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법 시행령이 증권·보험사에 미치는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비정규직 시행령이 발표되면서 증권·보험사들이 현재 준비 중인 대안보다 더 후퇴된 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증권·보험사들은 오는 7월 비정규직관련법 시행을 앞두고 분리직군제 도입이나 저직급 신설 등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시행령이 발표되면서 파견·용역직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적극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노사가 합의한 정규직 전환 프로그램도 무력화될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증권·보험사노조들이 가입돼 있는 사무금융연맹은 비정규직 시행령 전면 폐기 투쟁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직군제 도입·저직급 신설

지난해 비정규직법이 통과되면서 보험사와 증권사 등 제2금융권에서는 인사제도 개편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보험사와 일부 증권사, 지역농협을 중심으로 분리직군제 도입이나 저직급 신설 등이 추진되는가 하면, 직군제 등 노조와의 인사개편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황도 연출되고 있다. 이 모두가 7월 비정규직법 시행을 염두 해 둔 것이다.

제일화재해상보험은 지난 4월 여직원과 영업소 소장, 콜센터를 대상으로 분리직군제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노조가 강하게 반발하자 일단 사측은 노조와 협의를 거쳐 시행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상태다. 하지만 노조는 사측이 다시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국농협노조에 따르면 농협중앙회가 지난 4월2일 지역농협에 보낸 ‘비정규직보호법 관련 주요내용 지도’라는 공문을 통해 고용연한제 적용과 직군제 신설, 2년 이상 고용된 파견직 근무자 변경 등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공문에는 고용연한제를 적용해 5년 이상 근무자를 계약해지 하고, 기간제의 경우 2년 이상 고용할 경우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되 금융업무직(가칭)과 경제업무직(가칭)을 구분해 임금과 복리후생 등에 대해 정규직과 차별을 두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하위직군을 신설하겠다는 것이다. 또 2년 이상이 경과된 파견노동자의 경우 근무자 변경을 통해 타사업장에 배치하도록 했다.

농협노조는 이에 대해 “공문이 현실화 될 경우 5년 이상 고용되는 계약직이나 2년 이상 경과된 파견노동자들의 대량 해고가 예상된다”며 “공문을 통해 비정규직의 고용불안과 차별을 고착화하겠다는 농협중앙회의 의도가 확인됐다”고 반발했다.

대한생명의 경우 노사가 올해 초부터 ‘사무직군제 개편’을 위한 TF팀을 운영해 3월까지 합의안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노조가 지난해 임단협에서 여성차별적인 사무직군제 폐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의시안인 올해 3월까지 협상안 도출에 실패했고, 급기야 사측은 논의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이에 따라 노조와 산하 여직원 협의회는 전면 투쟁에 돌입했다. 현재 지역별로 여직원협의회 지역별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고, 오는 15일에는 본사에서 전국여직원협의회 결의대회가 계획돼 있다. 대한생명은 남성은 일반직군, 여성은 사무직군에 편재시켜 임금과 승진에서 차별을 두고 있다.

6급 신설, 현실적 대안 vs 차별 고착화

분리직군제와는 다른 경우지만 현대해상화재보험노사는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현재 6급 신설을 논의하고 있다. 사측은 최근 5~6년 동안 인력충원을 하지 않았다. 노조는 5급 신규채용을 계속 요구했고 이에 대해 사측은 비정규직 채용입장을 고수하면서 팽팽히 맞서왔기 때문이다. 보조총무(5급)를 정규직으로 채용하기 부담스럽다는 게 사측입장이었다. 사측이 신규채용 대신 아르바이트로 부족한 인력을 대체하면서 직원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김성돈 노조위원장은 “노조는 계속 정규직 채용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경쟁업체와 비교할 때 더 이상 보조총무 등 단순 업무직까지 정규직 채용을 늘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며 “2~3년 정도 노사가 팽팽히 맞서오면서 이 상황이 계속될 경우 현장만 피해를 볼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말했다.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것이다. 노조는 분회총회를 개최해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직원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6급 신설로 가닥을 잡았다.

노사는 보조총무를 비롯해 보상파견팀 실무 등 현재 파견용역직 200여명을 6급으로 전환시킨다는 큰 틀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한 상황이다. 또 이들을 노조에 가입시키는 한편, 복지 수준을 정규직과 맞추고 임금 격차도 줄여나갈 방침이다. 다만 승진연한과 추후 전환비율은 추후 논의해 결정한다는 계획이다. 노조는 이와 함께 여직원의 승진률 개선도 요구할 방침이다.

