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번쩍 들어주세요. 조장이 됐으면 하는 분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주세요. 자, 그럼 조장의 사회로 토론을 시작하십시오.”
들려진 손들이 일제히 누군가를 가리키며 내려갔다. 서로를 마음에 품은 남녀가 처음으로 속내를 확인한 것 마냥 사람들의 입가엔 웃음이 번졌다. 자신이 가리켰던 사람이 조장이 됐고, 또 누군가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기도 했다. 흐뭇한 웃음에 이어 서로를 축하하는 박수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사람들은 토론에 들어갔고, 표정은 다시 진지해졌다.



어둡지만도, 무겁지만도 않았던

대부분 빨간 머리띠를 묶고 경찰과 험한 소리 섞어 가며 싸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진지하게 하루를 보냈다.

민주노총이 지난 27일 충북 제천 청풍리조트에서 개최한 ‘전국단위사업장 대표자 수련대회’에 참석한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날 수련대회에는 산별·지역·단위노조 대표자와 간부 800여명이 참석했다. <매일노동뉴스>가 그 현장을 찾았다.
 
바로 이틀 전인 25일에는 복수노조·전임자 문제를 논의하던 노사정 6자 대표자회의가 협상결렬로 끝을 맺었다. 정부가 최근 공무원의 노조활동 규제 수위를 올리면서 노정갈등도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이다. 단위사업장 대표자 수련대회는 이런 상황에서 12월 투쟁계획을 세우고 결의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어둡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참석자들 입가에 번진 웃음들이 신종플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얼굴과 얼굴 사이에 번지면서 오히려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민주노총이 하반기 투쟁을 결의하기 위해 준비한 토론회는 지난 9월 대의원 수련대회와 비슷했지만, 예년과는 달랐다. 800여명의 참석자들은 연맹과 지역·소속을 가리지 않고 15명씩 50개 분임조로 나뉘어 하반기 투쟁을 어떻게 진행할지를 논의했다.

토론 때마다 모든 이에게 종이가 한 장씩 쥐어졌다. 자신의 직책과 이름은 물론 좌우명과 장점 3가지, 요즘 나의 즐거운 일이나 고민과 같은 사소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질문들이 담긴 종이쪽지였다.

동지들에게 덕담을 한 마디씩 하라는 질문도 있었다. 모두 쑥스러워했지만, 한 명씩 돌아가며 발표할 때마다 웃음꽃이 번졌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간부는 “조금 가볍다는 느낌은 있지만 재미는 있었다”며 “토론 참여도도 높아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민주노총 소속이었지만 서로 낯설었던 이들. 그들은 이렇게 하나가 돼 갔다.



"서로의 생각·의지부터 공유하자"

이 같은 분위기와 달리 토론 주제는 가볍지만은 않았다. 참석자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민주노총은 12월 투쟁을 위해 △조합원 조직화 방안 △1만인 상경투쟁 △전 조직 총파업 돌입과 같은 단계별 투쟁계획에 대해 토론해 줄 것을 주문했다. 민주노총은 12월8일 지도부 여의도 농성투쟁을 시작으로 같은달 16~17일 1만인 상경투쟁, 12월 말 총파업 돌입 등을 계획하고 있다.단위노조 대표자들에게 세 장의 종이쪽지가 전달됐다. 전체 분임토론 사회를 봤던 박혜경 민주노총 교육원장은 “단계별로 핵심 실천과제를 종이쪽지에 먼저 적고, 그것을 바탕으로 토론을 해 달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투쟁방식들을 모두 적되, 토론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조합원 교육·출퇴근 선전전이나 노조별 비상대책본부 구성해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이자는 전통적인 조합원 조직화·투쟁 방식은 물론 가족지지 투쟁서명 받기와 대표자(위원장) 명의의 가정통신문 발송과 같은 조합원 가족을 집중 공략하는 방안도 제기됐다.

