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명. 1988년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집단중독으로 직업병을 얻은 피해 노동자들의 숫자다. 단일 사업장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고통받았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같은해 온도계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군 사건과 함께 우리나라에 직업병 피해의 심각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원진레이온 사태를 계기로 지난 99년 설립된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올해 열 돌을 맞았다. 2일 오후 서울 계동 보건복지가족부 인근에서 만난 임상혁(45·사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10년을 버텨 온 것이 놀랍고 고맙다”고 소회를 밝혔다. 임 소장은 지난 99년 연구소에 들어와 2007년부터 3대 소장을 맡고 있다. 초대 소장은 김록호 전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현 세계보건기구 유럽지부 안전보건담당자), 2대 소장은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역임했다.

- 연구소가 열 돌을 맞았다. 감회가 어떠한가.
“10년을 버텨 왔다는 것이 놀랍다. 민간연구기관이니까 재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노동안전보건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환경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많이 우려했는데 고맙게도 10년을 버텼다. 처음에 연구원 6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16명으로 늘었다. 그만큼 연구성과도 쌓였다.”

- 연구소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나. 정부 지원은 있나.
“정부 지원은 없다. 운영수익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노조가 발주하는 프로젝트다. 건수는 많지만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는 않다. 둘째로 노조가 회사와 함께 공동으로 의뢰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세 번째가 정부의 연구용역이다. 노조가 발주하는 프로젝트가 건수로는 가장 많다. 예전에는 노사가 공동으로 의뢰하는 프로젝트 비중이 컸는데, 요즘 줄어들고 있다. 정부 용역 비중은 커졌다.”

- 원진레이온의 피해자가 9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생존자가 많이 있나.
“현재 700여명의 생존자가 있다. 산업재해로 인정된 사람이 900여명이나 된다. 세계적으로 단일사업장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병이 심한 분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생존해 있지만 병세가) 심한 분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활동 없이 자택에 머물러 있다. 일상생활이 가능한 분들은 활동을 하시는데, 긴 병에는 장사가 없다. 가족과 환자 모두 힘들어하고 있다.”

- 그동안 많은 사업을 수행해 왔다. 기억에 남는 사업을 꼽는다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근골격계질환 사업이다. 제조업의 근골격계질환 문제를 사회에 처음 알린 것이다. 2000년 당시 현대정공노조와 함께 근골격계질환 사업을 했다. 당시 회사에 유명한 구사대가 있었다. 처음 현장조사를 갔는데 구사대가 조사를 막았다. 노조에서 지원해 주기 위해 내려왔는데, 수가 모자랐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공장 조합원들이 왜 조사단을 막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했던 것이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노조들을 불러모아 공청회 형식의 교육을 진행했다. 이런 노력 끝에 산업안전보건법에 관련 조항이 만들어졌다.”

- 근골격계질환 사업은 어떤 의의가 있는 것인가.
“두 가지다. 근골격계질환은 노동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직업병이라고 하면 흔히 유해물질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 가운데 좋지 않은 노동조건에서도 병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근골격계질환을 가진 노동자들이 감기에 걸린 환자들처럼 많았다. 그렇다고 (사업 자체가)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조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을 준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어떤 준비가 돼 있어야 하나.
“조합 전체가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 노동안전부장만의 사업으로 절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안전보건 의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의제로 올라와야 한다. 당시는 노동운동이 노동자 건강에 관심조차 없었던 때라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았다. 노조 간부들이 운동의 의제로 선택했다면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야 했는데, 구호를 외치는 데 그쳤다.”

- 지금도 안전보건활동이 노안담당자에게만 맡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노동자 건강 문제가) 노동운동의 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전체적인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노조들은 산재승인·직업병 인정 투쟁만 했다. 산재 승인을 받더라도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으로 이어져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임상혁 소장은 지난해 ‘서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사업에 대해 “노동자 건강 문제를 사회 의제로 만들어 보자는 새로운 시도였다”며 “그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다”고 평가했다. 이 사업은 연구소에서 기획하고, 서비스연맹을 설득해 노동자들을 교육하며 진행한 것이다. 이어 여성·인권단체들에게도 연대를 요청했다. 노동자 건강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실은 환경단체나 인권단체는 노조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밥그릇을 챙기는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럴만도 하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의자를 주자는 사업이 사회 문제와 관련해 (단체들 간에)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게 만들었다.”

민간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이 영역에도 노조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건강 문제가 노조 조직사업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것이다.

- 연구소 성과 가운데 석면도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3년 전 연구소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지하철 역사의 석면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석면이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문제화됐다. 지금은 석면이 환경 문제로 취급되는 것 같다. 노동자들이 석면 문제에 무관심하다. 올해 건설노조와 건설노동자 석면관련 건강검진을 실시했는데, 결과가 상당히 심각했다. 폐광지역에 사는 주민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현재 대우조선해양 노동자들의 엑스레이 사진 1천장을 분석하고 있다. 결과가 나오면 석면이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벽에 부딪쳤던 경험은.
“첫째는 정치적으로 공격당할 때가 있었다. 근골격계질환 사업을 진행할 때도 특정 정파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근골격계질환 문제에 정파가 개입하다니,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두 번째로 속이 상했던 것은 2006년께 여수광양 플랜트 암환자 노동자들에 대한 역학조사를 맡은 적이 있었다. 당시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연구를 공모했고 우리가 응모해 채택됐다. 그런데 노동부가 취소시켰다. 많이 속상했다. 노동부는 역학조사는 외부기관이 응모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연구소가 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가졌던 것이다. 가장 전문적으로 잘 할 수 있었을 텐데도 (연구소에 대해) 여전히 좋지 않은 시각을 가졌던 게 아닌가 싶다.”

- 10년째 산재율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유럽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의 안전보건정책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특검기관·검진기관·보건협회·안전협회를 통해 실현하는 방식이다. 외국에서는 정부가 거의 일을 안 한다. 노동자와 사용주가 모여 정책을 개발하고 안을 만들어 실현한다. 안전보건 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제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굉장히 성공적인 제도이지만, 대기업 위주로 결성돼 있다. 조선소를 보면 정규직은 안 죽고 하청 노동자만 죽는다.”

- 노동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명박 정부 들어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노동부에 완화할 규제를 내놓으라고 한다. 공무원들도 힘들어한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회의라도 좀 있었다. 지금은 전혀 없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안 부른다. 노동자를 보호하겠다고 나섰다면 철저하게 보호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 노사 합의가 안 돼 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노동자 건강은 절대적인 가치다. 노사 주체가 합의하고 실천하면 좋지만 건강까지 노사관계를 통해 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 노동계에 바라는 점은.
“사람들은 연말·연초에 ‘건강해라’,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건강이다’ 이런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실제 (노동) 현장에서는 어떤가. 노안간부가 단협안을 만들면 (다른 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거래수단이 될 때가 많다. 그게 우리 안전보건 노동운동의 현 모습이다. 노조들의 안전보건 사업계획을 보면 비정규직·이주노동자처럼 소외된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사업이 전혀 없다. 노조 중심, 조합원 중심의 사업에 그친다. 사회적인 연대도 부족하다. 운동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많은 사회단체를 (노조를) 지원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안전보건영역에서도 노동운동이 점점 위축되고 고립되는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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