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봄의 일이다. 제주도 사투리 또는 억양이 약간 남아 있는 한 여성농민이 개량한복 위에 어깨띠를 두르고 논밭을 헤매고 있었다. 현애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였다. 2004년 4·15 총선이 코앞에 닥쳤을 무렵, 현애자 후보가 유세할 지역은 광양, 구례, 나주 등 전남지역이었다. 현 후보는 피곤해 보였다. “(섬에 있다가) 뭍에 오르니, 차를 타고 너무 오래 다녀야 해서 힘들다.” 그러나 피곤하다고 쉬어갈 처지는 아니었다.

이날 현 의원의 유세를 돕기 위해 전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 간부가 운전을 하고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이 간부의 아이로부터 계속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엄마 언제 와?”
“어, 엄마 오늘 많이 늦어.”
그 간부의 얼굴에는 불편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엄마, 왜 안 와?”

일단 전여농이 후보를 내세운 만큼 온 힘을 다해서 뛰어야 할 일. 그러나, 여성이자 농민이자 가난한 서민이었던 이 간부가 온종일 시간을 내 선거운동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혹여나 후보 맘이 불편할까,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농담을 건넸다. 아이의 엄마이며, 여성농민인 현 후보가 이 마음을 모를까.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 하지만 진한 의리가 느껴졌다. 계급적 단결은 의리로 때론 의리도 표현되기도 한다.

현애자 의원은 마음이 몹시 바빴다. 차로 30분 이상 가야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에도 집들은 띄엄띄엄 있는 게 농촌이다.

“내가 농민이요. 농민이 후보로 나왔으니, 누구보다 농민 마음 잘 알거 아니요. 그러니, 농민은 농민 찍어야 해요.”

이 말을 듣는다고 모든 농민이 민주노동당을 찍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말을 건네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현 후보는 믿었다. 급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농민 유권자를 찾아다녔다.

그날 저녁, 기자는 현 후보와 식사를 하며 나눴던 대화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여성농민이 운동하려면 미친년 소리 들어야 해요. 우라가 선거기탁금 마련하기 위해 잼 팔고, 휴지 팔았어요. 150만원도 아니고, 1,500만원을 그렇게 마련했어요.”

당시 현애자 후보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당 이름 말고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대의원대회, 중앙위, 전국집행위, 상집으로 이어지는 의결집행체제에 대해서도 몰랐고, 복잡한 정파구도는 더더욱 몰랐다. 당연히, 당의 강령 정신이 뭔지 몰랐을 거라 짐작을 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 이제 다른 정치인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초라한 시작이지만, 다른 역사가 만들어질 것으로 믿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민망해 하품을 하는 척했다.


“강령 알고 말고가 중요했을까?”

진보운동 진영에서 ‘현애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제주도에서 농민운동 하는 사람, 전여농에서 운동하는 사람 말고는 없었다. 현애자 후보는 당시, 전국여성농민회 북제주군 회장이었다. 전여농은 회원수가 많지 않은 작은 조직이다. 농민이 가지는 성별상의 보수성은 농민운동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총선 당시 전여농 사무총장이 현애자 후보를 직접 수행하며, 운전을 했다. 당시 사무총장 말고는 후보 수행을 할 사람을 마땅히 차출할 수 없을 만큼 전여농은 작은 조직이었다.

농민이 국가권력으로 받았던 차별, 그 속에서 여성으로 다시 억압받던 사람의 대표주자가 나섰다. 당 강령 좀 모르는 게 무슨 결격사유가 될까. 현애자 후보가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서 여성명부 4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파의 개입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누군지 모르지만 여성농민을 대표한’ 그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 당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끈끈한 의리 속에서 만들어진 국회의원이 생기면, 정확히 여성농민의 입장에서 속시원한 정치를 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 확정된 이후,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 현애자 의원은 보건복지 분야와 인연을 맺은 적이 없다. 그 분야에 인적 네트워크도 없다. 그런데 보좌진 선임과정에서, 현애자 의원이 한 고참당직자와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장면이 종종 목격되곤 했다.

보건복지 분야는 타 분야에 비해 진보적 인적역량이 비교적 풍부한 분야다. 당 정책위는 관련 인력을 선발해 의원실 정책역량으로 배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의원들은 묵시적으로 3명은 당에서 추천한 사람, 3명은 자신이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보좌진으로 꾸렸다. 하지만 현애자 의원은 첫 보좌진을 꾸리며, 당 정책위가 추천한 사람 가운데 누구도 받지 않으려 했다.

당시 현애자 의원이 선발하려고 했던 사람 중 ‘수석급으로 염두한 사람은’ 당의 대표적인 ‘종파사건’으로 불리는 ‘용산 지구당 사태’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이였다. 이 인사는 당이 선발하지 않았음에도(보좌관 임면권은 당대표에게 있다) 한동안 현애자 의원실로 ‘사실상’ 출근을 했다.


“고집스런 인선, 누구 고집이었나?”

현애자 의원이 처음 꾸린 6명의 보좌진 중 보건복지 관련 분야에서 일한 경험 혹은 자격증을 가진 있는 사람은, 단 한명이었다. 그렇다고, 현 의원이 기반한 조직인 전여농에서 보좌진을 차출한 것도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고, 전여농 활동을 해 온 현 의원이 서울에, 중앙정치에 진출하며, 스스로 보좌진을 꾸릴 만한 인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러나 완강히 분란을 감수하며, 보좌진 인선을 밀고 갔다. 왜일까? 혹, 당시 정황이, 분란을 감수하면서도 낙하산 인사를 할 수밖에 없는 권력자의 마음과 비슷한 것은 아닐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정파에 진 빚을 자리로 메워주는 그것 말이다. 어차피 정파야 진보정치세력에게 천형과도 같은 것이니, 우선 접어두자. 문제는 그의 의정활동이다.

