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29일. IMF 경제위기 직격탄을 맞은 한국사회는 '여성노동자 우선해고'와 '비정규직 확산'이라는 그늘 아래 있었다. 이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깃발을 세운 곳이 전국여성노조다. 여성노조가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10년 만에 한국사회는 10년 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로 여성노동자, 비정규직이 해고 1순위가 되고 있다. 지난 8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여성노조 사무실에서 박남희(46) 위원장을 만났다.


400명에서 6천명으로, 10년의 성장

- 여성노조가 출범할 때 조직화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10주년을 맞은 소감은.
“벌써 10년이구나, 하니 새삼스럽다. 여성노동자의 현실이 여성노조를 만들게 했다. 99년 당시에도 그랬다. 비정규직과 해고의 1순위는 여성이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담고자 여성노조를 조직했다. 설립 초기에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왜 꼭 여성조직이냐, 노동운동의 분열 아니냐, 이런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남성 중심 노조에서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믿음하에 출발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여성노조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 왜 그런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성간부의 리더십이 많이 성장했다. 이것이 역으로 다른 조직에서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다.”

- 지난 10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나.
“당초 조합원 400명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전국 10개 지부, 조합비 납부 기준 6천명 규모로 성장했다. 여성노조의 배경이 되는 사업장은 모두 100인 이하의 중소·영세사업장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 조직활동을 해 나가면서도 이같이 조직 확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튼튼한 골간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조합원의 95%가 비정규직이다. 지난 10년간 수만 명의 조합원들이 여성노조를 거쳐갔다.
조직은 조합원 숫자만이 아니라 내적 강화, 즉 현장간부의 지도력 강화와 조합원 활동 강화을 같이 봐야 한다. 여성노조는 교육시스템을 만들어 소수 상근간부에 의한 것이 아닌 현장간부와 조합원을 통한 조직확대 방식을 유지했다.”

“최저임금·학교비정규직 투쟁 기억나”

-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업이나 투쟁을 꼽는다면.

“너무 많아서….(하하) 우선 특수고용노동자 문제를 발굴한 것이다. 골프장 경기보조원 노조인 88CC분회가 대표적이다. 또 최저임금 문제를 가지고 조직화하고 사회적 여론을 만들어 냈다. 2000년 인하대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이 상담을 요청했다. 여러 곳을 다녔지만 아무도 해결할 수 없다고 해서 여성노조까지 찾게 됐다고 했다. 임금이 깎인 원인을 분석해 보니, 최저임금 때문이었다. 최저임금과 용역노동자 조직화 간 상관관계를 깨달았다. 2001년 여성노조가 직접 설문지를 들고 용역회사 107곳 528명과 14개 대학 용역분회 7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당시 41만1천490원인 최저임금을 못 받는 노동자가 22.9%에 이른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이를 바탕으로 여성노조가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집회를 했고, 여론화에 힘쓰는 한편 중장년 여성노동자 조직확대를 한 것이 기억난다.”

- 학교비정규직 조직화도 여성노조의 대표적 성과로 보이는데.
“그렇다. 학교비정규직 문제도 처음 광주에서 상담을 받고서 알게 됐다. 어떻게 공공부문인 학교에서 이럴 수 있는지 의아했다. 역시 설문지를 들고 현장의 노동자를 찾아다니며 실태를 파악하고 조직화에 나섰다.
이를 근거로 여성노조는 정부가 먼저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고, 결국 2004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이끌어 냈다.”

무기계약 전환 뒤 차별해소 주력

- 학교비정규직 상당수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07년 2차 무기계약 전환대상 대부분이 학교비정규직이었다. 투쟁이 없었으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기계약 전환 당시 반쪽짜리라는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여성노조는 고용안정을 해 놓고 그 뒤에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알차게 투쟁한 것 같다. 지금은 정부가 비정규직법 개정을 시도하며 공공부문부터 해고하고 있는 실정이니 안타깝다.”

- 무기계약 전환 뒤 차별해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정권이 바뀐 뒤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확대됐다. 학교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한 권한이 지역교육청으로 이전됐다. 기존 교육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 지역교육청을 상대로 지속됐다. 전북지역의 경우 영양사도 학교장 임용권을 확보했고 지역별로 복지포인트를 요구하는 등 차별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지난 10년간 여성노조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무엇보다 정권교체가 가장 큰 변화가 아닌가 싶다. 우리 조합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친기업 정부하에서 그동안 이뤘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조합원들이 일상적인 활동, 지역활동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88CC는 대표적 특고노조 탄압사례”

- 88CC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지난 10년간 수차례 단협을 맺고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라고 판정했음에도 회사측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58명을 해고했다. 대표적 특수고용직노조 탄압사례다. 회사는 대법원까지 가겠다고 하는데 우리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해고 조합원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수입의 10%를 무조건 투쟁기금으로 내겠다고 결의까지 했다. 무수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노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조합원들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노조활동을 통해 알았다고 했다. 그들이 오히려 나를 일깨워 줬다.”

- 경제위기 속에서 여성노동자가 우선해고를 당하고 있는데.
“여성노동자의 처지가 열악해지고 있다. 올해 결정된 내년 최저임금 인상률을 보면, 사실상 삭감이다. 이것이 여성노동자의 현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여성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 더 많은 여성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화해야 한다.”

- 여성노조는 상급단체가 없다.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
“초창기 때도, 창립 5주년 때도, 그리고 올해도 상급단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역시 상급단체에 안 들어가길 잘한 것 같다. 여성노조는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있는 대표적인 조직이다. 게다가 양대노총과 연대하고 있고, 지역에서는 구체적인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상급단체가 없다고 우리가 활동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여성노조의 사회적 영향력은 여전한 과제다. 이를 위해 정책력과 조직동원력을 키울 생각이다.”

"더불어 나누는 노조운동의 길을 걷겠다"

- 앞서 일상과 지역에서의 정치활동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동안 여성노조는 정치적 중립적이 않았나.

“중립적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대중조직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 특정한 정당에 가입해 지지하는 게 정치활동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정치의식은 더 다양하고 넓을 수 있다. 일상의 영역에서 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정치활동이라고 본다.”

- 향후 10년을 어떻게 전망하나.
“여성노조는 2007년부터 ‘더불어 나누는 운동실천’이라는 가치를 공식 채택했다. 상대적 박탈감이 큰 것이 여성 비정규직이다. 하지만 우리 조합원들은 차별해소뿐만 아니라 나누는 삶도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회와 분회에서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예컨대 인천대분회 청소용역 조합원은 폐지를 모아 번 돈으로 이주노동자 자녀에게 학용품을 지원한다. 또 광주지부에서는 조리원 조합원이 어린이날 행사에서 주먹밥을 나눠 주며 보람을 느낀다. 거창하게 사회적 연대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올해는 더 많은 지부, 지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해 가려고 한다. 나누는 게 노조의 중요한 운동이 돼야 하지 않을까. 여성노조는 20대부터 70대까지 포괄하는 조직이다. 여성의 삶의 주기와 함께하는 운동이기에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여성노조는 창립 10주년을 맞아 12일 오후 서울 중구구민회의에서 창립 10주년 창립대회를 개최한다. 이어 13~15일 서울 우이동 명상의집에서 일본·니카라과 등에서 참여하는 ‘새로운 전망, 대안적 조직화 전략을 위한 국제 워크숍’을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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