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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⑨[제3부]노동자가 되다 [제3편] 대학생을 꿈꾸는 노동자
조선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9년 신성철과 이상계 그리고 나까지 포함된 성적 우수자 3명이 조선공사 설계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기름투성이 현장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것을 학교 동기들은 부러워했고 집안 어른들도 안심하시는 눈치였다.

설계과에는 설계기사가 40~50명, 기능공이 열다섯 명쯤 됐다. 설계직으로 갓 발령을 받은 기능공들은 ‘사도(寫圖)’라고 도면 베끼는 일을 했다. 한 마디로 ‘인간 복사기’가 된 셈이다. 그 때도 복사기는 있었는데 훈련 삼아 시킨 것 같다. 설계과에서는 기능공들이 고참이 돼도 선박 설계에 접근할 수는 없고 기계부품 도면을 맡는 정도였다.

‘인간복사기’가 된 초짜 노동자

나는 돈을 벌게 되자 야간대학이라도 다녀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선기술고등학교 시절 영어와 수학 강의를 듣던 여명학원에 대학입시 야간반 등록을 했다. 설계과 근무는 잔업이나 철야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퇴근하면 바로 학원으로 달려갔다. 단과반 강의를 들을 때와 달랐다. 대학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느낌이었다. 학원을 마치면 통금시간에 쫓겨 영도다리를 날 듯이 뛰었지만 고단한 줄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 나는 무슨 대학을 갈 것이냐, 대학을 간다면 무슨 과를 갈 것이냐,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학을 나와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애시당초 있을 수도 없었다. 그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내게 요즘 말로 ‘역할모델’을 해줄 집안 어른이나 선배가 있었을 리도 만무했으니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젊은이의 맹목적 도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맹목적 도전을 마음껏 향유하던 기쁘고 행복했던 시간은 몇 달 가지 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부모님께서는 나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다. 셋째형이 대학에 다니는데, 나까지는 도저히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무리 내 힘으로 대학을 간다고 하지만 부모님께도 부담이 돌아갈 것이고, 무엇보다 실업률이 높던 때 국영기업체 정식직원이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한눈 팔지 말라는 뜻이셨다.

한숨이 나왔지만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 입시반을 그만 뒀다. 하지만 ‘대학’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갈 수 있으리라. 대학등록금이라도 먼저 마련해 놓자는 계산을 했다.

설계과 근무는 ‘설계’라는 고급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시간외 근로시간이 적었다. 또 같은 설계과 직원이더라도 나 같은 기능공들에게는 월급제가 아닌 일당제가 적용됐다. 허울은 좋은데 실속이 없는 곳이었다.

‘돈’을 생각하면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유리했다. 잔업과 철야를 해서 대학등록금을 모아 놓고 싶었다. 그 시절 조선공사 노동자들의 시간외 근로시간은 기본이 1개월에 100시간이었다. 잔업· 철야를 기를 쓰고 해서 150시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 그만큼의 일거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늦게까지 현장에 남아 계속 일을 했다.

몇 달 뒤, 잔업을 할 수 있는 산소공장으로 옮길 수 있었다. 산소공장에서는 기계를 통해 공기에서 산소를 분리해 용기에 넣어 관리했는데, 주야 12시간씩 교대근무였기 때문에 4시간 잔업은 ‘기본’이었다. 나만 잔업을 하고 싶어 했던 게 아니었든지 성적 우수자라고 설계과로 발령을 함께 받았던 신성철과 이상계도 얼마 있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어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시면서 9남매를 키우셨다. ⓒ 매일노동뉴스
산재 사고를 겪고


12월24일 자정을 넘어 25일 새벽이었다. 해방과 함께 들어 온 미군은 우리나라에 그들의 명절도 선물했다. 가난이 모두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들떠 있는 날이었다. 나는 산소엔진룸에서 철야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소 용기의 압력이 시간이 지나도 내려가지 않았다. 엔진룸에서 나와 보니 일정한 압력이 되면 산소통을 잠가야 할 담당자들이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 같은 날에도 서글프게 일하는 동료들, 그 기분은 나 역시 마찬가지. 동료들을 깨우지 않고 산소용기실로 들어갔다. 산소통 6개가 나란히 서 있고, 철판으로 산소통 주변을 막아 놓은 곳이다. 첫번째 산소통을 만져보니 따뜻했다. 산소가 많이 들어간 것이다. 두번째 산소통을 만지는 순간 불꽃이 확 일었다.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확 틀어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산소통의 밸브가 터져 버렸다.

