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산업안전보건법을 보면 안전보건대표가 굉장히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노동자는 자신에게 발생한 안전보건상의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권리를 갖는데, 본인이 나서 문제제기를 하다가는 사업주에게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해서 사업주를 상대할 대표를 둘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안전보건대표다. 따라서 안전보건대표는 노조에서 임명하는 것이 대세다. 대규모 사업장은 안전보건대표를 통해 노동자들의 참여권 등이 적극 보장되고 있으며,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평가된다. 어느 나라건 근로감독관이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노동자대표는 현장의 안전보건문제를 바로잡는 가장 중요한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중소·영세사업장이다. 스웨덴처럼 영세사업장 조직률이 높은 나라에서는 중소영세사업장까지 안전보건대표자가 임명돼 있는 편이다. 스웨덴은 전 세계에서 안전보건대표자 제도를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국가로 손꼽힌다. 특히 노동자수가 몇 명 되지 않아 자체적으로 대표를 두기가 어려운 소규모사업장을 위해 운영하는 지역대표자제도는 다른 나라에서 많이 벤치마킹하는 제도다. 하지만 조직률이 낮은 나라는 대부분 중소영세사업장에 노조가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신의 대표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장의 안전보건문제를 제기할 주체가 없기 때문에 사고와 질병의 위험은 크게 존재한다.

영국의 경우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안전보건대표자 제도가 부실한 편으로 평가된다. 노동자들이 사업주가 교섭단체로 인정한 산별노조에 가입돼 있지 않은 경우에는 노조가 안전보건대표를 임명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사업주가 노동자들과 일대일 면담 또는 집단 면담을 통해 안전보건문제를 협의하거나, 노동자들 중에서 대표를 선출해 사업주와 협의한다. 사업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대표자제도의 취지가 훼손된 것이다. 그래서 영국 제도는 후진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런 영국에서 지난 10여 년간 몇 차례의 실험이 시도됐다.

첫 번째 실험은 1996년에 시작됐다. 영국의 농장에서는 고용노동자를 두고 일하는 형태가 많이 있는데, 이 농장들의 재해가 많아 예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영국산업안전보건청(HSE)에서는 스웨덴의 안전보건지역대표자 제도를 농업분야에 도입해 실험하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사업주들의 반대로 인해 노조에서만 참여했는데, 지역 캠페인을 전개한 것만으로도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영국 정부는 이 성과에 기반해 사업주들을 설득하고 노조가 임명한 지역대표자가 농장에 들어가서 안전보건 문제를 찾아내고 노동자·사업주들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이끌어 냈다. 이런 성과에 기반해 2002년부터는 시범사업이 4개 업종으로 확대됐다.

호주의 경우 이보다 더 적극적이다. 아예 법으로 지역안전보건대표를 둘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도 지역안전보건대표는 출입이 가능하게 했다. 중소영세사업장의 안전보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조의 적극적인 활동이 얼마나 소중한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들이다. 물론 노조도 사업주와 갈등을 발생시키기 보다는 현장의 안전보건 문제들을 찾아내고 개선하는 데 주력한다. 조합원이건 비조합원이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내는 활동을 전개하며, 그 과정에서 지지와 신뢰를 획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영국의 제도가 후진적이라고 비판하는 유럽국가들을 보며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나라도 유럽의 안전보건대표자 제도를 본떠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를 도입하기는 했다. 하지만 가장 열악하고 규모가 작은 사업장일수록 노동자들의 대표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다. 진정 어떤 노동자들에게 대표가 필요한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중소영세사업장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정부는 매년 중소·영세사업장의 재해가 높다고 한탄하면서도 유럽이나 호주처럼 지역명예산업안전감독관을 도입하고, 산별노조의 안전보건활동을 증진시킬 전략을 수립할 생각은 안 하고 있다. 노동계에서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해도 경제단체의 눈치만 보며 개선의 의지는 보이지 않고 있다. 영국에서도 기업주들은 지역대표자제도를 싫어했지만, 나중에는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참했다. 정부가 적극성을 보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됐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기업별노조가 아닌 산별노조의 시대가 되고 있다. 지역의 중소·영세사업장에 대한 노조의 고민이 커질 것이다. 더더욱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의 개선이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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