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없는 조선소라는 말은 다 옛말이 됐어요. 공장 분위기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용접기 정비공장에서 근무하는 강호봉(33)씨. 2년여 만에 <매일노동뉴스>와 다시 만난 강씨는 자신의‘사수’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소식을 담담히 전했다. 지난 2007년 7월, 정비공장 막내로‘형님’들의 커피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형님들하고 보조를 맞추려면 한 가지 기술이라도 더 배워야죠”라던 그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조선소 분위기는 180도 변했다. 193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인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는 현재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인 조선업계 불황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쳤다. 지난달 350여명이 희망퇴직원을 내고 회사를 떠났다. 설계부문에 대한 분사도 추진됐다. 회사는 전 직원의 30%가량을 감원하겠다는 계획이다. 강씨는 “2년 전만 해도 회사가 이 지경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황 속 분투, 썰렁한 조선소

지난 21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3도크. 쇠망치두드리는 소리와 조선소의 상징인 골리앗 크레인의 이동을 알리는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울린다. 용접 불꽃이 튀어오르고 크레인에 매달려 거대 선박에 도장용 스프레이를 뿌리는 노동자의 모습은 점처럼 왜소하다. 배를 건조하는 과정은 건물을 짓는 과정과 비슷하다. 용도에 맞게 철판을 절단한 뒤 각 철판을 용접해 ‘블록’을 만든다. 블록은 선박의 몸체를 이룬다. 벽돌을 쌓아 집을 짓듯이 블록을 붙여 배를 건조한다. 육상에서 만들어진 블록은 도크로 옮겨져 조립된다.
한진중공업은 부산의 영도와 다대포, 울산과 인천 율도 등 4곳에서 조선소를 운영한다. 각 조선소에서 블록을 제작해 영도로 보내오면 이곳에서 본격적인 조립작업이 이뤄진다. 한진중공업의 주력 선종은 LNG선과 초대형 컨테이너선. 컨테이너 1만2천800개가 실리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은 250여개의 블록을 붙여 만든다. 설계에서 완성까지 2~3년이 걸린다.

“저기 좀 보세요. 썰렁하죠? 예전 같으면 하청업체 노동자들로 북적였을 곳인데….”
김재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부지회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서너 명의 노동자가 블록을 용접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조선소 여기저기 빈 공간이 눈에 띈다. 금융위기로 수출입 물동량이 급감하는 등 해운 시황이 급락하면서 후방산업인 조선산업에 불똥이 튄 결과다. 조선업계의 최대 고객인 대형 해운사들은 이미 발주한 물량을 취소하거나 인도 연기를 요청하고 있다. 조선소 입장에서 보면 배를 서둘러 만들 이유가 없으니 하청노동자를 많이 쓸 이유도 없다.
영도조선소 정규직으로 32년 근무하고 정년퇴직한 뒤 현재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는 박용호(가명∙70)씨는 “일감이 너무 없어 걱정”이라며“잔업∙특근 다 하면 월 250만원은 벌었는데 요즘은 150만원도 못 받는다”고 말했다.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불황의 그늘이 기다리고 있다. 건조가 중단된 컨테이너선 한 척이 유령선처럼 서 있다. 세계 3위의 프랑스 해운회사‘CMA-CGM’이 한진중공업에 주문한 것이다. 이날 한진중공업은 선박계약 해지 사실을 공시했다. 선주사가 인도금을 입금하지 않아 계약을 해지하고 배를 제3자에게 매각한다는 내용이다. 지난해‘모라토리엄(채무상환유예)’을 선언했던 CMA-CGM이 결국 선박수주 계약을 해지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감은 또 줄어들었다.


수빅조선소 적자 나니 국내조선소 구조조정?