산소만 있다면 불이 붙지는 않는다. 산소통의 밸브에 기름이 묻었던 것이다. 산소통이 현장에 들어가면 기름이 묻기 마련이고, 다 쓴 산소통이 산소공장으로 들어올 때는 다시 세척을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옷에 불이 붙었다. 주저앉아 불꽃으로부터 얼굴을 막았다. 다시 일어서려는데 다른 산소통의 밸브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산소통을 막고 있던 밸브의 파편들, 쇳조각들이 반대편 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만약 일어섰더라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겨우 기어 나오자 밖에 있던 동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몸에 붙은 불을 급히 껐다. 죽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화염을 깊게 마시지 않아 내상은 없었다. 얼굴에는 흉터가 남지 않았지만 팔은 상처가 커서 다리의 피부를 이식해야 했다. 영도에 있는 장외과에서 두 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

회사에서는 큰 사고로 여겼던지 신경을 써 주었다. 근로기준법에 정해진 대로 치료비와 휴업급여를 받았을 뿐이지만 집으로 전보를 쳐 주고 사무실 직원들이 병실로 찾아 와 인사를 했다. 회사 사람들이 내가 일을 하다 다쳤다고 고향 집으로 연락을 했다는데도 사천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코와 입만 겨우 내 놓은 채 온 몸에 붕대가 감겨 드러누워 있으니 회사 동료들은 물론이고 사무실 직원들, 심지어 같은 병실 쓰는 모르는 사람들도 혀를 차대며 안타까워 하는데 정작 집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니….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큰형님이 오셨다. 나는 볼멘소리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큰형님 하시는 첫 말씀이 ‘집에 소가 죽었다’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내 몸 상태는 묻지도 않고 죽은 황소 이야기부터 하시는 게다.

얼마 전부터 소가 시름시름 앓더니 내가 화상을 입은 날 전후로 소가 죽어 버렸단다. 시골에서 황소는 큰 재산이다. 대학 등록금에 농촌의 학부모들이 허리가 휜다고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라는 말이 생겼지만 거꾸로 소 한마리가 대학 등록금이었으니 소의 죽음은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나야 죽지 않고 살았고 치료만 잘 하면 괜찮다고 하니까 집에서는 수의사까지 불러 소의 죽음을 놓고 원인 규명에 들어갔다. 부검 결과, 소의 간을 옷 기울 때 쓰는 바늘이 찌르고 있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바늘은 여물통에서 섞여 들어 간 것으로 추정됐다. 집의 여자들, 어머님과 큰 형수님이 바늘 간수 잘못했다고 곤란을 겪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육군 3사단에 근무하던 시절의 모습. ⓒ 매일노동뉴스
4월 혁명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해가 바뀌어 1960년이 됐다. 나는 화상 치료를 끝내고 3월에 복직을 했다. 조선공사는 변함이 없었지만 조선소 밖의 세상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3·15 부정선거, 최루탄이 눈에 박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충격적인 사진, 학생들의 항의 시위…. 스물한 살 청년인 내 뱃속도 덩달아 꿈틀거렸다.

재용 형님이 열을 올리던 부정부패한 자유당 정권이 드디어 망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정말 하야를 하는 것일까.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이 때 재용 형님은 부산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도에 없었다.
사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궁금증과 호기심, 나도 뭔가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광복동으로 나갔다.

“살인한 경찰관을 처벌하라!”
“못살겠다 갈아보자!”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몽둥이를 든 경찰과 최루액을 뿌려대는 페퍼포그 앞에서도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휩쓰는 학생들이 대단해 보였다. 시위대에 끼어드는 것은 자유였지만, 그때만 해도 숫기도 없었고 ‘근로자’인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뛰어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때 내가 본 것은 ‘힘’이었다. 아니 내 눈에 비친 것이 ‘힘’이었던 것일까.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민초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이 일어서야 한다는 진리를 노동자인 나는 생각조차 못한 채 4월혁명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세상 분위기가 확 바뀌기 시작하자, 조선공사도 들썩거렸다. 전 조합원의 투표로 노동조합 위원장을 다시 뽑았다. 임한식씨가 당선이 됐는데 1958년 임금이 6개월 체불돼 있을 때 파업을 주도했던 그 분이다.

안타깝게도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데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해서 내가 조합원이었는지, 투표를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임한식 위원장은 기계부 출신이었고, 조선공사 노동조합 활동뿐만 아니라 주변의 철공소 노동자들을 노조로 묶어 내기 위한 활동을 했다고 한참 뒤 조선공사 선배들을 통해 들었다.

4월 혁명으로 고향 집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 해 12월 있었던 지방선거에 큰형님이 민주당 사천군 용현면 면의원 후보로 출마를 하셨다. 큰형님은 일제시대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가 되셨다. 해방이 된 뒤 귀향해서는 사천군의 수리조합에서 일을 하셨는데 마을사람들에게 ‘인물’로 인정도 받았지만 흔히 말하는 ‘야당’ 기질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나도 형님 선거운동 하느라 고향에 있는 동무들에게 큰형님에게 한 표 찍어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큰형님은 당선이 되셨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예정돼 있던 군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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