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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⑧[제3부] 노동자가 되다 [제2편] 조선기술고등학교, 그리고 여명학원
사천에서 진주로, 마산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 모두 여덟 시간이 걸려 부산 충무동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내 두 눈은 번쩍 뜨였다. 대도시란 게 이런 것인가. 어디서 그렇게 꾸역꾸역 모여들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 나는 주눅이 들기보다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드디어 나도 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는 느낌에 뿌듯해진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2의 고향, 부산 영도

때는 1956년. 동란 통에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피난 왔던 이들이 휴전이 되고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못한 이들이 많아서 부산은 전국 어느 도시보다 활기를 띠고 있었다. 전쟁 전 부산 인구가 50만명이었다고 하는데, 전쟁 뒤에는 200만명이 넘었다. 유명한 자갈치시장도 전쟁으로 팔도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노점을 펼쳐 놓고 장사를 한 데서 비롯된 곳이다.

어두워지자 도시는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보아도 울긋불긋한 불빛이 안 보이는 곳이 없었다. 남포동의 커다란 극장 간판도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기름기 섞인 바다 냄새마저 나를 설레게 했다. 배라고는 서너 발이나 됨직한 조그만 목선밖에는 모르는 내게 항구에 들어선 큰 배들은 경이였다.

그러나 도시는 곧 본색을 드러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에 퀴퀴한 하수구 냄새, 작은 일에도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 배고픈 눈동자의 아이들. 가난뱅이들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게 도시였다.

“재치국 사이소~”

‘재치국 사라’는 아지매들의 외침. 새벽을 알리는 소리다. 그 때만 해도 낙동강 물이 맑아 하류지역에서 재첩을 캘 수 있었다.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던 가난한 여성들은 강에서 캐어 낸 재첩을 밤새 삶아 우려낸 국물을 양철동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서는 골목골목을 다니며 팔았다. 그 시절 부산의 빼놓을 수 없는 정경이었는데 나는 처음 무척 의아했다. 재첩도 아니고 ‘국’을 돈을 받고 팔고 또 사 먹다니. 시골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에서 내가 살게 된 곳은 영도 봉래동이었다. 먼 친척, 굳이 따지자면 외숙모뻘 되는 분이 봉래산 아래 판잣집에 사셨다. 방 두 칸에, 그래도 화장실이 있는 집이어서 아침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나는 외숙모와 외숙모의 조카인 김재용 형님과 살았다. 나는 부산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던 재용 형님과 한 방을 썼다. 하숙비 요량으로 사천 집에서 쌀은 조금 보내주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내게 있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산 영도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재첩국’도 사고 파는 낯선 부산이었지만 친척집에서 살게 돼 ‘타향 설움’은 면할 수 있게 됐다. 피 한 방물만 튀어도 한 식구로 여기던 때였다. 외숙모는 전쟁 와중에 외삼촌께서 실종돼 홀로 되시고 부두에 나가 품을 팔아 생활을 하셨는데, 그런 와중에도 남편의 조카인 재용 형님 학비까지 보태 주셨다. 재용 형님이 수재라는 소리 들을 정도로 출중해서 온 집안 식구들이 합심해 ‘밀어준다’는 뜻도 있었지만, 힘들게 살면서도 피붙이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 매일노동뉴스


기계 보면 설레고 현장 가면 풀죽고

내가 다니게 된 조선기술고등학교는 해방 이후 일본인 기술자들이 빠져 나가자 전문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1952년에 설립됐다. 학비가 무료이고, 입학이 곧 조선공사 취직이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가난한 집안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입학한 1956년에 1학년이었던 학생은 스무 명가량 됐던 것 같다. 오전에는 국어·영어·수학이나 조선기술이론을 배우고, 오후에는 학교 실습장이나 조선공사 현장으로 실습을 나갔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조선공사에 기사로 들어온 분들이었다. 기술고시 1회 출신인 오경환 선생님,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나온 김태섭 선생님, 김호중 선생님, 담임선생님은 공작기계를 담당했던 김철영 선생님이셨다. 뒤에 오경환 선생님은 대한조선공사 설계부장으로 일하시다 사장이 됐다. 김태섭 선생님 역시 대한조선공사 사장과 대우조선 사장을 거치셨다. 김호중 선생님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선박 엔진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해양대학교에 재직하다 학장이 되셨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최고의 조선기술이론을 가진 분들에게 배운 것 같다.

선생님들은 아주 엄격하셨다. 전인교육보다는 기술교육 우선이었고, 선생님들도 교사가 본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꽤 무서워했는데, 자랑 같지만 모범생이었던 나는 선생님들의 귀염을 많이 받은 편이었다.

학교 생활에는 만족했지만 노동자라는 미래는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어떤 날은 학교 실습실에서 본 새로운 기계들이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지금은 낡은 기계로 치부되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선반·밀링 같은 기계들이 외국에서 갓 수입돼 학교 실습실에 놓여 있었다.

