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돌파구를 작업장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문호(55·사진) 노동혁신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 법·제도 변화에 따른 노사관계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하려면 작업공정 혁신과 작업장 커뮤니케이션의 복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6일 서울 이태원동 노동현신연구소를 찾았다. 1시간 30분가량 진행된 이날 인터뷰에서 이 소장은 “이념적인 노조일수록 임금투쟁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사고는 이성적으로, 행동은 현실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 경제위기와 맞물려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이어지고 있다.
“구조조정은 시장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된다. 어차피 기업은 시장을 안정화시킬 능력이 없다. 그러니 회사가 잘 되면 사람을 많이 뽑고 잘 안 되면 자르는 것이다. 올해의 경우 쌍용자동차 사태가 대표적이다. 특히 쌍용차의 사례는 사회적 압력에서 벗어난 해외자본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줬다. 국내자본은 국내 상황에 대해 눈치라도 보지만, 해외자본은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 구조조정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데. 돌파구는 없나.
“전략적 유연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노조들은 일반적으로 유연화가 안정성을 해친다고 생각하지만, 유연화도 유연화 나름이다. 유연화를 통해 안정성을 쟁취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경제위기 돌파구는 작업장 유연화”

- 유연화에도 종류가 있다는 뜻인가.
“‘외적 유연화’와 ‘내적 유연화’가 있다. 전자는 비정규직을 활용해 상황에 따라 해고와 고용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후자는 고용안정을 전제로 노동시간과 숙련도 같은 조직 내부의 자원을 유연하게 활용해 수요변동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쌍용차가 저 지경이 된 것은 외적 유연화 전략 때문이다. 하지만 외적 유연화 전략은 한계에 봉착했다. 이제는 노동시간이나 인적자원 같은 것을 유연하게 사용하면서 시장적응력 키워야 한다. 이것이 내적 유연화다.”

- 우리 기업들은 내적 유연화에 대한 경험이 없다. 외국은 어떤가.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90년대 ‘린(Lean) 생산방식’을 도입해 생산성과 품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린 생산방식은 기업을 날렵한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도요타는 품질검사나 수리작업 같은 간접작업을 없애고도 최고의 품질을 달성할 수 있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90년대 독일의 자동차산업은 ‘기능통합형 그룹작업’에 돌입한다. 그룹 내 직·간접 기능은 물론 관리·계획기능까지 통합해 생산시간을 줄이고 설비가동률을 높였다. 또, 주야 맞교대를 3교대로 개편해 개별 노동자의 근무시간을 줄이면서도 생산량 변동에 대비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했다.”

- 작업장 중심의 생산체계에 ‘유연성’을 접목하자는 것인데. 획기적인 경영혁신이 전제돼야 한다. 노사 모두 정서적 거부감을 갖지 않을까.
“기업은 물론 노동자들 역시 외적 유연성에 길들여져 있다. 노동시간에 따라 생산량이 결정되고, 생산량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는 경직적인 구조 때문이다. 지금 구조에서는 노동시간이 유연해지면 임금도 유연해진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소득이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노조들이 노동시간 유연화에 반대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 간 ‘물량싸움’이 발생한다. 라인 간 물량이나 인력이동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조직 내적 유연성이 막힌 상태에서 회사측은 점점 외적 유연성에 매달리게 된다. 상시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노사갈등은 심화된다.”

“노동시간 저축하면 고용안정성 향상”

- 노동계가 주장해온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도 내적 유연화의 일환이다. 그런데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렸다는 사례는 별로 없다.
“쌍용차 노조가 사측에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했지만 사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기업들의 생각은 단순하다. 잘 될 때 충원하고 안 되면 자르는 것이다. 새로운 유연화에 대한 방법을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 최근 현대차 노사가 주간연속2교대 논의를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다. 교대제 개편 논의,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이 줄면 임금이 줄어드니 해당 임금을 보전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회사측은 노동시간이 줄면 생산량도 줄어드는데 임금보전이 말이 되느냐는 입장이다. 이 지점에서 노사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 합일점을 찾기는 불가능한가.
“기존 10시간에 생산하던 것을 8시간에 생산하고, 임금을 보전키로 합의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작업속도를 높여야 하고,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높아진다. 주간연속2교대의 목적인 ‘노동의 인간화’와 모순된다. 결국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노동시간이 줄어든만큼 생산량이 줄고, 그 만큼 임금이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노사 어느 쪽도 이를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도 저도 어렵다면 독일의 ‘노동시간 계좌제’를 한국의 현실에 맞게 적용해보자는 것이 나의 대안이다.”

- 노동시간 계좌제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자동차가 많이 팔릴 때에는 일을 더 하고, 안 팔릴 때에는 일을 조금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8시간을 일해야 한다. 안 될 때는 생산량 없이 시간만 때우기도 한다. 이런 시간을 저축해 놓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비효율적으로 사용해온 시간을 적절하게 활용해 생산성은 늘리고, 노동시간은 줄이고, 임금은 보존하는 것이다. 경영위기가 와도 인원을 내보내지 않고 시간을 조정해 대응하기 때문에 고용안정 효과가 나타난다. 노동시간 계좌제에 대한 독일 노사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노동의 도구화 막으려면 실리적으로”

- 노사관계의 판도 변화가 예고돼 있다.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시행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완전히 노조만 손해보는 게임이다. 가령 현재 노동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섭이 자율화 되더라도, 이것이 노동계에 주는 이득은 별로 없다. 게다가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는 노동계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 한국의 여건, 법 시행이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아니다 싶으면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 노동부장관이 “전임자임금을 주지 않는 것이 국제관행”이라고 밝혀 논란이 됐었다.
“한국 정부는 법으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을 강제하려고 한다. 이는 국제적 관행과 동떨어진 것이다. 법으로 규제하지 말라는 것이 국제적 관행이다. 노사가 대화의 장을 열어 한국의 여건에 맞는 관행을 만들어 가면 되는 일이다. 기업단위에서 이 같은 논의가 시작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는 노조나 노동자는 없다. 사회안전망이 부재하다시피 한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결코 회사가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화의 장이 열리더라도 결코 사측에 불리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이 현실인데, 법적으로 전임자 임금을 규제한다는 정부 방침은 도를 넘어선 비즈니즈 프렌들리 아닌가.”

- 타임오프제도(근로시간 면제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노사관계를 굉장히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이다. 전임자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예외적인 노조업무를 선정하려고 노사는 또 싸워야 한다. 기업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노조업무의 범위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노사 간 담합구조가 강화될 수도 있다. 회사측이 ‘내말 잘 들으면 이거 해줄게’하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부당노동행위가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노조는 노조대로 복수노조체계에서 자기 세를 넓히기 위해 회사와의 결탁을 선택할 수 있다.”

- 복수노조 시행을 앞두고 ‘제3노총’으로 대변되는 독립노조의 움직임이 언론을 통해 부각되기도 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과 차별화되는 제3노총이 필요한 때인가.
“한국에 제3노총은 필요 없다. 우리 노동계 구조는 강성인 민주노총과 온건인 한국노총이 두 축을 구성하고 있다. 제3노총이 강성운동을 하려면 민주노총에 들어가면 되고, 온건운동을 하려면 한국노총에 들어가면 된다. 제3노총의 행보는 정규직 이기주의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 경제상황이나 법·제도 개선방향이 노동계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노동계에 제언 한 마디.
“노동계가 이념과 실리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임금 등 실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 노동운동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념을 강조하는 노조일수록 임금투쟁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조합원들이 노동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는다. 사고는 이상적으로 하되, 행동은 현실적으로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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