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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구로공단’ 사람들일은 다르지만 사는 것은 매한가지

‘구로공단’이 아닌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들은 누굴까.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7일부터 24일까지 공단 일대를 돌며 만나본 노동자들은 다양했다.



70년대 지어져, 이제는 ‘고색창연’한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는 언제 공장이 헐리게 될 지 노심초사했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석 달에 한 번씩 면접보고 직장 옮기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자신이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따져보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끼는 노동자도 있었다.


이방인에서 이제는 가리봉동의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했다. 점점 일자리가 사라지고 환율까지 천정부지로 올라 살 길이 막막하다고 했다.


'밥 먹듯' 야근을 하는 벤처기업 서른 살의 젊은 노동자는 45세면 사실상 오는 정년퇴직을 걱정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김밥 한 줄로 아침식사를 대신하는 벤처기업에 IT노동자들은 동료들과도 단절된 '외로운 노동'을 하고 있었다.


가리봉시장의 주인은‘중국인’인 듯 했지만 이제 이‘중국인 주인’들마저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사진=정영현 기자


#1. 15년째 조립공인 차영숙씨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 371-41번지에 자리한 한국음향 공장은 ‘독도’다.


앞으로는 15층짜리 우림라이온스밸리 3개동이 펼쳐져 있고, 왼쪽은 23층짜리 신축 아파트형 공장이, 오른쪽은 LG전자 공장이 한창 공사 중에 있다. 사방이 고층빌딩으로 둘러싼 한가운데 2층짜리 벽돌건물이 오도카니 자리하고 있어, 한국음향 노동자들은 ‘독도’라고 부른다.


‘채용공고’가 멋져보여서 한국음향에 입사했다는 차영숙(53)씨는 올해로 15년째 차량용 스피커를 조립하고 있다.


“시골에서 살다가 93년에 아이들하고 옷가방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왔어요. 처음엔 보험회사피서 3년 정도 일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 그래서 온 게 구로공단이야. 그때는 공장마다 정문 앞에 사원모집 공고가 붙어있었거든요. 다른 곳은 다 종이쪼가리였는데 한국음향만 유독 입간판에 번듯하게 붙여났더라고요.”


영숙씨가 처음 공장에 들어왔을 때와 지금은 모든 게 달라져있다. 그때는 모두 ‘아가씨’들만 있었다. 아줌마사원 영숙씨가 들어오고 난 뒤로는 전부 ‘아줌마’만 들어왔다. 3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출근할 때면 정문은 북새통을 이뤘다. 중국에, 인도에 하나 둘 공장이 들어서면서 절반이 줄어들어 이제는 120명밖에 남지 않았다. 중국에서 온 11명의 외국인노동자와도 5년 정도 같이 일했다.


매일 피곤의 연속이던 잔업도 사라졌다. 물량이 없단다. 기본급 30만원에 한달 84시간 잔업수당을 더 해서 50만원 받았던 월급은, 잔업이 없어도 120만원 정도다. 휴일 특근비가 7만5천원이어서 꽤 짭짤한데 가뭄에 콩 나듯 한다.


“구로공단 처음 와서는 사촌언니 집 옥탑방에 살았는데 지금은 연립주택에 살아요. 사는거야 늘 빠듯하지요. 그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다 커서….”


영숙씨는 얼마 전 회사동료들과 1박2일로 남도 답사여행도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우먼세븐’이라고 불리는 7명의 멤버들과 2003년부터 한달에 5만원씩 모은 곗돈으로 내년에는 중국여행도 계획하고 있다.


그런 영숙씨도 걱정은 있다. 지금은 ‘독도’가 된 한국음향은 불과 10년 전만해도 전형적인 구로공단 입주업체였다. 73년 재일교포가 설립한 전기전자업종으로, 한때 사원이 999명에 달한 적도 있다. 영숙씨는 이웃 공장들이 하나, 둘 헐리고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영숙씨 뿐만 아니라 대다수 한국음향 노동자들은 아파트형공장이 늘어날 때마다 불안해한다. 공장이 언제 저렇게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서 회사와 고용보장 협약도 맺었지만, 평당 1천500만원까지 올라간 공장부지 5천평만 팔아도 120명 직원들의 명예퇴직금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애들 공부시키느라 아직 노후대책은 못 마련했는데…. 사실 여기저기에 빌딩 올라가는 걸 보면 가슴은 무너져요.” 영숙씨의 씁쓸한 한마디다.


#2. '3개월 파견인생' 조대경씨와 또 다른 비정규직들


지금은 기획사에서 편집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조대경(36)씨는 2006년까지 구로공단 노동자였다.


