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용어에서 흔히 쓰이는 말 가운데 ‘기왕증(旣往症)’은 과거에 환자가 앓았던 병력을 의미한다. 업무상재해 여부를 가리는 데 있어 기왕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질병이나 외상이 실제 업무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개인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정확히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병력이 있는 노동자가 사업주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던 중 갑작스런 질환의 악화로 변을 당했을 경우 업무상재해 판단기준은 무엇일까.

뇌종양 환자가 의식불명 상태에서 입은 화상

뇌종양을 앓았던 이아무개씨는 2003년 12월1일 경기 포천군 소재 ○○상사에 입사해 오락기 조립공으로 근무했다. 이씨는 입사 한 달 만인 12월30일 회사의 정문 앞 컨테이너 안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는 그에게 뇌종양·간질·간기능 부전·급성 신부전 진단을 내렸다. 배와 엉덩위 부위에 2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병원에 후송되기 하루 전인 12월29일 그는 사업주의 지시로 제품을 하차하기 위해 컨테이너에서 대기 중이었다. 다음날 오전 10시 동료 직원 하아무개씨가 컨테이너 안에서 피가 묻은 채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지만 하씨는 ‘간밤에 누구와 싸웠나 보다’라고 생각해 이씨를 그대로 방치했다. 하씨는 오후 4시30분까지 이씨가 깨어나지 않자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후송했다.
이씨가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 이유는 평소 앓았던 뇌종양이 악화돼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씨는 난방시설 과열로 화상까지 입었다.

뇌종양은 개인질병, 화상은 업무상질병

이 사건의 원고는 이아무개씨, 피고는 근로복지공단이다. 이씨는 사업주의 지시로 퇴근시간 이후 숙소에서 대기 중에 재해를 입었다며 산재보상을 요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이 평소 앓던 뇌종양이 악화돼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업무와 관련이 없다며 이를 거부하자 이씨는 소송을 냈다.

서울행정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배부 2도 화상·간기능 부전·급성 신부전에 대한 공단의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하고 소송비용의 40%는 원고가, 60%는 피고가 부담하도록 했다. 판결요지는 이러하다

"작업시간외 사업주가 제공하는 숙소나 시설에서 발생한 재해가 업무상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사용자의 지배·관리에 따른 업무수행성이 인정돼야 한다. 사업주가 관리하고 있는 시설의 결함 또는 사업주의 시설 관리소홀로 인해 재해가 발생했다는 등의 업무기인성, 즉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까지 인정돼야 한다.

이 사건에서 원고는 뇌종양으로 간질발작을 일으킨 후 의식소실 상태에서 고온의 방바닥과 장시간 접촉했다. 이로 인해 배부에 2도 화상을 입었고, 저혈압과 혈장량 감소에 의해 간기능 부전과 급성 신부전 상태에 빠졌다. 비록 뇌종양으로 인한 발작 때문에 화상을 입었지만 컨테이너 난방시설에 하자가 있었으므로 업무상재해에 해당한다. 다만 뇌종양·간질은 자연적인 진행경과로 업무와 관련이 없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이씨가 평소 앓았던 질환인 뇌종양과 간질은 업무상재해에 해당하지 않지만, 화상과 간기능 부전·급성 신부전은 컨테이너 결함 또는 관리소홀로 인한 업무상재해라고 판시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에는 작업시간외 사고에 대해 ‘사업주가 관리하고 있는 시설의 결함 또는 사업주의 시설 관리소홀로 인해 재해가 발생한 경우’를 업무상재해로 인정한다.
여기서 시설물 하자 및 관리책임의 범위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업주의 의무로 민법상 규정보다 폭넓게 해석한다. 따라서 기왕증이 있는 노동자의 재해도 사업주의 시설물 관리소홀 사실이 인정된다면 산재로 보상받을 수 있다.

<관련 판례>
서울행정법원 2005년 2월4일 판결 2004구합21661 요양불승인처분취소
  
 
<2009년 4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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