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을 하면서 내가 꿈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혁명이었을까. 아니다. 나의 노동운동은 이념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욕구에서 비롯됐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노동자라는 자긍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과 만날 때가 있다. 타협도 해야 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항복’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노동조합 지도자는 괴롭다. 성질 같아서는 확 뒤집어 버리고 싶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분기(憤氣)만 갖고는 되지 않는다.
자유당 시절 노동조합 조합원이 돼 군사정권 때 노동조합 간부로 노동운동에 입문했고, 유신과‘5공’을 거치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패배감과 굴욕감을 맛봤다. 그러나 나는 시간은 결국 우리 편이라고 믿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는 늘어난다. 파업을 못하게 하면 조직을 했고, 조직을 못하게 하면 교육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내가 꿈꿨던 것은 개혁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노동조합이 힘든 때가 또 있을까.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실력 이상의 약속을 너무 많이 남발한 것도 사실이다. 발상의 전환이 지나쳐도 곤란하지만, 노동조합이 자신의 실력도 모른 채 깃발을 흔든다면 그것만큼 위험천만한 게 또 없다.
후배들이 꿈꾸는 게 혁명일까? 그렇다면 나는 해 줄 말이 없다. 후배들이 꿈꾸는 게 개혁일까? 그렇다면 나는 해 줄 말이 있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1980년 5월9일, 이날 오전 10시에 한국노총 6층 회의실에서 전국금속노조 대의원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돼 있었다. 당시 한국노총회관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6층짜리 건물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여의도에서는 가장 큰 빌딩 가운데 하나였다.

전날 부산지역의 대의원들과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해 강남터미널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시간에 맞춰 노총회관에 들어서니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회관 입구에 십수명씩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절반 이상이 여성 조합원들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무리마다 낯익은 경인지역 대의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뭔가 있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제대로 인사를 할 틈도 없었다. 잰걸음으로 6층에 올라가 보니 경인지역의 젊은 노조간부와 조합원 수백 명이 회의실을 이미 ‘접수’한 상황이었다. 대한중기의 이종복 분회장이 단상에 올라 “김병용 위원장은 퇴진하라!”, “민주노조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선창하며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시그네틱스·콘트롤데이타·세진전자 등 여성 조합원들도 가세했다.

대한전선의 한달수 지부장·김장선 사무장, 동양강철의 최웅길 분회장,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으로 1978년 대우그룹이 인수)의 이성균 지부장 등의 얼굴도 보였다. 봄이 오면 꽃망울이 터진다더니 금속노조의 봄은 개구일성(開口一聲) “퇴진” 구호와 함께 왔다.
 
‘선구자’ 한달수·김성문·이종복·이성균·최웅길·김장선

 이보다 1년 앞선 1979년 5월, 금속노조 임원선거에서 김병용 위원장에게 대한전선의 한달수 지부장이 도전장을 냈다.

이 시절 금속노조의 ‘주류’는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과 금성사(락희화학과 함께 LG그룹의 전신) 지부였다. 대의원의 5분의 1가량이 두 대기업 노동조합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들은 규모에 비해 조직사업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유신 치하에서 노동조합운동의 물꼬를 트려 애쓰던 전국의 ‘개혁적’ 대의원들에게 점수를 많이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소기업 노동조합 대의원들이 선거를 앞두고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한달수 지부장이 있었다.

한 지부장은 나보다 두 살 위인 1937년생으로, 대기업 지부장이면서도 청렴했고, 포용력이 컸기에 개혁의 구심이 될 수 있었다. 경인지역의 젊은 대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여기에 이성균 지부장이 주도해 대우그룹 계열사 대의원들이 동참한 게 상당한 힘이 됐다.

하지만 도전자가 넘어서야 할 벽은 너무 높았다. 투표 결과, 재석 대의원 231명 가운데 163명이 김병용 후보를 지지했다. 68표를 얻는 데 그친 한달수 지부장은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 68명에 나도 포함돼 있었다.

1976년 금속노조 사무국장 교육 때 안면을 트게 된 김성문·최웅길 등이 나를 김병용 위원장의 노선에 비판적인 경인지역 젊은 간부들과 연결시켜 줬다. 이 친구들은 부산에 출장을 오면 항상 나를 ‘호출’했다.

