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라는 게 참 묘하다. 주는 것 없이 괜히 미운 경우가 있는가 하면, 뺏기면서도 밉지 않은 경우가 있다. 다른 일도 그렇겠지만, 노동조합운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 사무장을 맡게 되면서 내 수첩에 적힌 사람들의 숫자는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못 만나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리운 ‘동지(同志)’들이 있었는가 하면, 개중에는 정말 ‘나쁜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들’만 모아 노동조합을 해야 하는가. 세상에 노동이 좋아서 노동자가 된 사람은 없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아니었다. 노동자가 되기까지, 그리고 노동자가 되고 난 뒤에 사회가 그들에게 ‘베푼’ 대접은 노동자의 성정(??)과 인격(人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흔히 1970년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한다. 확실히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그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동료를 팔고 돌아섰다. 그러나 공장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환하게 켜진 그 불빛이야말로 노동자들의 희망이었고, 노동조합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핍박할 때면 대학생이 되려고 몸부림치던 젊은 날을 떠올리며 마음을 잡았다. 누가 뭐래도 노동조합이야말로 노동자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학교가 아닌가.

 
 
영도 바닥에서 철공소 노동자들과 함께 웃고 울다 보니 어느새 일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영도 철공소 사장들의 모임인 조선기계협동조합은 처음에는 떨떠름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철공분회를 교섭 상대로 인정, 단체협약을 맺고 그것을 지키는 데 협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기계협동조합 서아무개 상무의 도움이 컸다. 전경련이나 경총 같은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지만, 서 상무는 사용자단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고급간부로서 노동조합에 대한 이해도 깊고 노동법도 훤히 꿰고 있었다. 우리와는 대화가 통했다. 말하자면 서 상무는 사용자와 노동조합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부산의 700인 이하 금속사업장을 조직할 수 있다면…
 
철공분회 조직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신이 난 권오덕과 나는 눈길을 금속노조 부산지부로 돌렸다. 노동자의 단결은 아무리 넓어도 지나침이 없다. 부산지역의 금속노동자들은 업종과 규모를 뛰어넘어 뭉쳐야 했다. 그게 노동조합의 ‘녹(祿)’을 먹고사는 우리들이 할 일이었다. 때는 1971년 봄이었다.

당시 금속노조는 조합원 700명 이상의 기업별 지부와 700인 미만의 분회들로 조직된 지역지부로 편제돼 있었다. 이 밖에 업종별 지부와 우리 영도철공분회 같은 본조 직할 분회가 있었다.
 
각 지부들은 독자적으로 교섭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본조 위원장의 직인이 없어도 됐다. 하지만 분회의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본조 직할이었기 때문에 달랐지만, 나머지 분회들은 독자적인 교섭권이 없었다. 물론 형식적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분회가 교섭을 진행하고 단체협약을 체결, 지부 양해 하에 직인을 찍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권오덕은 지역별 지부가 교섭권을 갖고 있다는 데 착안해 부산지역지부로 활동영역을 넓힐 것을 제안했다. 노동조합 조직에서 교섭권은 생명이나 다름없다. 특히 노동자가 몇 명 되지 않는 작은 사업장에서는 교섭권이 유명무실해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상급단체의 교섭권을 사용자들에게 관철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섭 없이 조직 확대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상급단체가 교섭권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행사하는 것은 노동조합 조직률을 높이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전제가 된다.

이미 철공분회에서 복수의 사용자들과 단체협약을 맺고 그것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던 우리로서는 내심 꿈꾸는 바가 컸다. 지역지부의 교섭권을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우리가 열심히 뛰어 부산지역 700인 미만 금속 사업장들을 모두 조직할 수 있다면?.

이론이나 노선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기업지부의 한계니 지역지부의 강화니 하는 말들은 당시에는 듣지도 못했다. 조선공사에서 쫓겨난 뒤 노동운동 할 곳을 찾다 보니 지역지부까지 생각이 닿은 것이다.

그러나 영도철공분회 활동을 하면서 조직된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의 차이를 눈으로 보고, 작은 사업장에서 조직사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온몸으로 겪은 우리는 지역별 지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후배들이 지역노조와 일반노조를 노동운동 혁신을 위한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후배들이 고민을 푸는 데 그 옛날 우리의 경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선배로서 그처럼 기쁜 일이 없을 것 같다.
 
