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8월30일. 한국노총은 노동부가 노사관계 로드맵을 입법예고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반발해 부산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아태총회에서 철수했다.
당시 ILO총회는 국내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명실상부한 국제행사였다. 중요한 한 축인 노동계가 자리를 뜬 것이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부가 입법예고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정부 생각대로 노사관계를 개편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정부를 맹비난했다.

실제로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는 전임자임금·복수노조 문제를 논의 중이었다. 그런데 노사정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노동부가 입법을 강행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노사정 간 대화도 파탄 직전까지 갔다.

이상수 노동부장관은 한국노총의 초강수에 당황했다. 이때 중재에 나선 사람이 조성준(61) 당시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조 위원장은 한국노총이 철수한 바로 그날, 이상수 장관과 이용득 위원장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자칫 결렬위기에 처했던 대화를 급반전시켜 기회로 만든 것이다. 한국노총에서 13년간 일했던 경험과 국회의원 2선의 노하우가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노사정대표자회의는 9월11일 ‘조건 없는 3년 유예’에 합의했다.


2006년 합의는 ‘절반의 성공’

3년 전 그 현안을 두고 현재까지 노사정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2일 <매일노동뉴스>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21세기 지방자치 포럼’ 사무실에서 조성준 전 노사정위원장을 만났다.
조금의 진전도 없는 복수노조·전임자 문제를 해결하는 묘안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조 전 위원장은 현재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였던 성남시 중원구에서 활동하고 있다. 공식직함은 ‘21세기 지방자치 포럼’ 명예회장이다.

‘3년 전 기억을 더듬어 달라’는 요청에 그는 대뜸 사회적 대화기구인 노사정위원회의 출범 배경과 중요성부터 꺼냈다. 조 전 위원장은 노사정위원회 출범에 산파 역할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 일산 자택을 찾았어요. 당시 IMF(국제통화기금)가 공기업 민영화와 정리해고 법제화 등을 압박했었죠. 김 당선자에게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어요. 국민적 합의를 통해 나라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방향을 만들어야 한다고요. 김 대통령도 흔쾌히 동의하셨죠. 일주일 만에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었고, 보름 정도 논의해 합의안을 도출했습니다.”

합의안에 담긴 90여개항에 사회적 주요 과제가 망라돼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게다가 동아시아에서는 처음 도출해 낸 노사정 합의였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사실 조 전 위원장은 13년간 한국노총에서 정책과 홍보, 정치업무를 두루 담당했다. 이후 정치권으로 진출해 국회의원에 재선됐다. 그가 노사정위원회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 것도 노동운동 경험 때문이다. 그는 한국노총 활동 시절을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경험으로 꼽았다.

당시 김금수 전 노사정위원장·천영세 민주노동당 전 대표, 김윤환·김대환·윤진호 교수 등과 인연을 맺었고, 정치국 활동이 국회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때 활동이 지금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노동운동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별다른 노력 없이 적응할 수 있었죠. 노동운동 영역은 사회 전체 영역을 포괄합니다.”

조 전 위원장은 2006년 노사정위원장을 맡아 또 한 번 중요한 논의를 책임지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가 위원장에 취임한 날은 6월23일. 노동 최대 현안인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문제가 포함된 노사정 로드맵 논의가 진행 중이었지만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노동부가 논의시한으로 정한 시기는 7월 말.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노사정은 합의를 이뤄 냈다.

조 전 위원장은 합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논의 주체들은 대화의 중요성과 방법을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대통령과 노동부장관도 합의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었죠. 현장의 바람도 이미 통계로 나와 있었고요.”

합의에 필요한 제반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홍준표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의 의지도 한몫했다. 홍 위원장이 “유예 이외에는 해법이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 전 위원장은 당시 합의를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파국은 막았지만 발전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방침 강행은 ‘자충수’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조 전 위원장은 자신의 입장을 먼저 밝혔다. “회사가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주지 말라고 법으로 명문화한 나라는 없습니다. 노동계가 전임자임금 지급을 명문화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기업들도 전임자임금 지급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아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항을 끄집어 내서 굳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양대노총의 파업투쟁까지 유발시키는 일을 경제위기 상황에서 꼭 해야 하는지 안타까워요.”

노사정위원장 시절, 이 같은 얘기를 노동부와 노사정위 공식 회의에서 자주 하곤 했단다. 직원들로부터 걱정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조 전 위원장은 “정부의 최근 행보를 보면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임태희 노동부장관이 현행법 시행(복수노조 허용·전임자임금 지급금지)을 강조할 때만 해도 장관으로서 원칙을 밝힌 수준이라고 생각했었다.

국회로 넘겨 결국 또다시 유예로 가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상황을 보면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정치권으로 넘어가도 청와대의 의중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과거 경험을 볼 때 대통령의 노력과 의지가 중요한데 불행히도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한국노총이 정책연대 파기도 불사하면서까지 총파업 투쟁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마지노선까지 밀렸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겠냐는 의문도 제기했다.

그래도 해법이 없을까. 조 전 위원장은 “대화성사 여부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혀 있다”고 진단했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지적이다.
노사를 포함한 경제주체들로부터 동의를 얻어 내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얘기다. 지난해 예산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것이나, 노사정위원회 기능을 마비시킨 것을 예로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7월 공익위원안을 너무 일찍 발표한 것을 꼽았다. 정부가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공익위원안을 정리시킴으로써 노사정위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박탈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익위원안이 정리(무효화)되기 전에는 논의가 진전될 수 없도록 만들어 놨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양대노총이 제안하는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빨리 열어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최선은 이미 물 건너 갔고, 차선책이라도 빨리 마련해야죠. 정부 뜻대로 밀고 가면 파국을 몰고올 것입니다. 바둑으로 치면 자충수를 둬 대마가 잡히는 경우죠.”

정부, 겸손해져야

조 전 위원장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 왔던 대안을 털어놨다. 헌법상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민경제자문위원회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국민경제자문위원회에는 경제 모든 주체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항일 경우 별도의 기구 만들어 운영할 수 있도록 돼 있죠. 노사정위원회의 경우 별도로 운영해도 되고, 자문위원회에 포함돼 독자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노사정위원장 시절에 이 같은 방안을 추진했지만, 대선 활동을 위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사퇴했다.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지역활동에 대한 고민 때문일까. 그는 지역고용거버넌스에 대한 단상에 대해서도 장시간 얘기했다.

정부부처별로 지역 일자리정책이 추진돼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실정에 맞게 정비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노사정과 시민단체가 논의틀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요즘 사람들도 만날 겸, 머리도 식힐 겸 산에 자주 다닙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인데요. 수도권에 좋은 산들이 없었으면 진작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실직자들이 많아요. 자영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청년층도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정부가 겸손하게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며 “오만하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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