한번은 이들로부터 내 얘기를 들은 김장선이 금성사 임금조사를 하러 부산에 왔다가 나를 불러냈다. 그는 본조의 비상근 법규부장을 하고 있었다.

김장선은 서울공고를 나와 1969년 대한전선에 입사해 신규 도입된 기계 시운전이라면 도맡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던 노동자였다. 현장 때부터 할 말은 하는 ‘정의파’로 통했던 그는 70년대 중반에 이미 대한전선지부는 물론 경인지역 금속 노동운동가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소주잔을 앞에 놓고 많은 얘기를 나눴다. 유신독재가 쇳소리를 내며 국민들을 몰아붙이고 있을 때였다. 30대의 팔팔한 노동운동가에게 울분이 없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내 뜻이 맞았고, 김장선은 다섯 살 위인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김장선이 낸 시험 문제를 잘 풀었던 탓일까. 김장선이 돌아간 뒤부터 두 달에 한 번꼴로 경인지역 동지들이 나를 만나러 왔다. 역시 소주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러니까 경인과 부산 개혁세력의 ‘연결’은 요즘 후배들에게 익숙한 ‘소모임 학습’이 아니라 ‘술자리’로 다져진 셈이었다.
 
너무나 짧았던 봄

만남이 만남을 낳으면서 ‘피아(彼我)’의 구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달수 지부장을 비롯한 경인지역의 동지들이 최소한 나를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실제 그랬다. 나도 그들이 좋았고, 그들의 뜻에 많은 부분 공감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과 같은 ‘팀’은 아니었다.

한달수 지부장이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부산에 왔다. 나는 친하게 지내던 대동조선의 정학균 지부장과 연합철강의 박기식 지부장을 소개했다. 소문나지 않게 조심했다.

김병용 위원장은 두 지부장을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혹시 나중에 말이라도 나오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1979년 임원선거 때만 해도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조사만 하면 다 알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럴 때였다.

우호적이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왜 거기에서 그쳤을까. 요즘이야 휴대폰이나 메일로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지만 예전에는 그런 게 없었다. 전화가 있다지만 그 당시에 지부 사무실 전화로 중요한 얘기를 전달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빠듯한 처지에 한 달에 몇 번씩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릴 수도 없었다. 뜻이 맞았다고는 해도 ‘행동통일’로 나아가기에는 역시 소통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했을 수도 있다. 나는 내실을 다지고 싶었다.

현 집행부나 본조의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은 조선공사 파업 이래 나 역시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막힌 유신체제에서 노동운동이 살아남으려면 훗날을 위해 우선 조직을 열심히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노동운동의 기본은 노동조합 조직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마침 나는 1975년 이래 부산지역지부 사무장을 맡고 있었기에 미조직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조직을 늘리는 게 내 일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나와 경인지역 동지들 사이에는 전술적인 차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80년 5월 ‘서울의 봄’이 왔다.

아무튼 보안 때문에라도 전국의 동지를 규합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 있는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경인지역 동지들 중심으로 거사를 강행한 듯했다.

나는 구호가 터져 나오는 대의원대회장에 서 있었다. 대회장은 단상에 올라선 동지들이 틀어쥐고 있었다. 김병용 위원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단상 아래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김 위원장측 대의원들은 그저 물끄러미 단상 위를 바라보거나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병용 위원장이 자신의 퇴진 문제를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의원대회에서도 ‘퇴진’ 안건을 통과시키기 어려운 판국에 재적 3분의 2 이상이 ‘주류’로 구성된 중앙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김 위원장이 퇴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김 위원장을 지지하는 중앙위원들은 이날 오후 강남에 있던 유스호스텔에 따로 모여 중앙위원회를 열고는 대의원대회 파행에 대한 유감 성명을 채택했다.

그들의 귀에는 개혁을 열망하는 조합원의 애절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며칠 뒤면 닥칠 신군부의 군홧발 소리만 천둥처럼 울렸던 것인가. 나는 중앙위원도 겸하고 있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거사를 주동했던 이종복 등은 화학노련과 섬유노련 동지들과 합세해 5월13일 한국노총 주최로 열린 노동기본권 보장 궐기대회를 점거했다.
‘노총 집행부 퇴진’이 주된 요구였고, 이날의 양상은 매우 격렬했다. 그리고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만사휴의(萬事休矣). 짧았던 봄과 함께 꽃은 꽃망울을 터뜨려 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스러졌다.
 
