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도처에 가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이스라엘 격언은 가르친다. 어머니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거룩한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어머니의 길은 그러기에 지난(至難)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뜻풀이로 보면 ‘노동자들의 어머니’, 나아가 민주화운동을 한 모든 이들로부터 어머니라고 거리낌없이 불리는 이소선(李小仙) 여사는 ‘신의 대리인 중의대리인’인 셈이다.

그래선지 이름부터 ‘작은 신선’이다. 그는 이제 단순히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열사(烈士)의 반열에 올라 있는 ‘전태일(全泰壹)의 어머니’에 그치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노동자의 어머니’란 별칭은 30여년 동안 노동운동이나 민주화투쟁 현장이라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겐 또다른 의미의 시련도 끝나지 않았다.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도봉구 쌍문2동 아파트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인 데다 돈이 될 만한 가재도구에까지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함께 감옥에 가고 민주화운동을 하던 둘째 아들 전태삼씨의 사업이 여의치 않아 생긴 고난이다.

팔다리에는 뜸자국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그 동안의 역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몸을 아끼지 않은 투쟁으로 인해 신경통, 저혈압, 협심증이 겹쳐 오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덧 일흔둘이나 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용기와 투지는 여전해 보인다. 카메라 앞에서 굳이 입성을 꾸미려들지도 않았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고 외치며 몸에 불을 질러 죽어간 아들의 유언을 흔들리지 않고 실천해 온 이 여사의 말은 마디마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어려운 사상도, 수준 높은 이론도 잘 모릅니다. 다만 고난에 찬 노동자들과 함께 분노하고, 투쟁하고, 동병상련하면서 30여년을 살다보니 그것이 노동운동이요, 민주화운동이 됐습니다”

-며칠 전 정부가 30여년 만에 전태일씨의 공로를 인정하고 명예회복을 공식 선언한 것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텐데요.

“태일이가 명예회복을 한 것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 유족들을 생각하면 나 혼자 영광을 안게 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죄스럽기도합니다. 정부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한등급을 매기지 말고 일괄적으로 평가해 줘야 합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사람들과 군에서 의문사한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이 분명한데 조사단이다, 위원회다 해서 시간만 끌고있어서는 안됩니다. 또 이 분들을 위한 묘지 조성도 정부 차원에서 반드시 해줘야 한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시겠지요.

“정부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똑같이 정당하게 평가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아픔이 있는 곳에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찾아가 위로하고 투쟁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 가서 태일이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여사께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러시아의 소설가 막심 고리키의 소설‘어머니’에 나오는 어머니같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라든가 각종 시국집회 등에서 앞장서는 모습을 보면서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리키의 소설은 구치소 안에서 한번 읽어 봤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어머니만큼 되기엔 멀었습니다. 이론이나 말보다 민주화와 노동환경 개선을위해 외롭게 싸우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해 주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사실 저는 노동운동을 잘 몰랐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일이가 분신한 후 서울 평화시장 청계노조에 나가면서부터 자연스레 몸에 배게된 것입니다”

-‘전태일 정신’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보다 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좀 더 고상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민중이 역사발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도 합디다”

-어머니의 활동이 없었더라면 ‘전태일의 외침’이 과거에 한번 있었던 목소리로 끝났을지 모른다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절규를 한국노동자들 모두의 외침으로 만들기 위해 바친 정열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물론 태일이와의 약속 때문이지요. 육신이 불에 타 성모병원으로 옮겨진 태일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만은 이 아들을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겁니다.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뤄 주십시오’. 그래서 몇번이나 약속했습니다”

-흔히 부모가 돌아가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공식 발표된 직후 전태일기념사업회의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 가운데도 ‘아들이 죽고 험난한 사회운동을 여자의 몸으로 헤쳐나오면서 얼마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라는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주위의 유혹도 많았고 온갖 협박이 있었던 것은 다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태일이가 죽은 직후 독재정권이 거액의 보상금과 이권으로 제 마음을 바꿔 보려고 애쓰던 것을 물리친 것이 가장 잘했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면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그동안 4번이나 옥살이를 하고 구류는 마치 밥먹듯이 했잖습니까. 너무나 당당하게 대처해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여사께서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입니까.

“노동자들이 열심히, 그리고 신나게 일해서 기업주와 더불어 사람답게사는 날이 오는 것이지요”

-언제 가장 보람 있었다고 느꼈습니까.

“태일이가 정부로부터 공식 평가받은 것보다 민주노총이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때였습니다. 태일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뻤습니다. IMF사태로 노조가 다시 해체되거나 해고가 쉽게 됐을 때는 다시 슬퍼졌습니다”

-자녀가 성인이나 열사가 될 경우 어머니가 겪는 인간적 고난과 부담이너무 커지는 것을 역사에서 종종 보게 되는데요.

“정신적인 부담보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태일이의 친구들이 생일 때마다 옷가지를 사다주는데 그걸 입고 나들이를 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힘들게 번 돈으로 사 준 좋은 옷입니까. 좋은 옷을 입고 그들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평생 입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주위에서 격려하고 도와준 분들이 없었다면 오늘이 없었을 겁니다. 함께 투쟁한 민주인사들, 특히 장기표 선생과 고(故) 조영래 변호사는 제가 스승으로 생각합니다”. 그때서야 카메라 앞에서도 평소 집에서 입던 그대로인 이유를 좀더 이해할 것 같았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에게 할 말이 많을 텐데요.

“솔직히 기업인들보다 정치인들이 더 잘해주길 바랍니다. 제발 싸우지말고 국민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는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되면 노동자들이 기업주와 힘을 합쳐 경제를 살리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여건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역사와 양심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정말 분노가 치밉니다”

-노동자들에게도 ‘어머니’로서 주문하실 말씀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결해서 하나가 되면 자기권리를 찾을 수 있고 뭐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청계노조 10년 동안의 경험에 비춰보면 단결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보다 더 힘들 때가 올지도 모르지만 민주노총이 힘을 합쳐 지혜롭게 풀어나간다면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봅니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공교롭게도 전태일의 이름도 ‘모두가 크게 하나 된다’는 뜻이군요.

“(웃음)참 그렇군요”

-이 동네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이 자리는 태일이와 함께 천막을 치고 살던 무허가 땅이었지요. 집을살 돈도 사실 없었고 태일이도 나중에는 금싸라기 땅이 될 것이라고 웃으면서 말했지요. 이젠 남의 소유로 넘어간 아파트지만 떠날 수도 없습니다”

-따님이 영국에서 노동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는 2월이면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는데 비행기삯이 없어 가 보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큰 딸 순옥씨(47)는 지난 89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 라스킨 칼리지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뒤 워릭대에서 노동학 석사와 박사과정을 끝냈다.

박사학위 논문주제는 ‘한국의 경공업-섬유산업을 중심으로 한 여성노동자의 민주노동운동’. 오빠의 분신 당시 서울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장 노동자로 일했던 순옥씨는 오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위해 어머니와 함께 청계노조에서 투쟁하기도 했다. 이여사는 “마지막으로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며 처음에 했던 대(對)정부 주문사항을 몇 번이나되풀이해 못말리는 투쟁정신을 엿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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