“1년 동안 옮겨다닌 직장만 3개”라고 말하는 지영씨는 “면접 보는 게 지긋지긋해서” 구로공단을 떠났다. 처음에는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 있는 핸드폰 하청회사였다. 정규직은 아니고 용역업체를 통해 들어갔다. 처음에는 용역회사인지도 몰랐다. 인터넷 구인광고를 보고 연락했더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면접을 본 다음날 지영씨처럼 이력서를 내고 온 다른 사람 10여명과 봉고차를 타고 이 회사로 왔다. 지영씨는 이곳에서 또 면접을 보고 통과했다. 하는 일은 검은 장막 속에서 형광등 하나 켜 놓고 핸드폰 액정필름을 조립하는 업무였다. 석달 간 수습기간을 거치면 정사원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석달이 흐르니 물량이 계속 줄고 사람도 줄었다. 정규직 전환은 물 건너가고 얼마 후 지영씨는 사직서를 냈다.


다음에 들어간 공장은 반도체회사였다. 똑같은 방식으로 면접을 거치고 들어갔다. 시급 5~6원 수준의 처우도 비슷했다. 6개월 만에 그만 뒀다. 물량이 줄면서 야근수당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역업체로부터 소개받은 곳이 주‧야간근무 가능자를 뽑는 안테나제조 공장이다.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서 오후 6시30분에 일이 끝난다. 2~3시간 정도 잔업을 하고 일요일에도 일했다. 한 달에 1번 쉬면서 130만원을 받았다. 잔업‧특근수당이 있어 주머니 사정은 좀 나아졌지만 3개월마다 부서가 바뀌었다. 계속 사람을 돌려쓰니 직원들이 못 버텼다. 지영씨도 1년이 지나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ㅎ공장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는 조순례(가명‧59)씨는 자신이 일용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정규직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월급통장에 ‘디씨푸드’라고 써 있는데 회사에 가본 적은 한번도 없다. 다만 급식을 전문으로 하는 체인업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같이 일하는 금영자(가명)씨는 ‘파트타임’이라고 했다.


“순례언니는 월급으로 꼬박꼬박 나오는데, 저는 공장이 창립기념일이다 뭐다 해서 쉬면 그날 일당은 안 나와요. 근무시간도 다르고요.” 순례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하지만, 영자씨는 오전 9시에 나와 오후 3시에 퇴근한다. 그래서 영자씨는 오후 4시부터 마포에서 파출일을 한다. 그런데 둘다 4대보험은 회사에서 내준다.


2년3개월째 영양사로 일하고 있는 이은영(23‧가명)씨도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헛갈리기는 마찬가지다. 은영씨는 “연봉제인데 그것도 비정규직인가요?”라고 되물었다.


순례씨나 영자씨, 은영씨 모두 본인이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 따져보려다 관둔다.


“머리만 아프지 우리끼리 얘기한다고 아나. 뭐. 그것 말고도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원래 ㅎ공장 식당에는 영양사와 조리원 4명이서 일하다 지난해부터 3명으로 줄었다. 원래는 중식과 석식 300끼를 만들었는데 잔업이 없어지면서 석식도 사라졌다. 끼니 수가 당장 월급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끼 2천600원이던 단가가 올해 2천700원으로 130원 올랐지만 임금은 그대로다. 회사매출이 떨어지니 월급 올려달라는 말은 입도 뻥긋 할 수 없다.


구로공단은 한 공장에서 청소미화업무를 맡고 있는 정현임(65)씨는 용역회사 대화산업 소속이다. 같이 일하는 경비아저씨는 또 다른 용역회사에 적을 두고 있다. 영임씨는 구로공단에서만 2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87년 입사한 자동차부품회사인 한국마벨이 첫 직장이다. 회사가 경기 수원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관뒀다. 한국마벨 공장부지는 지금은 중앙만민교회 별관으로 바뀌었다. 입사 당시 월급은 1만3천원. 97년 퇴사할 때는 한달에 140만원 정도를 받았다. 지금은 딱 최저임금만큼만 받고 있다. 월급이 적지 않냐는 질문에 현임씨는 그저 “이 나이에도 일하는 게 어디냐”며 웃었다.


#3. 매일매일 방세 걱정, 중국동포 김근옥씨


중국동포를 만나러 구로5동 ‘가리봉종합시장’을 찾았다. 시장에는 식당, 술집,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즐비했다. 여느 시장거리의 풍경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식당 유리에 붙어있는 메뉴판은 중국어다. 복(福)자를 반대로 붙이는 것이 중국의 관습이라고 하는데, 복권을 파는 상점 간판도 반대로 붙어 있었다. 중국인 위주의 상업이 흥행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듯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국인 노동자 ㄱ씨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2번째 왔다고 했다.


“올해 1월 재입국했어요. 한국에서 비자가 끝나 중국으로 돌아갔을 때 ‘한국에 가지마’라는 가족들의 권유가 있기는 했죠. 하지만 돈을 벌려면 별 수 있나요. 그래서 다시 한국에 나왔어요.”