역사는 비켜가지 않는다

‘광주’…. 솔직히 말해 나는 당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부산의 노동자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돌았다. ‘광주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을 죽을 만큼 때린다’는 것이었다.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광주’가 울고 있을 때 부산의 노동자들은 이따위 소리나 듣고 있어야 했다. ‘광주’에 직간접으로 연결된 분들에게는 송구한 말씀이지만, 그 기억이 ‘광주’보다 더 가슴 아프게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끊어졌던 전화가 다시 이어지고 나서 광주에 사는 한 노동조합 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먼저 안부부터 물어야 했다. ‘당신은 별 일 없느냐’고. 다음에는 ‘그 유언비어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조합원들에게 ‘사실이 아니었다’고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공사지부 상무로 있을 때 알게 된 김상찬씨가 몇 달 뒤 ‘광주’ 비디오를 구해 왔다. 몇 사람이 숨어서 봤다. 김상찬씨는 부산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4월 혁명 뒤 민민청 활동을 했고, 당시 해동병원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눈앞에 화면이 돌아가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망각이라고 누가 썼던 것처럼, 나 역시 곧 ‘광주’를 잊어버렸다. ‘광주’와 노동조합은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날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나는 1966년에 결혼했다), 나와 아내의 결혼기념일이 5월18일이었다. 1988년 금속노련 위원장에 당선된 뒤부터 2004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할 때까지 나는 결혼기념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과연 역사는 함부로 비켜설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내가 풀지 못한 숙제는 후배들이 정답을 내줄 것이라 믿는다.
 
DJ를 살리려 애쓰던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

이 무렵 나는 1주일 일정으로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다. 일본 조선중기노련 중앙위원회 참관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조선기계분회 소속으로, 금속노조 본조 조선분과위원회 소속이기도 했다. 조선분과위원회 위원장인 팽종출 조선공사 지부장과 함께 갔다.

팽 지부장은 1969년 파업으로 조공지부 간부들이 해고·구속된 뒤 허재업 지부장이 믿고 직무대리로 임명했는데, 종국에는 쟁의를 취하한 그 지부장이다. 석방된 뒤 몇 번인가 연락을 했지만 팽 지부장은 우리를 피했다. 그러다 1975년쯤 팽 지부장이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

내가 부산지역지부 사무장을 할 때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때 왜 쟁의를 취하했는지’ 물었다. 팽 지부장은 내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이 “잘못했다”고만 했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적대해야 할 진짜 상대는 남궁련 사장이지 팽종출 지부장은 아니지 않은가.

일본 조선중기노련 중앙위원회 참관은 금속노조 부위원장이면서 조선분과위원장을 겸임하던 팽 지부장이 내게 호의를 베푼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조선중기노련 간부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줬다. 1969년 조공지부 간부들이 구속됐을 때 국제자유노련 일본협의회가 성금을 보내 준 적이 있다고 앞에 썼는데, 당시 그 협의회 소속이던 조선중기노련 간부들이 몇 명 남아 있었다. 나를 보고는 정말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화제로 올랐던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었다. 당시 야당 지도자로 군사정부에 체포된 김대중씨였다. ‘광주’와 ‘김대중’이 연일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을 때였다.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은 대부분 DJ를 지지했고, 그의 안위를 염려했다. 얼마 전 치러진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지켜보며 당시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이 우리에게 “한국 정부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걱정하던 기억이 새롭다.
 
옥석구분(?石俱焚)의 위기에 빠진 한국노총

신군부가 노린 것은 김대중씨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간부들도 벼르고 있었다. 이른바 ‘노동조합 정화 조치’가 내려졌다.
“한국노총 위원장, 산별 위원장들이 소리 한번 못 내고…. 항의라도 한번 해야 되는 거 아이가?”
 
“이기 다 노동조합이 약해서 그런 기라”

신군부의 서슬 퍼런 명령 한 마디에 한국노총 위원장과 산별노조 위원장 등 12명이 자진해서 사퇴했다. 명색이 산별위원장인데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 것이다. 한심했다. 나는 노동조합의 허약함에 탄식하고 또 탄식했다.