김 위원장은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원칙만 강조할 경우 대안을 찾을 수 없다”며 “이렇게 되면 비정규직들만 피해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해상보험노사가 논의하고 있는 방안에 대해 저직급 신설로 차별을 고착화 시킨다는 비판의 목소리와 현실적인 대안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사측 ‘신중한 입장’ 의도는?


문제는 이 같은 비정규직법 시행에 대비한 방안들이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시행령으로 크게 변화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측이 더 후퇴한 안을 들고 나올 수 있다는 우려다. 일부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으로는 현대해상화재보험노사가 논의하고 있는 안도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론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증권사 한 관계자는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겠냐”며 “좀 더 검토한 후 방안을 만들겠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반면, 노동계 한 관계자는 “올해 임단협에 사측이 어떤 안을 갖고 나올지 벌써부터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지난 19일 발표한 기간제법 시행령 제정(안)에 따르면 증권전문가, 보험전문가를 비롯해 외환중개인, 증권중개인, 선물거래중개인, 보험계리사, 손해사정인, 기타 금융 준전문가, 일반행정 전문가, 재정 및 신용분석 전문가, 금융상품개발 전문가, 기타 금융 전문가 중 노동부장관이 고시하는 소득수준 이상에 해당하는 경우 2년을 초과해 기간제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파견법 시행령에서도 금융보험전문가, 금융전문가, 증권전문가, 금융상품개발전문가, 기타 금융전문가, 보험 전문가, 사무지원 종사자, 일반사무 지원 종사자, 자료입력사무 종사자, 컴퓨터 관련 (준)전문가 등이 새롭게 파견허용 직종으로 포함됐다.

사실상 증권·보험의 대부분의 직무가 기간제 고용 예외조항과 파견허용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다.

사무금융연맹은 “금융권 평균임금이 4천800만원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금융권 약 40% 이상이 기간제노동자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파견법 시행령대로라면 대부분 사무직·금융권 노동자들이 파견허용 대상에 포함된다”며 “게다가 기타 금융전문가라는 모호한 기준까지 포함시켜 임의대로 파견허용 대상을 정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증권업종의 경우 파견법 시행령을 엄격하게 적용할 경우 3만명 중 2만5천명이 파견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은아 증권노조 교육선전실장은 “시행령에는 증권전문가, 특히 투자상담사가 파견허용 대상에 포함돼 있다”며 “증권사 직원이라면 대부분 투자상담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전체 직원의 80% 이상이 파견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외국자본을 고려해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파견직 허용업종에 증권전문가(투자상담사, 선물거래상담사, FP, 증권분석사, FRM(위험관리전문직), 애널리스트, 운용전문인력), 금융상품개발전문가(상품개발, ELS, ELW, 파생상품개발), 기타금융전문가(투융자, 재무경리), 증권출납사무원(지점창구업무), 일반사무지원종사자가 포함된 것은 사실상 증권 모든 업무에서 파견이 허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김성희 산업정책연구소장은 “비정규직 시행령으로 인해 그나마 직군제를 통해 직접 채용하려던 움직임이 후퇴할 수 있다”며 “증권·보험 등 제2금융권은 특히 심각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 방향 정하고 대안 만들어야

무엇보다도 노사합의로 마련한 정규직 전환프로그램마저 시행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보험사의 경우 비정기적으로 노사합의를 통해 정규직 전환을 하고 있다. LIG화재의 경우 수납보조에 대해 매년 20%씩 3년 동안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또 그린화재나 흥국쌍용화재의 경우도 일정기간 근무 후 평가를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다.

증권노조 산하 지부도 매년 비정규직의 일정비율을 정규직 전환하는 것을 단체협약에 명시하고 있다. 교보증권의 경우 2년 이상 근무한 직원 중 증권투자상담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인사고과에 있어 하자가 없는 직원을 대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다. 또 한국투자증권의 경우도 3년 이상 근무한 직원 중 3년 이상 평가가 상위 50% 이상 된 직원에 대해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다. SK증권의 경우 만 2년 이상 근무자 중 일정 요건을 갖춘 직원의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다.

특히 증권노사는 해를 넘기는 진통 끝에 지난 3월 통일단협을 통해 1년 이상 경과 후 정규직 전환 기회를 부여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시행령으로 자칫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증권노조는 “시행령으로 인해 5월부터 진행되는 지부별 협상이 쉽지 않을 것 같다”면서도 “투쟁과 협상을 병행해 반드시 비정규직 전환 프로그램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노동계도 원칙을 세우고 조건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성희 소장은 “현재 노동계가 대안 없이 반대만 해서는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방향을 정하고 투쟁과 교섭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당분간은 비정규직법과 시행령으로 인해 증권·보험사 등 제2금융권이 시끄러울 것으로 보인다.
 
<매일노동뉴스> 2007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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