 가짜 강사들이 즐비하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내 최대 학원강사모임 카페 회원수가 15만여명으로, 교과부에 공식 등록된 강사수(3만여명)를 훌쩍 뛰어넘는다.
학원가의 임금수준과 근무조건도 천차만별이다. 단과·종합·과목·학년 등에 따라 같은 학원에 근무하는 강사들조차도 소득격차가 크다. 때문에 서로 임금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고소득을 올리는 스타강사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이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주말·시험 보충·새벽 자습·추가 근무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추가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다. 학원에 따라 급여가 예치금 명목으로 5~10일 정도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
사교육 경쟁이 심해지면서 강의 내내 CCTV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보통 학원강사가 교과부에 신고되면 ‘경력증명서’가 기록되는데, 학원장끼리 과거 행적과 평판을 검증해 취업을 막는 장치로 악용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법원이 “별도의 사업자등록을 했더라도 학원 운영자와 종속적인 관계로 일을 했다면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잇따라 내놓아 주목된다.
김상철 공인노무사는 “스타강사를 빼면 대부분 학원장의 감독을 받는다는 점에서 학원강사의 99%가 노동자”라며 “하나로 똘똘 뭉친 원장에게 대응하려면 학원강사들도 먼저 스스로 노동자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성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