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정리해고가 잇따르면서 웃지 못할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해고 소식을 접하는 많은 이들이 ‘숫자’에 둔감해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초 쌍용자동차가 2천464명을 정리해고하겠다고 밝힌 뒤, 어지간한 규모의 해고 소식에 사람들은 눈도 깜짝 하지 않는다. 해고 주체가 외국계 기업일 경우 '체념'의 정서도 나타난다. 외국계 기업에 대한 마땅한 규제책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든 노동계든 해당 기업의 이른바 ‘먹튀’(먹고 튀는) 행각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광주광역시 하남공단 에어컨제조업체인 캐리어(주)는 지난 13일 280명의 정리해고 대상자를 선정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택배로 해고사실을 통보했다. 이 가운데 233명이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27일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서상종(40) 금속노조 캐리어에어컨지회 지회장은 “위기설과 구조조정이 반복되는 회사에 대한 체념이 대량 희망퇴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지회는 현재 해고 통보를 거부한 조합원 47명과 함께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다. 정리해고 통보 직후인 이달 14일부터 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노사 간 대화의 장은 10일을 끝으로 마련되지 않고 있다.

대량 희망퇴직 뒤엔 ‘체념’의 정서가

캐리어는 미국계 기업이다. 캐리어 각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산업용 시스템에어컨은 타 브랜드를 제치고 세계 시장에서 최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캐리어는 85년 한국에 진출했다. 대우와 미국 캐리어 간 합작투자 계약에 따라 대우캐리어(주)가 설립됐고, 2000년 5월 캐리어가 대우의 지분을 전액 취득함에 따라 회사명이 현재의 캐리어(주)로 변경됐다.

캐리어 광주공장의 구조조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에는 373명이 회사를 떠났다. 회사측은 한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가격이 중국·태국 등에서 수입된 제품에 비해 10~20% 높고, 인건비와 제조경비가 경쟁사보다 2배 이상 높다는 것을 정리해고의 이유로 들고 있다. 생산물량이 5년 전의 35~40% 수준에 머물면서 1년에 4개월 이상 공장 유휴 기간이 생겨 현 인력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서 지회장은 “싼 임금을 찾아 한국에 왔다가, 더 싼 임금을 찾아 동남아시아로 옮겨가려는 의도”라며 “국내 생산시설을 정리하고 영업기지화하려는 속셈”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국내에서 유통되는 캐리어에어컨의 매출액 비중을 보면 해외 수입상품 매출액은 2005년 22.2%에서 2008년 37.9%로 증가했지만 국내 생산제품 매출은 74.5%에서 54.5%로 급감했다. 수입산이 국내산을 압도할 날이 머지않았다.

캐리어가 영업기지만 남겨 놓고 생산시설을 철수할 것이라는 예상은 캐리어의 모기업이자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UTC)의 행보와 관련이 있다. 국내 UTC 계열사는 캐리어와 오티스엘리베이터 등이다. 캐리어와 오티스엘리베이터는 올 초 UTC로부터 임금동결을 요구받았다. 두 회사 모두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오티스엘리베이터의 경우 국내 시장점유율이 크게 줄어든 반면 물류망은 유지되고 있다. 서 지회장은 “UTC는 한국에 진출한 뒤 설비나 시설 투자를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며 “그 결과 기업의 경쟁력이 하락하고, 매출이 줄고, 일감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됐다”고 비판했다.

투자 없이 구조조정만…"제도적 규제를"

서 지회장은 캐리어 광주공장 구조조정에 대해 “세계화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초국적 자본이 저임금 국가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이 해당 국가의 산업 경쟁력이 저하되고 고용도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제도적 규제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고 강조했다.

“일개 노조가 투쟁한다고 해서 국제적으로 진행되는 정리해고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고용과 산업의 붕괴를 최소화하려면, 국내에 진입하려는 외국계 기업은 국내에 투자하도록 법으로 규제해야 합니다. 이런 규제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국내 외국계 기업은 구조조정을 되풀이하다 사라지거나, 외국 본사의 돈줄로 전락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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