스스로 의지를 다지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핵심 구호를 하루 50번 이상 외치기를 하자는 제안이나 사용자(자본)에게 편지를 쓰자는 엉뚱하지만 색다른 제안도 있었다. “조합원이든 시민이든 무조건 만나 이야기를 하겠다”는 막무가내식 방안을 제기한 단위노조 대표자도 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6조 조장을 맡았던 유택근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은 “대규모 선전전과 같이 시민과 연대하고 호흡할 수 투쟁을 전개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면서도 “간부 구속결단식과 같은 전통적 방식부터 1만인이 국회를 에워싸자는 의견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제기됐다”고 설명했다.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종이쪽지에 적은 단계별 투쟁계획은 조별로 모아져, 회의실 벽면 가득히 붙여졌다. 서로의 생각과 의지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총파업, 과연 가능할까

민주노총이 제시한 2단계 투쟁계획인 1만인 상경투쟁까지는 별다른 이견 없이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초점이 모였다. 하지만 파업을 실제 조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업장 여건을 반영한 듯 저마다 의견이 달랐다. 12월 말 파업을 앞두고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치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기에는 시간적으로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다.

오후 7시부터 이어진 연맹·지역별 토론에서는 보다 진솔한 얘기들이 쏟아졌다. “정부가 너무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조합원을 동원해 투쟁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회의적인 시각부터, “정부의 노동탄압을 안일하게 생각하고만 있었다”는 반성론, “전 조직이 동시에 파업에 나선다면 정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다”는 투쟁론까지 현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표출됐다.

황재도 공공운수연맹 공공노조 한국가스공사지부장은 “복수노조·전임자 문제에 대해 그동안 조합원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민간기업은 융통성이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기업은 법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조합비를 올리는 방법도 모색할 수는 있지만 조합원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은 과제”라고 지적했다.

같은 노조의 장광수 인천공항지역지부장은 “사업장별로는 어떻게든 해결방안을 모색할 수는 있겠지만 법이 시행되면 전체 노동운동 지형이 바뀔 수밖에 없다”며 “노동운동이 기업별 독자 행동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기에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는 반드시 막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건의료노조에서는 파업은 어렵더라도 12월 투쟁에 조합원의 10%가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지부별로 다음달 초에 대의원대회와 조합원 교육을 실시하자는 계획도 제출됐다.

임미경 보건의료노조 이화의료원지부장은 “1만인 상경투쟁과 민주노총이 계획한 하반기 투쟁에 조합원 10%를 참가시키기 위해 현장순회를 실시하고 있다”며 “12월10일과 11일 대의원대회를 열고 이를 공식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노조의 동광병원지부도 다음주 대의원대회를 개최한다. 설지숙 직무대행은 “대의원 숫자가 전체 조합원의 10%가량인데, 대의원대회 결의만 얻으면 참가 목표를 달성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연맹별 결의를 밝히는 자리에서, 위원장 발언을 대신해 영상물을 상영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전임자 없는 노조는, 피를 공급하는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전임자와 노조를 지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노동조합은 권리이자 진보”라며 “고맙다 노동조합”이라는 문구로 영상을 마무리했다.

총파업 결의보다 소중한 투쟁 의지

토론이 거듭될수록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사업장별로 여건은 달랐으나 '우리 사업장만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회의적인 시각은 점차 줄었다. 단위노조 대표자들은 서로의 생각과 의지를 공유하면서 한층 고무된 표정이었다.

정병록 금속노조 만도지부장은 “만도노동자들은 투쟁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며 “현실이 어렵더라도 반드시 투쟁을 조직하겠다”는 결의를 밝혔고, 같은 노조의 서상종 케리어에어컨지회장도 “현재 구조조정 문제로 투쟁을 하고 있는데, 오늘 자리를 통해 결의를 더욱 다졌다”며 “노동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토론 열기가 한층 높아지면서 일부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과 단위사업장 대표자를 중심으로 “수련대회를 계기로 총파업을 공식 선언하자”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 조직이 동시에 파업 찬반투표를 벌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아 실현되지는 않았다.
신승철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총파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현실 조건도 녹록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단위사업장 대표자들의 토론을 지켜보면서 그래도 우리 조직이 믿을 만한 조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며 “현장에 돌아가 오늘 이야기했던 것들을 조합원들과 다시 토론하는 행동부터 실천해 달라”고 강조했다. 총파업 선언보다 소중한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를 모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장장 10시간에 걸친 토론

민주노총 단위사업장 대표자들은 이날 오후 2시부터 12시까지 10시간에 걸쳐 전체·분임·산별·지역별 토론을 진행했다. 수련대회의 끝은 연맹별로 모아진 투쟁계획을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로 마무리됐다.