하지만 다시 돌아온 한국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위안화대비 환율가치가 떨어졌고, 중국 내 물가도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ㄱ씨도 이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집에 붙여주던 돈을 석 달에 한번 꼴로 바꿨다.


“지금 한국돈 2만원이면 중국돈 100원정도 해요. 위안화 100원에 중고 자전거하나 살 수 있었는데 요즘은 옷이나 한번 사 입을 수 있을지…. 한달 80만원 남짓 버는데 이거가지고 제 한달 생활도 힘들어요. 그래서 최근 중국사람들도 돈을 벌러 한국에 간다고 하면 회의적으로 생각해요. 이 때문에 제 주변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와 아주머니들도 대부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가리봉시장의 주인은 ‘중국인’인 듯 했지만 이제 이 ‘중국인 주인’들마저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가리봉시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지나 구로5동으로 접어들었다. 미리 약속이 된 중국동포 김근옥(69)씨와 이상남(76)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급격한 경사를 오르거나 내려야 했고, 가로등조차 없는 골목을 찾아 헤매야 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반지하 방이었다.


반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도 바로 방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또 2개의 집으로 나눠져 있었다. 자물쇠 하나로 방범 장치를 해 놓은 왼쪽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씨는 지난 2003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일궜던 땅을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인에게 빼앗겨 돈을 벌기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씨는 국적을 취득해 중국에서 아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러나 최근 국적을 취득했지만 아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지난 2006년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아들이 불법체류자로 잡혀 중국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에 5년이 지난 뒤 들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볼 수 있는 날까지 3년여가 남았다.


“빨리 돈 벌어서 아들도 부르고 해야 하는데 아픈 몸인데다가 나이도 많으니 누가 일자리를 주겠어요. 이 친구(김근옥씨)는 지하철에서 신문을 줍지만 한달 많이 주워야 30만원이고 저는 국가보조금 20여만원이 다 방세로 나가는 걸요.”


무엇보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정된 집이였다. 김씨가 살고 있는 집의 경우 500만원 보증금에 5만원의 월세를 낸다. 하지만 보증금이 없어 부동산에서 보증금을 빌려 월세를 낼 때 이자를 함께 낸다고 했다. 지난 5년간 일해 보증금을 300만원을 갚았다. 부동산에 주는 이자와 함께 한달 방세 17만원씩을 냈지만 최근에는 10만원을 낸다. 이씨는 100만원 보증금에 월 23만원 냈지만 최근 주인집이 보증금 100만원을 더 올리고 24만원을 요구했다.


“당장 보증금이 없어 월세가 비싸도 보증금이 싼 집을 구했는데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더 저렴한 집을 알아봐야 해요. 새터민들에게 지원을 해 주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일정 금액을 지원해 주거나 무보증 대출을 은행에서 해주는 정책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달 벌어도 밥 한번 넉넉하게 먹지 못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더구나 겨울까지 오고 있어 난방비도 걱정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희망은 있었다. 이씨는 건강한 몸으로 아들을 보는 것이고, 김씨는 손수 지은 시를 책으로 출판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자기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봉제∙전자기기부품 공장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지방으로 옮겨갔다.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은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는 영세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사진=정기훈 기자


#4. 밥 먹듯 야근 IT노동자, 황규관씨


구로디지털단지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 황규관(30)씨. 그가 2년 전 잡은 첫 직장이 있는 곳이 구로디지털단지였다. 같은 직장에 2년을 다녔으니 이젠 익숙할 법도 하지만, 그는 "아침 출근길 검은 물결이 출렁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2번 출구와 3번 출구 사이에는 '출퇴근 시간엔 사람이 많으니 2번 출구를 이용해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번 출구 계단을 내려와도 열 걸음만 걸으면 3번 출구 계단 앞이다. 그런데도 3번 출구로 사람들이 몰린다. 황씨는 "누구보다 늦으면 죽는다는 경쟁 분위기에 열 걸음의 느림도 용납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황씨는 구로3동에 위치한 사규를 전산화하는 업체인 '(주)엠텐'이란 회사에서 개발부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산업공학과를 전공한 그는 방위산업체에서 병역을 마치고 한 선배의 소개로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입사했다. 출근 시각은 오전 9시 퇴근시각은 오후 6시. 물론 지켜지지 않는다. 격주로 5일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오후 6시에 퇴근한 기억이 없어요. 프로젝트 막바지면 야근도 허다하죠. 아예 프로젝트 계획단계에서부터 노동자들이 야근할 걸 계산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기한 내에 프로젝트를 맞춰야 하는데, 없는 걸 만들어 낸다는 일이 여간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담배와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한다.


