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직선거법 일부 조항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후보자별 득표수 등을 기록하는 개표상황표의 선거관리위원 서명을 수년간 누락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18일 <매일노동뉴스>가 입수한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한 투표구의 개표상황표<사진>를 보면 위원 검열란에 위원의 날인(도장 찍는 것)만 돼 있을 뿐 서명은 빠져 있다. 일부 지방에서는 서명이 누락된 개표상황표에 대해 무효확인을 청구하는 소송도 잇따르고 있다.

◇개표상황표 서명, 왜 누락됐나=현행 공직선거법(178조)에 따르면 후보자별 득표수 공표는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투표구별로 집계·작성된 개표상황표에 따라 투표구 단위로 하게 돼 있다. 출석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전원은 공표 전에 득표수를 검열하고 개표상황표에 서명·날인해야 한다. 이 조항은 선거관리위원이 자필로 서명·날인해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지난 94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2005년 공직선거법으로 바뀜) 제정 당시부터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선관위는 95년 공직선거예규(관청에서 내부 사무에 관한 기준을 보이기 위해 정한 규칙)를 만들면서 후보자별 득표수를 검열하고 개표상황표에 서명 또는 날인하도록 했다. ‘서명·날인’을 ‘서명과 날인’이 아닌 ‘서명 또는 날인’으로 판단한 것이다. 2007년 실시된 대통령선거 당시 중앙선관위의 개표관리 매뉴얼도 개표상황표에 서명 또는 날인하도록 돼 있다.

◇공직선거법 자의적 해석 논란=한영수 민주노총 직선제팀장(전 전국공무원노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본부장)은 “개표상황표는 법정서류로 외부에 공표하는 검증조서”라며 “선거관리위원들의 서명이 누락된 개표상황표는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한 팀장은 “선거관리의 주체인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사무의 관리집행에 관한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에 선관위 관계자는 “법제처에서도 ‘서명·날인’을 ‘서명과 날인’으로 보거나 ‘서명 또는 날인’으로 보는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며 “선관위는 ‘서명 또는 날인’으로 보고 예규를 정한 것이기 때문에 위법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지난 2월 "공인중개사의 업무 및 부동산거래 신고에 관한 법률에서 정하는 ‘서명·날인’은 서명과 날인을 모두 해야 한다는 ‘서명 및 날인’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선관위 관계자는 “입법취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며 “개인 간의 계약은 본인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서명과 날인을 모두 하도록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어학적으로 가운뎃점(·)은 열거된 여러 단위가 대등하거나 밀접한 관계임을 나타낼 때 쓴다. ‘또는’의 의미가 아닌 ‘그리고’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로 선관위가 행정입법한 공직선거관리규칙에서도 ‘서명 또는 날인’과 ‘서명·날인’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개표상황표 무효확인청구 소송 잇따라=2000년 이후 진행된 16대 국회의원선거를 비롯해 2002년 3회 지방선거·16대 대선, 2004년 17대 국회의원선거, 2006년 4회 지방선거, 2007년 17대 대선, 지난해 국회의원선거 과정에서 선관위가 작성한 개표상황표에는 선거관리위원의 서명 또는 날인이 누락돼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밀양과 고령·대구 등 일부 지방에서는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서명이 누락된 개표상황표에 대한 무효확인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현행 행정소송법(3조)은 국가 또는 공공단체의 기관이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를 했을 때 시정을 구하기 위해 제기하는 ‘민중소송’을 행정소송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밀양지역의 경우 관련 사건을 맡은 주심판사가 지난해 총선 당시 부산지역 한 투표구의 선거관리위원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투표구의 선거관리위원장은 부장판사급 이상이 맡고 있다. 때문에 이런 소송이 잇따를 경우 사건의 당사자일 수 있는 판사가 소송을 담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선관위의 위법성에 대한 논란은 대법원에서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헌법(107조)은 명령·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을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선관위, 내부감시 위해 노조 필요=신지호 한나라당 의원은 13일 선거관리위원회 공무원 중 선거사무를 담당하는 선거공무원을 특정직공무원으로 분류해 노조결성을 불허하는 내용의 국가공무원법·선거관리위원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통합공무원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한 것은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 고도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하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임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한 팀장은 “지금까지 선관위가 부정선거를 진행했는데 노조마저 없으면 내부고발은 불가능하다”며 “특정 정치세력이 선관위를 장악하면 엄청난 부정선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한 팀장은 특히 “(선거에 있어) 선관위 직원은 보조자에 불과하다”며 “선거관리위원이 실책임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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