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피해노동자와 유가족들이 11일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한다. 업무상질병에서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 입증책임이 있다.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공단에서 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경우 소송의 높은 문턱 앞에서 주저앉기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사업주나 국가가 업무상질병 발병원인물질이 인체에 전혀 무해하다든가, 노동자의 질병이 발병원인물질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지 못한 이상 업무상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한 것이다.

21년간 시멘트공장에서 기사로 일한 강씨

강아무개(사망 당시 72세)씨는 한 시멘트공장에서 21년간 불도저 기사로 일했다. 강씨는 퇴직 후 폐암·부비동암으로 사망했다. 부비동암은 콧속과 콧속 둘레의 작은 구멍인 부비동·비강에 생기는 악성종양이다. 강씨의 부인인 유아무개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신청했지만 공단은 2007년 11월 강씨의 사망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씨는 공단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사망 당시 강씨가 고령인 점, 업무와 암 발병 간에 명확한 의학적 근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재해자가 업무와 암 발병과의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한 점 등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 행정5부(조용구 부장판사)는 지난달 1심 판결을 취소했다.

‘상당한’ 인과관계로 업무상질병 인정

그동안의 대법원 판례를 보면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취업 당시 건강상태·질병의 원인, 작업장에 발병원인물질이 있었는지 여부, 발병원인물질이 있는 작업장에서의 근무기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또는 그에 따른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인과관계의 입증이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법은 “발병원인물질과 업무상재해 사이의 인과관계 유무를 따질 때 발병원인물질의 생산과정이나 구성성분, 그로 인해 인체에 미치는 영향·유해성 등에 관해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며 “전문가가 아닌 근로자 또는 유족들과 같은 일반인들이 그와 관련한 특수한 인과관계를 과학적·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부비동암은 니켈·6가 크롬·포름알데히드 등 발암물질과 관련이 있다. 시멘트 제조공정에서는 발암물질인 6가 크롬이 생성된다. 서울고법은 “망인의 사망원인인 부비동암에 이르게 된 의학적 경로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망인의 부비동암이 6가 크롬 등 유해물질 등으로 인해 발병한 것이 아니라 망인의 과도한 흡연 등 업무 외의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거나, 망인의 회사에서 노출된 6가 크롬 등 발암성 추정물질의 농도가 극히 미량이어서 발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등 특단의 사정에 대한 피고의 입증이 부족했다”며 “망인의 부비동암이 6가 크롬 등의 발암성 물질에 노출돼 발병한 것이거나 적어도 발병을 촉진한 하나의 원인이 됐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사업주·국가에 입증책임 강화

이번 판결은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와 국가의 입증책임을 강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법원은 노동자측이 △업무환경에서 문제가 된 물질이 발병원인물질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정상적인 업무수행 과정에서 발병원인물질에 노출됐고 그 이전에 질병의 원인이 될 만한 건강상 결함이 없었다는 점 △노동자가 업무에 종사하던 중 질병에 걸렸다는 점 등을 증명한 경우, 사용자측 또는 국가측이 △발병원인물질이 인체에 전혀 무해하다든가 △그 질병이 발병원인물질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입증을 하지 않는 이상 업무상재해가 발생했다고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입증책임을 완화했다.

법원은 이렇게 하는 것이 “근로자의 업무상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함으로써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취지와 손해로 인한 특수한 위험을 적절하게 분산시켜 공적부조를 도모하고자 하는 사회보험제도의 목적과 사회형평의 관념에 맞는다”고 덧붙였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이정훈 변호사(다보상법률사무소)는 “산업재해의 입증책임을 대폭 완화한 이번 판결은 법이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회적 약자인 산재근로자들과 유가족들의 손을 들어준 중요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노무법인 산재의 우병욱 팀장은 “채광·채탄 등 직접적인 시멘트 채취와 관련이 없는 종사자도 간접적인 영향으로도 산재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은퇴 후 고령자의 경우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업병 발병이 아닌 자연적인 발병이라고 해서 인정을 거의 하지 않는 현실에서 더 많은 근로자들이 혜택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관련판례]
서울고법 2009년12월2일 선고 2009누8849 유족급여등부지급처분취소
대법원 1997년2월28일 선고 96누14883 유족보상등부지급처분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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