철공분회 선배들, 본조에 떼를 쓰다
 
1971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에 성공한 지 만 10년째 되던 해였다. 중화학공업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상태였고, 제조업의 주력은 섬유산업을 필두로 한 경공업이었다. 공장이 꽤 많았던 부산만 하더라도 규모가 큰 금속사업장은 대한조선공사·금성사·신진자동차·연합철강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인지라 부산의 금속 노동조합은 세 곳의 기업별 지부와 부산지역지부, 업종별 지부인 조선지부, 그리고 영도철공분회가 전부였다. 부산지역지부에는 기아분회와 한진기계분회 등 두 곳의 분회가 소속돼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부산지역지부는 위원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해 활동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권오덕과 나는 부산지역지부를 키우려면 철공분회와 조선지부가 먼저 지역지부 산하로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조선지부는 쿠데타 직후 탄생한 이른바 ‘재건노조’였다. 목선 수리를 주로 하는 작은 조선소의 목공 노동자들로 조직돼 있었다. 이런 조선소들은 대부분 부산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전국의 유명한 어업기지에 한두 곳씩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지부는 업종별 지부이면서 전국조직을 지향하고 있었다.

선박 엔진이나 부품을 수리하는 철공소 노동자들의 조직인 영도철공분회가 조선지부와 별도로 본조 직할 분회가 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영도철공분회를 조직한 김상원씨 등 선배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김상진씨(김상원씨의 친형)의 열성 지지자였다. 그런데 조선지부의 정남수 지부장은 공화당의 예춘호씨와 가까웠다. 이래서 “죽어도 정남수 밑에는 못 들어간다”, 이렇게 된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철공’과 ‘목공’의 차이, 그에 따른 문화적 이질감이 있었다. 그때 목공 노동자들은 정말 ‘군기’가 셌다. 조선공사에서도 목공반 반장은 작업실을 따로 갖고 있었는데, 얼마나 잘 차려 놓았던지 ‘아방궁’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목공반장 작업장을 아무리 잘 차려 놓은들 사무직 임원 사무실에 댈 수야 없겠지만, 좌우간 목공반장은 한마디로 ‘하늘’이었다.

이 대목과 관련해 내가 조선공사에 다닐 때 영도에서 본 장면이 하나 있다. 조선지부가 파업에 들어갔는데, 조합원들이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조합원을 잡아다 가마니에 말아서 ‘멍석말이’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파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솔직히 무서웠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정태씨와 최용구씨는 영도 철공소 노동자들을 조직한 뒤 본조로 찾아가 당시 김병용 위원장에게 본조 직할 분회로 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직할 분회로 해 주지 않으면 노동조합을 해산하겠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았으나, 막무가내로 “받아 줄라요, 말라요”라고 떼를 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본조는 본조대로 조합원 한 명이 아쉬운 처지였다. 결국 억지가 이긴 것이었다.
 
조선지부의 반대
 
권오덕과 나는 금속노조의 조직적 관점에서 볼 때 영도철공분회는 부산지역지부로 들어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조선지부 또한 형식적으로는 업종별 전국조직이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영도의 작은 조선소들이 주축인 조직이므로 지역지부의 분회로 편제돼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영도철공분회원들은 우리를 상당히 신뢰했던 것 같다. 부산지역지부로 들어가자는 우리의 제안에 선선히 찬성했다. 철공분회를 만들었던 선배들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선배들 역시 영도철공분회를 본조 직할로 고집한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분들은 이미 ‘사장님’이었다. 후배들이 크는 모습을 보는 게 낙이라던 선배들은 오히려 ‘너희들 부산지부 가서 일 더 많이 해라’고 우리를 격려했다.

하지만 조선지부는 간단치 않았다. 어쨌든 자신들은 ‘전국조직’인데 어떻게 지역지부 밑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지부 정학균 조직부장의 반대가 완강했다. 정 부장은 1969년부터 영세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제관공들을 조직해 조선지부 안에 제관분회를 결성해 분회장을 맡고 있었다. 정 부장은 ‘조선산별’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속초·남해·삼천포 등지를 훑으면서 제관공들을 모아 조직 확대를 꾀하던 참이었다.

권오덕과 나는 단념하지 않고 설득을 계속했다. 조선지부 조합원의 거의 대다수가 부산에 있었고, 연근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들도 강선이나 강화플라스틱(FRP)선으로 속속 대체되고 있었다. 목선 수리 조선소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산업의 미래를 생각하면 노동자의 단결을 넓히는 게 급선무라는 우리의 설득에 조선지부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가 ‘남의 조직을 먹겠다’고 덤빈 것도 아니건만, 반대하던 동지들과 비운 술병도 꽤 됐다.

