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화섬공단이 죽어가는 까닭
정부, 화려한 청사진만 제시하고 발 빼…연구개발 소홀한 회사는 '업종 전환'

폴리에스터 원사분야에서 아시아 최대규모의 공장을 자랑하던 한국합섬HK는 1년째 공장 가동을 못 하고 있다. 밀린 전기요금만 50억원에 달한다. 전기가 끊긴 공장을 다시 돌리기 위해 회생절차를 밟았지만 신규투자가 꺼린 채권단(삼성석유화학 등)은 이미 ‘파산 결정’이 내린 상태다.
한때 세계 1위의 폴리에스터 생산 및 수출량을 자랑했던 동국무역. 지난해 스판덱스 공장을 효성에 넘겨주고 6월에는 구미의 방직공장 사업을 아예 접었다. 2004년 3월 폐업 이후 565일 간 끈질긴 고용보장 투쟁을 벌여왔던 금강화섬 노동자들은 끝내 공장부지 매각에 동의하고 눈물을 흩뿌리며 돌아갔다.
우리나라 전체 화학섬유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 공장은 구미와 울산공단 등에 밀집해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던 섬유산업이 사양의 길을 걷는 가운데에서도 폴리에스터 원사산업은 1995년 이전까지 중국특수를 누리며 덩치를 키워왔다. 그러나 연구개발에는 극히 인색했던 화섬업체들은 1995년 동아시아시장의 공급과잉 사태에 직면하면서 중국 등 후발주자에 밀려 1998년 수출단가가 53%나 폭락하는 등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난 2001년 효성·태광·대한합섬이 대규모 감원에 착수하는 등 울산 발 화섬산업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닥쳤다. 생산축소, 설비 해외이전, 분사, 하청·도급화 등으로 화섬 노동자들이 추풍낙엽처럼 거리로 내몰릴 때 정부가 내놓은 카드는 ‘지속적인 구조조정 및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으로, 고용불안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산업자원부가 대구를 '아시아의 밀라노'로 만들겠다며 지난 1999년부터 지금까지 세금만 약 5천억원 가까이 쏟아부은 밀라노프로젝트는 한국개발연구원(KDI)로부터 "생산ㆍ수출ㆍ고용 등의 측면에서 단기간에 실효성을 거두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구를 패션산업의 중심지로 육성하겠다는 당초의 시나리오 설정은 비현실적"이라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구미공단에서도 2004년 금강화섬 폐업, 2005년 코오롱 정리해고, 2006년 한국합섬HK 정리해고 통보 등 화섬 노동자의 시련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구미시청의 통계연보에 따르면 섬유업종에서 1997년 10개 노조 6천421명에 이르던 조합원 수가 2004년에는 2개 노조 조합원 2천267명으로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줄었다.
한편, 노동자를 자르는 것으로 산업구조조정의 문턱을 넘은 화섬업체들은 요즘 업종 전환에 분주하다. 구미공단의 한일합작업체인 도래이세한은 PDP용 반사방지필름 공장을 증축했고, 코오롱 역시 원사 사업 비중을 25% 수준으로 낮추고 대신 폴리아미드 필름 설비 등을 증설하며 IT업종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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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2

1년새 4천명이 거리로 내몰렸다

구미상공회의소에 따르면 1월 말 기준으로 구미공단의 노동자 수는 7만6천330명이다. 지난 2005년 12월 기준으로 7만9,904명이었으니 1년 새 4천명 가까이가 실직한 셈이다. 구미상공회의소는 “현재 구미공단의 일자리 수는 2004년 6월 이후 30개월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화섬업계의 구조조정 여파는 구미를 텅 빈 공단으로 쇠락시키고 있다. 최근 2년 사이 금강화섬이 문을 닫고 동국방직은 8년째 워크아웃 중이다. 한국합섬HK도 공장 가동이 중단된 지 1년이 넘어섰다. 이외에도 두산, 오리온전기, 한국전기초자, 코오롱, KEC 등이 문을 닫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퇴출되다 보니 구미는 실업자로 들끓고 있다. 지난해 구미고용안정센터에 등록한 실업자는 모두 1만2,812명으로 급여액은 95년 고용보험제도 실시 이후 가장 많은 363억8천만원을 기록했다. 전년도 대비 65% 가량 증가한 것.
그러나 구미시가 내놓은 해결책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난해 7월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기업사랑봉부’를 만든 구미시는 첫 사업으로 ‘LG필립스LCD 주식 사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이 사업을 통해 지난 2월 한 달간 LG필립스LCD 주식 6만9천주(21억원어치)를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구미시는 지난해 11월 공무원과 경찰 700여명을 동원해 코오롱 공장 정문 앞에 설치된 해고자들의 컨테이너 농성장 철거에 나서 수십명이 부상을 입는 극심한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당시 남유진 구미시장은 “바이어들에게 ‘노사평화 도시 구미’라는 이미지에 타격이 입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직접 진두지휘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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