어떤 날은 현장의 실상에 풀이 죽기도 했다. 현장으로 실습을 나가보면 일거리가 없어 잡초들이 듬성듬성 나 있는 작업장도 꽤 됐다. 임금이 6개월이나 지급되지 않아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퇴근할 때 도시락 통에 돈 될 만한 쇳덩어리를 넣어 나가서 판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돌았다.

뒷날에야 알게 됐지만 1958년 조선공사는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의 임금 6개월치만 체불된 게 아니라 공장 전기요금까지 밀리는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350여년 전 거북선을 만들어 왜군을 격파했던 나라의 유일한 강선조선소인 조선공사가 왜 이렇게 됐을까?

출발부터가 서글펐다. 대한조선공사의 전신은 1937년 설립된 조선중공업주식회사로 일본인들이 주주였다. 한국인도 주식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분도 적었고 소수였다고 한다. 러일전쟁 이후 조선업에서 부동의 지위를 구축한 미쯔비시중공업의 기술 지도로 세워진 조선중공업주식회사는 초창기 수백톤급의 선박을 건조하다 일제 말기에는 1만1천500톤급 선박을 건조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해방 이후부터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미군정 산하의 기구가 시설 보호와 관리를 해 오다 1950년 반관반민의 합작회사인 주식회사 대한조선공사가 됐다. 하지만 동란으로 조선소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사실상 휴업 상태에 빠졌다.

1945년부터 1955년까지 10여년 동안 배를 만들지 못했던 조선공사는 일제시대 때보다 못한 건조 능력을 갖게 돼 버렸다. 말이 시설 보호와 관리이지 사실상 방치된 셈인데 그동안 망가진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이겠는가.

1955년이 되면 정부는 448만 달러(ICA 원조자금, 산업부흥국채기금, 정보 보유 달러)를 들여 연안 어업이나 도서 지역의 여객 수송을 뒷받침하기 위한 50~100톤급 목선 수백 척을 대한조선공사에 발주한다. 그리고 해무청이 한 해 한 척 10~20톤급 강선 해안순시선을 발주했다. 하지만 정부의 발주도 1957년이면 끝이 난다. 자금이 고갈된 것이다. 1950년대 이후 대한조선공사 사장을 역임한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으로 전문경영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데다 공금유용 문제가 심각했다.

1958년 말에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서 조선공사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했는데, 막대한 적자에도 공사 이사진에 의한 이익배당금 우선 계상, 현찰 재산을 회사 명의가 아닌 제3자에 위탁관리하는 불법 자행, 자재구입자금 유용 및 과도한 찬조금 지급, 조선업무와 무관한 건물과 부동산의 과도한 소유 등이 지적됐다고 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지경이었다.

ⓒ 매일노동뉴스

재용 형님

그 시절 나의 하루는 조선기술고등학교에서 끝나지 않았다. 학교가 파하면 나는 부리나케 입시학원으로 달려갔다. 조선공사가 있던 영도에서 남포동 미화당백화점 건물에 있던 여명학원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학원비는 현장으로 실습가면 나오는 돈을 모아 충당했다. 버스비가 1원인가 2원 했는데 버스 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대학의 문과 가까워진다는 의미다. 조선기술고등학교에서도 국어·영어·수학을 배웠지만 대학에 도전하기에는 부족했다. 영어와 수학 단과반을 들었다. 한창 잠이 많을 나이인데도 흥분과 긴장감 때문인지 졸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산으로 올 때 조선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독학을 하든 학원에 다니든 대입 자격 검정고시를 준비해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할 작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부모님의 마음도 달라질 것이고, 학비는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행님, 이 문제 함 풀어 주이소.”
재용 형님에게 수학 문제를 내밀었다.
“니 이라다가 코피 터지는 거 아이가? 밥이나 묵고 하자.”

외숙모님이 일 나가셔서 안 계실 때면 재용 형님과 같이 밥을 지어 먹었다. 그 시절에는 풍로를 썼기 때문에 밥 짓는 시간도 꽤 오래 걸렸다. 풍로의 연료는 톱밥이었는데, 변두리에 있던 제재소까지 걸어가 톱밥을 사 와서 풍로를 돌렸다. 톱밥 타는 연기에 눈물범벅이 됐지만 밥맛은 좋았다.

형님은 밥을 먹으면서 내게 사회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관한 성토가 주를 이뤘다. 정치학도였던 재용 형님은 비판의식과 정의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형님을 따라 재부산 삼천포향우회에도 몇 번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대학생들은 굉장히 진지했다. 앉으면 시국 걱정이었고, 못사는 농촌 걱정이었다. 그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대학생 형님들의 이야기를 어깨 너머로 들으면서 내게도 약간의 사회 비판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부산에만 오면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 손을 꼽던 나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말고는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생각조차 못했는데, 재용 형님 덕분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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