공공운수연맹은 정부의 공공부문 선진화 정책과 단체협약 해지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면서 총연맹의 파업투쟁에 결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소속 단위노조인 철도노조는 이미 파업에 나섰고, 가스나 전력노조도 파업을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금속노조는 지역·지부 선거를 총파업 조직화의 과정으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은 “금속이 지역지부 선거에 들어가면서 현실 여건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수련대회를 거치면서 선거 자체를 파업을 조직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많았다”며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미래는 더욱 어두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무금융연맹은 조합원은 물론 가족에게도 투쟁결의를 담은 서명을 받기로 했다. 조합원 5만명에, 4인 가구를 기준으로 20만명의 서명을 받겠다는 것이다. 정용건 연맹 위원장은 “정부의 궁극적 목표는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를 통해 노조활동을 무력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사무직종 노동자들이 그동안 파업을 했던 적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올해 전체 노동자를 위해 부분파업이라도 반드시 조직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이 밖에 다른 산별연맹·노조들도 조합원 교육부터 지도부 농성·삭발 계획까지 세부적 투쟁계획을 밝혔다.

임성규 위원장 “책임지겠다”

민주노총은 수련대회를 마치면서 집회나 대의원대회 등 노조 행사를 열면 으레 채택하는 ‘참가자 결의문’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선언적 결의부터 내놓기보다는 실제 투쟁할 수 있는 의지를 모아, 그 결과로써 결의를 밝히자는 의미다.

신승철 사무총장은 “결의대회를 개최해서 총파업 선언하고 넘어가면 되지 왜 토론만 하냐는 의견도 있었다”며 “토론 자체가 실질적인 투쟁의지를 모아 나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도 “지난 9월 열렸던 대의원 수련대회와 이번 대표자 수련대회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며 “우리가 제일 열심히 하는 줄 알았는데, 토론을 하다 보니 다른 연맹의 결의수준도 상당했다”고 말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마지막 발언에서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3권이 보장되고 교섭창구나 전임자임금 지급은 노사자율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을 민주노총이 열어야 한다"며 "연말 총파업을 반드시 조직해 민주노총이 새롭게 거듭나는 길, 민주노총 100만 조합원 시대를 열어 내는 길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이어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반드시 파업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며 “현장에서도 최소한의 과정을 거쳐 합법파업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절차를 밟아 달라”고 당부했다.

아무 결론 없이 끝난 듯하지만 단위노조 대표자들 서로가 서로의 의지를 확인했던 수련대회. 임 위원장의 호소와 함께 이번 수련대회가 12월 민주노총의 투쟁과 총파업에 시발점이 될지 주목되고 있다.


결의보단 소통에 무게중심 색달랐던 민주노총 수련대회
민주노총은 이번 수련대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단위노조 대표자와 간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대표자들이 참가한 토론방식도 색달랐지만, 각자의 의견을 담은 포스트잇 붙이기와 민주노총 혁신에 대한 의견 수렴, 내년 사업계획을 결정하기 위한 설문조사까지…. 무언가 딱히 결론은 없는 자리였지만, 여기저기서 '소통'에 주력하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민주노총 혁신 과제로는 '정파 중심 조직문화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앞섰다. 민주노총은 벽보를 붙여 혁신 과제에 대한 스티커 붙이기로 대표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는데, 100여명에 달하는 대표자들의 정파 조직 극복에 표를 던졌다. 이어 '소통 없는 지침식 조직문화'와 '연설 중심의 집회 문화'가 민주노총이 넘어서야 할 과제로 지적됐다.
'민주노총 혁신은 ~다'라는 주관식형 네모 채우기도 있었다. 대표자들이 제시한 의견 중에는 '알이다'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민주노총이 내년에 추진해야 할 사업계획을 묻는 설문조사도, 사지선다형으로 보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업에 얼마나 역점을 둬야 하는지 퍼센트(%)를 기입하는 방식이 선택됐다. 예컨대 민주노총이 가진 역량이 100%라고 할 때, 조직화 사업에서는 '노조탄압 저지와 같은 기존 노조의 조직안정화'나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 가운데 각각의 사업에 얼마만큼의 노력을 쏟아야 할지에 대해 설문지 작성자가 퍼센트를 직접 적어 넣는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압권은 참석한 대표자들의 얼굴 사진을 하나하나 찍어, 그것으로 민주노총 깃발을 만든 것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 빨간색과 흰색을 배경으로 삼았고, 그것을 민주노총 로고색에 따라 배치했다. 민주노총이 가로 6미터, 세로 4미터로 제작한 깃발에는 370명이 대표자 얼굴이 새겨졌다. 김봉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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