그가 가장 힘들 때는 '대타'로 투입되는 순간이다. 프로그래머 한 명이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해 떨어져 나가면 같은 회사의 프로그래머가 긴급 투입되는 것이다. 매일 야근은 이때부터 거의 매일 시작된다.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45세가 정년퇴직하는 나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력이 쌓이면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하는데, 사실 신입사원들의 기술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회사 입장에선 돈 조금 들이는 신입사원을 뽑기 마련이다. 구로디지털단지 안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래서 저임금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에 빠져 있는 셈이다.


노동계에선 IT노동자 특히 벤처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조직화사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일하는 습관 자체가 그래요. 혼자 일하고 혼자 쉬다보니 누군가와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죠."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그도 업무를 시작하면 귀에 이어폰을 꼽는다. 이직률이 높아 같은 직장 안에서도 동료들끼리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일도 드물다고 한다. 연봉 2천200만원 받는 그. 야근을 밥 먹 듯 하지만 야근수당이란 건 없다. 회사가 주는 연봉 안에 각종 수당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황씨는 '구로청년회'에 가입해 지역 봉사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봉사활동을 하다 맘에 맞는 여자친구를 만났고 4개월째 교제중이다.


그런 그에게 꿈을 물었다. '신기술로 인정받는 벤처기업 사장이 되고 싶다'는 말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매일매일 잘 버티고, 나중에 가정을 잘 꾸려서 사는 게 꿈입니다." 매일 아침 '검은 물결'에 치이고 야근에 눈 아래가 푹 파인 황씨는 그렇게 회색빛 '꿈'을 이야기했다.


이주노동자 10명중 2명 사무실·가건물에서 잔다
가리봉 동포타운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이주노동자 집단주거지다. 최근 서울 논현동 ㄷ고시원 방화사건으로 많은 중국동포가 사망하면서 이들의 주거환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정부는 대책마련은 고사하고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3일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지역사무소가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 837명을 대상으로 한 부산지역 내 이주노동자 인권실태 조사결과’를 보면 68%가 회사 기숙사에 살고, 나머지 20%는 사무실이나 가건물에서 잠을 잔다고 응답했다.


기숙사에 사는 이주노동자 10명 중 6명은 감방(2.71제곱미터)보다 좁은 곳에서 지내고 있다. 합법 이주노동자들의 살림살이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33만명(2007년 기준)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국가인권위가 지난 2002년 발표한‘외국인노동자 인권실태조사’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 8명 중 1명은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는 쪽방에서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외국인지원센터 관계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경우 수시로 진행되는 단속으로 전∙월세 같은 안정적인 주거환경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설사 구했다 해도 강제추방에 걸리면 보증금조차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주노동자의 주거실태에 대한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지난해 국정원은‘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주거상황∙수입∙취업형태 등에 대한 전국적인 실태조사가 시급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광영 국가인권위 부산사무소장은 “이주노동자들의 작업현장과 거주지에 대한 당국의 실태조사와 지도점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공장노동자 보고 시작한 슈퍼마켓 “힘들다 힘들어”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 먹거리길에 있는 태평슈퍼. 주변으로 네온사인으로 만들어진 간판들이 번쩍였지만 태평슈퍼는 80~90년대 시절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간판을 걸고 있다. 지난 90년대쯤 대형할인마트가 들어서기 전 골목에 하나씩 있었던 구멍가게의 모습이다.



가게는 김영환(가명․52)씨와 그의 아내가 번갈아가며 자리를 지킨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그만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다. 한편에는 주전부리를 포함한 여럿 잡화들이 쌓여있다.



김씨는 제조업 공장에서 관리직으로 15년간 일한 뒤 5년 전 이 슈퍼마켓을 인수했다.



“처음 가게를 인수할 때 주변으로 공장이 많았어요. 여기서 5분만 걸어가면 주택가가 많이 있지만 그 주변에 가게를 낼 생각을 없었어요. 주변 공장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장사를 시작했고, 솔직히 벌이도 괜찮았어요.”



가게를 인수하자 주변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공장이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지난해 가게 주변으로 패션단지 조성과 함께 복합패션빌딩이 들어섰다. 그러나 주변에 큰 상점이 들어서기 때문에 혹시라도 장사가 더 잘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복합패션빌딩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기대를 한 것도 있어요. 우리 가게가 가까이 있어 찾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쪽으로는 오지도 않더라고요. 공장이 없어지고 사람들 이동도 줄어들면서 매출도 많이 떨어졌어요.”



손님들도 담배를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10여명의 손님이 다녀갔지만 1명을 빼고는 모두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하나 팔면 가격의 10%가 남는다고 했다. 2천원짜리 한보루를 팔아도 남는 돈은 2천원이다.



“그나마 저 같은 경우에 슈퍼도 운영하면서 다른 일도 함께하고 있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더 힘들어 지네요.”





김미영 기자∙오재현 기자∙정영현 기자


<매일노동뉴스> 2008년 10월 27일

김미영 기자  ming2@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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