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상황에 놓인 환자에게 남북 간의 장벽은 너무 높다. 금강산에서 독한 술 3병을 먹고 알코올성 쇼크에 빠진 한 건설 일용노동자가 남한의 큰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해 그대로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재판부는 회사가 노동자에 대한 보호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40%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다.

들쭉술 3병에 쓰러진 건설 노동자

에머슨퍼시픽은 현대아산으로부터 금강산관광지구 고성봉 일대에 골프장을 비롯한 부대시설을 건설·운용 업무를 맡은 회사다. 이 회사는 2005년 12월30일, 남북경제협력사업승인을 받아 강원도 북 고성군 온정리 약 50만평에서 직원 20여명과 건설 일용직 30여명을 투입했다. 에머슨퍼시픽은 독자적으로 노무관리를 하면서 골프장·리조트 건설공사를 진행했다.

고아무개씨는 2007년 7월29일부터 9월19일까지 약 두 달간 에머슨퍼시픽 금강산 공사현장에서 일하기로 하고 북측으로 갔다. 계약기간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9월15일 고씨는 콘크리트 평탄작업으로 허리가 너무 아파 작업에 나가지 않겠다고 신고했다.
두 달 가까운 객지생활에 몸까지 아프자 고씨는 술 생각이 절실했다. 그는 사흘간 식사 대신 술만 마셨다. 알코올 도수 40도짜리 들쭉술 3병(약 2리터)을 다 마신 고씨는 16일 오후 1시부터 심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 그의 동료들이 회사에 고씨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회사는 반나절 가량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고씨가 화장실에서 기어나올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오후 6시가 넘어 작업반장과 동료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고씨는 의식이 혼미하고 심한 저혈압 증상을 보였다.

금강산병원 의사는 고씨의 상태가 위중하다며 남측의 상급병원으로 전원을 요청했다. 북측과 월경에 대한 교섭권한이 있는 현대아산 소속 안전담당자는 북측 협조를 얻기 위해 수 차례 무전연락을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각 의사는 고씨가 알코올 과다섭취에 따른 구토와 탈수증상에 의한 쇼크로 판단, 산소공급장치를 부착하는 등 응급조치를 했지만 결국 이날 자정 고씨는 심장정지로 사망했다.

노동자 보호의무 위반한 회사도 과실

이 사건의 원고는 고씨의 유족이고 피고는 에머슨퍼시픽주식회사와 현대아산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에머슨퍼시픽은 고씨의 유족이 청구한 위로금의 40%인 9천178만5천원을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에머슨퍼시픽은 소속 근로자들이 근무하는 장소는 북측 금강산지구라는 특수한 장소적 제한이 있고, 남북의 출입이 쉽지 않다. 근로자들이 남측으로 돌아올 때까지 가능한 근로자들의 건강장해를 예방하고 생명보전과 안전‧보건을 유지하도록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소속 근로자가 숙소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건강이상이 발생했는데 그대로 방치했다. 병원에 너무 늦게 이송한 탓에 고씨가 사망했으므로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할 책임이 있다. 다만 고씨가 식사도 거른 채 술을 과도하게 마셔 건강이상이 생겼으므로 회사의 책임을 40%로 제한한다.“

산업안전보건법 제5조 1항은 사용자는 근로계약에 수반되는 신의칙상 부수적 의무로 피용자가 노무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생명·신체·건강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인적‧물적 환경을 정비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보호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보호의무를 위반했을 경우 피해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서 금강산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과음은 노동자의 실책이다. 하지만 회사는 노동자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외출시에는 외출증이나 관광허가증을 발급해 관리했다. 재판부는 “고씨는 오로지 에머슨퍼시픽의 보호 아래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건강이상 사실을 알았다면 즉시 치료를 받도록 할 보호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응급환자를 방치해 병원에 뒤늦게 옮긴 것은 이러한 보호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관련 판례
서울중앙지방법원 2009년 6월30일 2008가합94733 손해배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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