실은 넘어야 할 고비가 하나 더 있었다. 교섭권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였다. 정 부장은 지부 산하 분회가 각각 교섭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우리는 지부도 그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맞받았다. 분회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지부가 제 역할을 하려면 이제껏 부산지부가 했던 것처럼 형식적으로 직인만 빌려 주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금속노조의 규약대로 지부와 분회가 함께 단체교섭을 하고 체결하는 방식, 즉 지부장과 분회장이 함께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봄에 시작한 논의가 장마철을 지나 한여름에 끝이 났다. 조선지부의 정남수 지부장과 간부들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정 부장은 끝까지 반대했다. 정남수 조선지부 위원장은 부산지역지부장과 조선분회장을 함께 맡게 돼 조직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정 부장은 그럴 수 없었다. 업종별 지부가 아니어서 제관분회는 조선분회로 통합해야 했고, 그에 따라 영세 조선소 제관공을 조직하는 사업이 한 풀 꺾이게 됐기 때문이다.

정 부장은 결국 “통폐합은 몇몇 사람의 사심 때문”이라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몇몇 사람’이란 권오덕과 나를 말하는 것일 텐데, 뜻밖에 정 부장이 고향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로 인해 자신의 뜻이 좌절돼 슬프다는 내용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나는 이 편지를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정 부장은 이로부터 2년 뒤 대동조선에 입사해 금속노조 대동조선지부 사무장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회사 노무관리 맡아 주면 어떻겠소?”
 
부산지부 통합을 앞두고 실무준비로 분주하던 차에 생각지도 못한 만남의 자리가 생겼다. 대동조선의 윤종근 회장이 나를 만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대동조선은 철공소도 운영하고 있었다. 윤 회장은 영도철공분회의 사용자단체인 조선기계협동조합의 이사장이었다. 만나면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꼭 보자고 연락이 왔다. 부산 남포동에서 만났더니 “정종 한잔 하자”면서 술집으로 향했다.

“박 사무장 얘기 많이 들었는데, 우리 회사에 와서 노무관리를 맡아 주면 어떻겠소?”
그때 대동조선이 좀 어려울 때였다.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한 윤 회장은 일을 매끄럽게 진행시킬 사람을 물색하던 중에 나를 찍은 것이다. 순간 놀랐다. 내가 그런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단 말인가? 나는 조선공사에서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고되고 구속됐던 저간의 사정을 다 말했다. 윤 회장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밝혀야 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곧바로 답을 드렸다.

“회장님,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제가 대동조선에 가면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까지 제가 해 왔던 일하고는 정반대의 일 아닙니까? 저는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사실 윤 회장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게다가 나이도 많은 분인데 젊은 사람이 단박에 거절을 하니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염려가 됐다.
“주변 사람들이 박 사무장이 내 제안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를 해 줬는데, 내 하도 탐이 나서 자리를 마련한 거요. 혹시 누가 안 됐는지 모르겠소.”

윤 회장은 거듭 미안하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회사 쪽으로 돌아서는 간부들을 가끔 본다. 이랬든 저랬든 자기 살 길을 먼저 생각하다 나온 결론이겠지만, 내 경험에 비춰 보면 유한계급(有閑階級)의 몸에 밴 ‘넉넉함’에 스스로 위축돼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마침내 열린 부산지역지부 대의원대회
 
1971년 8월15일, 뜻 깊은 광복절에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지역지부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지부 산하에 기아·한진기계·영도철공·조선 등 4개 분회가 있었고, 조합원은 1천500여명이었다. 기아분회는 영도에 있던 기아자동차 서비스공장이었고, 한진기계분회는 동래에 자리한 작은 섬유기계제작소였다.

지부장은 조선분회의 정남수씨가 맡았다. 부지부장은 조선분회의 김성보씨, 영도철공분회의 최용구씨와 권오덕이 됐고, 나는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로 했다. 기아분회와 한진기계분회에서는 사정위원, 지금 직함으로는 감사를 각각 1명씩 냈다.

조합원 기업별 지부가 있는 700인 이상 사업장을 제외한 부산지역의 금속 사업장은 몽땅 우리의 조직사업 무대가 된 것이다. 무턱대고 공장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아는 사람이 어느 사업장에 다닌다고 하면 그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분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동지들을 찾아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우리가 노조에 가입하면 법으로 보장된 것을 받을 수 있다고 운을 떼면, 반응은 대개 두 가지였다. 환영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그해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거센 도전을 뿌리치고 ‘3선 고지’에 올랐다. 같은해 12월에는 무시무시한 국가보위법이 통과돼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에 족쇄가 채워지던 때였다.

그래도 정의감 있고 패기가 넘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하나의 현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로 결심한 동지들이 여러 명 나올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모르게 했다. 이른바 ‘점조직’이었다. 그러다 절반 이상이 조직되면 공개했다. 그러나 사회는 점점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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