신군부의 ‘노동조합 정화 조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노총 중앙정화추진위원회와 산업별 노조마다 정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이 위원회들이 노동조합 간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에 들어갔다. 무려 1천500여명이 쫓겨났다.

이 회오리바람은 부산에도 몰아닥쳤다. 내가 속해 있던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지역지부의 정남수 지부장도 그만두게 됐다. 

여기에는 곡절이 있다. 김병용 위원장이 사퇴를 하자 팽종출 부위원장이 직무대행이 됐다. 형식적으로는 김병용 위원장이 직무대행을 임명한 것으로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노동청의 한 간부가 이 일을 담당했다.

아무튼 팽종출 직무대행이 주재한 회의에서 부위원장이던 이헌구씨가 “위원장이 압력에 의해 사퇴했으니 항의 차원에서 임원들은 전부 사퇴하자”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부위원장들이 모두 사퇴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자리에 없었던 부위원장 두 명, 즉 부산지역지부 정남수 지부장과 경북지역지부의 하준 지부장의 사퇴서가 금속노조 정화위원회와 한국노총 정화위원회로 넘어갔다. 정남수씨와 하준씨는 ‘사퇴서를 쓴 적이 없는데 어떻게 사퇴 처리가 될 수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뒤에 정남수씨는 이 문제로 법적 소송까지 했는데 원했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경인지역의 개혁적인 노동조합 간부들도 이때 쫓겨났다. 한달수 대한전선 지부장·이종복 대한중기 분회장·최웅길 동양강철 분회장 등이 ‘과격분자’라는 이유로 노동조합 간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특히 한달수씨와 이종복씨는 합수부에 연행돼 달포 가량 고초를 겪었다.

이때 일을 두고 최웅길씨가 뒷날 “그때 박 국장 말을 귀담아들을 것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경인지역의 젊은 지부장들은 참 활발히 움직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조직사업을 열심히 하고 각종 교육이나 회의에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선배들에게 견제의 대상이 됐다.

나는 권오덕과 함께 ‘당한’ 경험도 있어 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볼 때면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았다. 한번은 선배들의 견제도 결국에는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이니 천천히 하자는 뜻을 넌지시 비친 적도 있다. 아마도 최웅길씨는 그때 내 말을 기억했던 것 같다.

당시 ‘노동조합 정화 조치’ 관련 자료는 한달수씨가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진 경우도 있다.

옥석(?石)이 구분(俱焚)이 된 것인지, 구슬을 태우기 위해 돌멩이랑 함께 아궁이에 넣은 것인지는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평가해야 할 일이겠지만, 나는 한국노총이 해야 될 일 가운데 하나가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고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유행처럼 나왔던 ‘역사 바로 세우기’나 ‘청산’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정권에 무릎을 꿇은 과거도 우리의 과거 아닌가. 그것이 부끄럽다고 해서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노동조합 정화 조치’로 노동조합을 떠난 이들은 그 숫자만큼 많은 사연을 각자 갖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부정부패로 쫓겨난 이들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당시 노동조합 활동을 그만둬야 했던 이들, 강제로 그만두게 했던 이들, 나처럼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이들, 모두의 ‘살풀이’가 한 번은 필요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노동조합 정화 조치’에 따른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돈 문제에 더 경각심을 갖게 됐고 사소한 빌미라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조선공사지부에 있을 때부터 돈과는 거리를 뒀다. 지부 총무부장을 몇 달 맡은 적이 있는데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해 다시 청년부장을 시켜 달라고 선배들에게 애원했다. 왜 그랬는가 하니, 가끔씩 간부들이 술을 먹고는 조합비로 계산하는 것을 봐야 했다.

내 판단에는 조합 간부가 조합원을 만나 술을 마시는 것까지 조합비로 쓸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게 좀 애매했다. 조합 활동 차원에서 술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번번이 선배들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총무부장이 노동조합 ‘실세’라는 말도 있었지만, 나는 두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보면 난감할 때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도록 살아야 했기 때문에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구분되지 않을 때는 내 주머니를 털었다. 이것도 소심하다면 소심한 것일까.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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