최근 한진중공업이 18만톤급 벌크선 2척을 수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년5개월만의 수주 소식이다. 그런데 이 배들은 부산 영도조선소가 아닌 필리핀법인(HHIC-Phil) 수빅조선소에서 건조된 다. 저임금 등 비용경쟁력을 앞세운 수빅조선소에 물량이 집중되면서 국내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수빅조선소는 부산 영도조선소의 10배가 넘는 부지에 첨단설비를 갖추고 있다. 조선소의 경쟁력을 상징하는 도크의 규모는 세계 최대 수준이다. 인건비는 국내의 10분의 1 정도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선박 용접의 최대 적인 고온다습한 기후조건, 국내는 물론 중국에 비해서도 비해 숙련도가 떨어지는 필리핀 노동력은 수빅조선소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이다.
한진중공업은 지난해 3분기 당기순이익 기준 적자를 기록했다. 핵심 자회사인 필리핀 수빅조선소의 적자에 따른 지분법 손실 탓이다. 그동안 한진중공업은 1조원이 넘는 돈을 수빅조선소에 쏟아 부었지만 이익환수는 더딘 상황이다. 이재원 동양종금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수빅조선소의 지분법 손실금액은 상반기에 254억원, 3분기까지 427억원으로 하반기에 오히려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다”며 수빅조선소의 흑자전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해외공장의 경영 악화가 국내 노동자의 고용을 위협하고 있다”는 노조의 주장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수빅조선소로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자금은 한진중공업을 통해 조달되고 있다. 이에 따른 이자비용 부담과 수익 악화는 한진중공업의 유동성을 압박할 여지가 크다. 선박 건조물량까지 수빅조선소에 집중되면 국내 조선소의 숨통은 막히게 된다. 허민영 경상대 연구교수는“수빅조선소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초대형 선박은 주로 수빅으로 이관돼 건조될 것으로 보인다”며“영도조선소의 선박건조 분담률을 약화시키고 고용 역시 정체∙약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한진중공업은 수빅조선소를 전략사업장으로 육성하고 부산 영도조선소를 고부가가치 선박 생산기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하지만 회사의 이 같은 계획은 국내 조선부문의 축소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존에 체결했던 수주계약까지 끊기는 마당에 고부가가치 선박을 수주할 기회가 확대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한진중공업 4개 조선소 중 울산과 인천율도 조선소에 대한 매각설도 제기되고 있다. 국내 조선소를 축소하고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한진중공업의 사업부문은 ‘국내 건설’-‘해외 조선’의 구도로 변화가 예상된다. 일시적이든 단계적이든 인력 구조조정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교섭 테이블 마주앉은 노사, 해법 찾을까

국내 조선업계는 지난해 선박 수주잔량에서 중국에 뒤처졌다‘. 조선 강국 코리아’의 위상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불황을 모르던 시절 우후죽순 늘어난 조선소들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SLS조선 같은 중견업체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등 자금난에 빠졌고, 급기야 대규모 조선소까지 위기상황에 몰리고 있다. 노동자들도 이 같은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영도조선소에서 불록을 탑재하는 일을 하는 윤국성(52)씨는“국내에 조선소가 너무 많아 공급과잉 상태에 빠졌고 중국 등 개발도상국의 추격을 따돌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국내 조선업이 갈수록 어려워 질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 지역 최대 사업장인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 소식에 지역사회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무산업이 쇠퇴한 뒤 부산 경제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 온 한진중공업을 향해 시민들도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한 택시운전기사는“대한조선공사 시절부터 영도조선소는 부산의 자존심이었다”며“조선소가 문을 닫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답답한 심정인 사람은 바로 20~30년 동안 조선소에서 근무해 온 노동자들이다. 안현달(54)씨는“몇 년간 공을 들인 배가 출항할 때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며“해고되면 하청업체를 떠돌아다니게 될 텐데 그때도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한진중공업 노사는 최근 교섭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당초 회사측은 26일 정리해고 명단을 통보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유보하고 당분간 노사교섭에 집중키로 했다. 채길용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은“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수용할 수없다”고 말했다. 해고 계획이 철회되면 일정 정도 고통분담은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대규모 정리해고가 강행될 경우 노사갈등을 물론 이른바 ‘산 자’와‘죽은 자’간 노노갈등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노사 모두 막대한 출혈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노사 모두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만큼은 피하자는 입장이다. 답답한 조선업계의 현실을 딛고 노사가 현명한 해법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 각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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