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프레임

1980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과 뒤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아버지 부시가 주도한 경제정책을 바탕으로 12년간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이 추진됐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걸프전의 과다한 전비 사용과 감세를 앞세운 경제정책의 실패로 불황에 허덕였다.
이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Stupid)’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미국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과정도 비슷하다. 경제대통령이라는 이미지와 7·4·7공약을 통해 당선됐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모든 사람의 화두를 ‘경제’라는 프레임 안으로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과연 ‘경제’라는 프레임 안에서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이 성공할 수 있을까?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급진적 시각에서 본다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장났기 때문에 고칠 수 없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뛰어드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라는 것이다. 수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물론 열심히 고치려 노력해야 한다.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는 금융에 대한 통제를 비롯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시장 중심적인 정책으로 가자고 하는 것은 얼빠진 얘기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아직도 그런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민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경제에 대한 해법을 이명박 정부와 똑같은 방식으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부자 감세냐 부자 증세냐, 부동산이나 토건경제를 강화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논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 ‘경제 살리기’에 머문다면 정부 정책은 성장 위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돈을 많이 풀어야 한다는 논리에 매몰된 채, 다만 그 돈을 재벌에게 줄 것이냐, 중소기업에게 줄 것이냐. 부자에게 줄 것이냐, 서민에게 줄 것이냐는 쟁점을 경제라는 프레임 안에서 얘기한다면 그다지 차별적이지도 않다. 기존 경제시스템이 재벌과 부자 중심의 경제이기 때문에 경로의존성에 따라 결국 야당이나 진보정당의 주장이 성공할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프레임은 이명박의 프레임이다. 그 프레임 안에서 싸우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마당 안에서 싸우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프레임을 바꾸는 냉정하고 과감한 판단이 필요할 때다.

문제는 사회야,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또는 ‘문제는 정치야’라고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나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 보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두 눈을 뜨고 보자. 경제와 정치 모두를 동시에 보면서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두 눈을 모두 뜨고 보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 일터와 삶터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합하는 차원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인 관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고 바로 사회다. 정치는 이미 권력을 둘러싼 협소한 게임으로 변질돼 있다. 국가권력을 둘러싼 대통령선거, 의회권력을 둘러싼 국회의원 선거, 지방권력을 둘러싼 지자체 선거 등 모든 정치가 철저히 권력의 위계질서를 둘러싼 경쟁으로 귀결된다. 돈이 곧 힘인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이 밀착해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영역에서 움직인다.

경제적 시각 혹은 상식적으로 느끼는 ‘안전’과 사회적 시각에서 보는 ‘안전’은 전혀 다르다. 기업의 안전을 위해 노동자를 쥐어짜는 것은 생산성의 향상이다.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칭송받는다. 그러나 사회적 상식으로 볼 때 사람을 쥐어짜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의 대상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얘기는 경제적 시각에서 본다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오랜 노동을 해 왔던 노인들을 봉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적 시각에서 본다면 아동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저임금을 통한 고효율의 이윤을 얻는 방법이다. 반면에 사회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죄악이다. 청소년들은 일하지 않더라도 생계유지는 물론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단순한 경제적 관점으로 보면 실업자는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어떻게든 생계대책을 마련해 줘야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기업활동은 최대한 자유롭게 보장돼야 한다. 그렇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비난받아 마땅하다. 경제만 생각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경영하든지 삼성은 한국경제의 보배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삼성의 편법·탈법 행위는 처벌받아야 한다.

경제와 경영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기업이 어려울 때 사람을 잘라내는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실업대란을 부추기는 행위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비용절감을 위해 경영자가 노동자를 버릴 수도 있다. 노동자는 단지 생산수단이고 비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집안이 어렵다고 자식을 버리는, 심각한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인 행위에 다름 아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경제적 관점에서만 볼 때 1년에 5만5천대를 생산하겠다는 쌍용자동차는 청산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청산하기보다는 유지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덜 든다. 경제위기 시대에 모두가 ‘경제’라는 프레임에 빠진다면 노동자도 진보적 운동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경제에 눈을 감자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를 살리든 아니면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만들든 이명박 정부, 자본, 부자들의 해법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노동자와 진보운동이 경제가 아닌 사회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출발해 경제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노동운동이든 진보운동이든 경제학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그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공장 탈출을 위한 철학과 시각을 무장하는 일이다. 경영분석과 임금계산에 머물지 말고 가족·지역·여성·교육·인권 등을 비롯한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 노동자를 구원할 수 있다. 매년 반복되는 노동조합의 판에 박힌 임단투 교육이나 그것을 위한 정세교육은 획기적으로 개선돼야 한다.  

서점에 들어가 보면 얼마나 세상이 경제 중심으로 흘러왔는지 금세확인할 수 있다. 경제·경영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와 같은 잘 팔린 책들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가족관계마저 경제로 뒤덮여 있다.

독재의 귀환

경제 프레임이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는 사회는 곧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다. 어쩌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치와 경제는 있되 사회는 없는 국가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성장을 위한 경제의 시대였다.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군사독재가 오랫동안 유지됐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한 것이다.

80년대 민주화투쟁은 독재에 맞서는 정치의 시대였다. 민주화운동이 전 사회를 휩쓸었고 억압돼 왔던 노동자들도 파업을 통해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결과 등장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시대는 민주화로 대변되는 정치의 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김대중 대통령을 정치에서 경제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죽음을 넘나들면서 민주와 운동을 했던 ‘민주투사’가 대통령이 된 바로 그 시점에 ‘시장’이라는 독재자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리해고법이 시행되면서 “시장이 모든 것을 말한다”라는 명제가 전 사회를 휘감았다. 기업 구조조정이 봇물 터지듯 진행됐고, 노동자에 대한 강제적 해고가 잇따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첫해인 98년 만도기계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경찰력이 투입됐다. 이어 2001년 대우자동차에 경찰력이 투입됐다. 같은해 4월10일 경찰이 맨몸의 정리해고자들을 짓밟은 사건은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어려운 폭력이었다. 정치민주화의 투사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등장한 시장원리에 따라 ‘인간이 아닌 비용’의 개념하에 노동자들을 강제로 해고한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쿠데타를 통해 등장했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면서 등장했다면, ‘시장’이라는 독재자는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을 경찰력으로 강제진압하면서 등장한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는 경제에 압도돼 그 측근들마저 돈의 마수에 빠져 들게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당시에 재벌회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권력은 시장에 있다”고 했던 말은 스쳐 가는 얘기가 아니었다. 시대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었다. ‘시장’이라는 독재자는 노무현 정권 사람들에게 가진 자를 위한 낡은 경제정책을 강요했다. 사회 양극화와 비정규직 확대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대에 본격화됐다. 경제 프레임을 앞세운 이명박 대통령은 ‘잃어버린 10년’을 비판하면서 ‘보수의 복귀’를 선언했다. 경제위기라는 조건은 경제 프레임을 강화시켰다.

시장·경쟁·성장·효율의 논리가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다. 설사 그 논리를 바탕으로 무너진 경제를 구한다고 해도 노동자와 민중을 희생시키고 부자만 살리는 경제구조가 고착화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정치의 시대로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경제와 정치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와 정치를 새롭게 재편할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몰락에 대한 목소리는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지적돼 왔다. 과거 민주화운동과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저변에는 수많은 인문학 책들로 채워진 사회과학 서점들이 있었고 학습이 있었다. 경제위기야말로 인문학의 부활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당장 ‘경영학의 종말’을 선언하고 ‘인문학의 부활’을 꿈꿔야 한다.<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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