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회복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다. 87년 6월항쟁으로부터 22년이 지났지만, 시민들이 내건 정치적 구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소통의 부재’를 토로한다. 말이 안 통하니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것 아니겠냐는 지적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경험한 시민들이 “줬던 것 빼앗지 말라”며 다시 광장을 찾고 있다.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법학)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칠지 생각하면 암울”


민주주의의 회복을 바라는 목소리가 뜨겁다.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식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는데, 정권이 기본도 못 지켜서 나타난 현상이다. 70~80년대에나 나올법한 구호가 다시 나오고 있다.
현 정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희생을 당할지, 우리사회가 얼마나 더 소모전을 겪어야 할지 걱정스럽다. 정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막가파’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강희남 목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앞으로 얼만큼의 희생이 더 남았을까 생각하면 암담하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소통의 부재’다. 인터넷이고 뭐고 정부가 다 방해하고 있지 않나. 정부가 하도 막가파처럼 나오니, 시민들이 몸으로 부딪히려고 광장에 모여드는 것이다. 언론매체가 다양해졌지만, 정부는 예전보다 더 교활한 방식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
대화와 합의를 통한 소통과 화합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 즉, 국민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야 한다. 대화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에게 색깔론을 덧씌우는 것은 치졸하다. 정부가 진정성을 갖고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국민들을 계속 무시하면 굉장히 불행한 사태가 도래할 것이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독어독문)
“다시 ‘벽돌’을 깨자”




독재정권 하에서든 민주정권 하에서든 일반 국민들은 편안하게 잘 산다. 어느 시대나 저항하는 사람들이 고통받게 돼 있다. 우리사회를 보면 저항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게 형성돼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정서가 ‘행동’으로 이어지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공안정국이 조성되면 국민들은 움츠러든다. 87년 6월항쟁과 현재를 비교할 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일까. 나는 87년 그때처럼 지금도 ‘벽돌’을 깨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시위현장을 지켜보며 ‘참여했다’고 안심하는 것은 한심한 얘기다. 지난해 촛불시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정부는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폭력시위가 싫다면 그냥 깨지는 것도 괜찮겠다. 참다참다 보면 계기는 만들어질 것이다.
6월항쟁이 일어난지 22년이 흘렀다. 최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이화여대에서도 52명의 교수가 동참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화여대 내 시국선언에 참여하지 않는 교수가 700명이 넘는다”고 할 것이다. 완전히 틀린 지적도 아니다. 침묵하는 다수, 탈정치를 외치는 다수가 사실은 진짜 정치를 하며 정부를 돕고 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해 ‘뒷북친다’는 비판이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옳은 지적이다. 87년 때에도 교수들이 제일 늦게 움직였다. 단, 일회성 선언에 그치지 않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다. 다음번엔 거리에서 시민들을 만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김형탁 전 사무금융연맹 위원장
22년전 넥타이부대를 움직인 건 ‘정의감’




벌써 22년이 흘렀다. 당시는 군사독재 하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조차도 기대할 수 없던 때였다. 박종철·이한열 등 학생들의 죽음이 촉매제가 돼 시민들의 울분이 터져나왔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외치는 ‘민주주의’는 22년 전의 그것보다 나은 것이어야 한다. 22년 전의 움직임이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지금은 경제위기하에 생존권을 위협받는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만으로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기는 어렵다. 추모 분위기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국면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22년전 을지로 금융가의 넥타이부대들이 명동성당으로 모였던 이유는 ‘정의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억울렸던 시절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터져 나왔는데, 하물며 절차적으로 완성된 민주주의를 경험한 시민들이 현 정부의 폭력적 행위를 용납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모면하거나, 입을 틀어막는 정부의 대응방식은 국민들의 반발심만 키울 것이다. 시대를 역행하고 민심을 읽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는 ‘늘 위기에 빠졌던 정권’으로 기억될 것이다.


구교형 목사(성서한국 사무총장)
“대통령 회개하시오”




성경에서 말하는 최소한의 인권도 상실되고 있는 위기정국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열린 마음이 없기 때문에 소통도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자신이 애초에 품었던 시나리오를 전혀 바꾸지 않겠다는 의지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법에 보장된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나를 지지한 다수의 뜻을 받아 소신껏 하겠다”는 태도는 ‘제왕적 권위’로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들이 등을 돌리고 거리로 나서고 있지 않나. 이제 우리나라 국민들은 답답한 일이 생길 때마다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의사표현의 방식이 극히 제한돼 달리 방법이 없다. 소모적이고 낭비적이고 답답한 거리정치의 시대가 돼 버린 것이다.
현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는 구호 말고는 아무것도 준비 하지 않은 것 같다.
목사로서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 마디 하겠다. 지하철역 같은 데서 신자들이 많이 외치는 말 중이 이런 게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악한 계획을 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안다면, 회개하고 의로운 정치를 펴기 바란다.


김소연 시인(한국작가회의)
분노와 슬픔은 사람을 움직인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국민들은 늘 광장에서 살았다. 최근 들어 광장을 찾는 이가 많아진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분노만으로 움직이지 않던 사람이라도 슬픔을 느끼면 움직이게 돼 있다.
나는 80년대에 대학에 다녔다. 민주주의가 그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9일 대한문 앞에서 작가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자연스럽게 서울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걸어간 것에 불과한데 경찰이 막아나섰다. 국민들의 말할 권리를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다. 미디어법도, 미네르바 사건도 다 마찬가지다.
말을 못하게 하니 몸으로 때울 수밖에. 오히려 몸으로 하는 것이 효과가 나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따질 때, 전화로 하는 것 보다는 직접 가서 한 판 하는 것이 낫지 않나.
80년대에는 우리가 구경해보지 못한 민주주의를 바랐다. 이명박 정부에 표를 몰아준 사람들도 어쨌든 더 좋은 세상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손에 쥐었던 것을 빼앗기고 보니, 울음이 나는 상황이다. 정부는 국민들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곽예신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
민주주의의 포괄적 파면 ‘우려’


민주주의가 포괄적으로 파멸되고 있다. 법이 정권의 유지수단이 되고, 사법부는 정권의 하녀 취급을 당하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성이 훼손된지 이미 오래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박탈되고 있다. 노동자와 철거민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 전 대통령마저 죽음을 택했다.
학생들이 도서관을 지키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인터넷이든 언론이든, 국민들의 여론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정부의 의해 그렇게 돼 버렸다. 말이 통하는 정부였다면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안탄압에 맞서 실천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현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에 대한 불신도 크다. 4대강 정비사업과 부자감세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민주주의를 바라는 국민들의 목소리 자체를 차단하려는 정부의 태도가 가장 문제다.
 
 
<2009년 6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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