현애자 의원이 그의 정책활동으로 처음 언론에 이름이 오른 내린 것은 2004년 국감 때, 공업용 유지로 젤라틴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사실 젤라틴 문제는 환경운동을 하는 일군의 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 온 문제였다. 현 의원은 이 문제를 국정감사에서 부각했다. 공업용 소가죽과 먹거리가 합쳐지면서 느껴지는 세인들의 반감 때문인지 현 의원의 폭로를 많은 언론(보수언론도)이 받았다.

그후 PPA 성분의 감기약 문제를 다뤘으나, 이미 보수정당 의원들이 식약청에 집중포화 하고 있던 상황에서 별로 더 부각될 것은 없었다. 이즈음 민주노동당을 오래 출입해 온 한 기자는 현애자 의원의 국감 질의 모습을 보면서 “의원님 훈련을 좀 더 하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전문적인 분야인 약품과 식품 문제에 현애자 의원이 가진 식견이 없었을 게 당연했다. 보좌진, 여러 시민단체, 정책위 등의 도움을 얻어가며, 부지런히 공부를 했을 것이다.

이러던 차에 현애자 의원이 집중적인 부각을 받은 것은 장애인이동보장법이 발의되고, 힘을 받으면서부터다. 현애자 의원은 ‘장애인이동보장법 제정 추진 국회의원 모임’에 초당적인 참여를 호소했다. 2004년 9월쯤이다.

장애인이동권연대를 필두로 한, 장애인들의 투쟁은 수년간 지속됐다.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상근활동가 중에 장애인 이동권 문제로 경찰서 한번 안 가본 사람이 없을 만큼, 민주노동당도 이 문제에 공을 들여 왔다.

17대 국회에 들어선 보수정당에 두 명의 장애인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그 중 한 명은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휠체어를 타고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박경석 장애인이동권연대 대표는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경선 참여를 주변에서 권유받고서는, “거리에서, 현장에서 투쟁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이렇게 지적했다. “저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적어도 이 사회에서 장애라는 문제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의 문제는 하나의 이벤트일지는 몰라도 주류의 담론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장애인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은 하나의 퍼포먼스요 시혜와 동정으로 다가서는지 모르겠습니다.”

‘초당적 모임’이라면, 굳이 민주노동당이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일까? 더구나, 민주노동당은 장애인이동법의 충분한 예산을 확보할 힘이 없다. 그건 여당의 몫이며, 제1야당이 할 일이다. 10석으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동법은 통과됐다. 그러나 장애인, 그 가운데에서 가난한 장애인과 당의 관계가 끈끈해졌다는 '신호'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과대망상과 계급성

지금 당장 꼭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은 구별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의원 개인의 '치적'에 대한 홍보 강박을 낳았다.

“탤런트 임현식씨가 나오는 건강보험공단 광고가 얼마 전까지 방송됐었습니다. 보험 적용이 늘어나서 암 진료비가 낮아졌음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내용입니다. 제가 2005년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암부터 무상의료’를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 일입니다.”(<서귀포신문>과의 인터뷰 중)

순서로 보면 맞을지 모르나, 현실과 다른 말이다. 2005년 의료보험 재정이 일부 남은 게 있었고, 그 재정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선 각계의 의견이 있었다. 그 중, 암 진료비의 부담을 덜겠다고 추진한 것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근태 장관 쪽에서 추진해 온 일이었다.

계급정당의 의료정책에서 빠져선 안 되는 기준이 소득격차다. 왜냐하면, 진보정당의 의료정책은 국민이 어떻게 건강하게 살지부터 고민하는 게 아니라, 보건 역시 분배의 문제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부자와 빈자 모두 무상의료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뭔 훗날의 일이고, 부자는 더 내고 빈자는 덜 내거나 안 내는 방향을 잡아 싸워야 한다. 암 치료가 부자의 부담도 덜고, 가난한 자에게도 해택이 간다면, 그 정책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냥 자유주의자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현 의원은 전염병 예방의 무상화와 병원 식대의 급여화를 성과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변화가 우리의 사고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국민들도 무상의료 하면 사회주의 연상하다가, 요즘은 우리 헌법에 명시된 권리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조금씩 변하면서 실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우리 국민 의식의 변화가 근본적인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정책적으로 훌륭할 수도 없었고, 그걸 기대한 유권자도, 당원도 없었다. 처음부터 세련되길 바라지 않았다. 여성농민은 어느 정당도 대변하지 않는 계층이었다. 현애자 의원은 여성농민의 대표였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현애자 의원은 포괄적 계층을 위한 정치를 할 여유가 없다. 민주노동당은 고전적 사회주의 정당은 아니다. 그래도, 계급성과 당파성 없는 정당은 계급정당, 이념정당이 아니다. 개인적 의리야 알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배신'이라는 말이다.

정치인 이영순의 탄생

2002년 3월5일 이영순 당시 동구청장은 다가올 6·13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이 청장은 동구 내 민주노동당의 복잡한 정파 지형 때문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청장의 뒤를 이어,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동구청장에 당선됐다.

이영순 청장은 공안정국으로 인해 구청장이 된 ‘드문’ 진보정치인일 것이다. 1996년, 30년만에 다시 시작된 지방선거에서 최연소 구청장으로 당선된 김창현 동구청장은 취임 한달이 안 돼 소위 ‘영남위 사건’으로 불리는 조직사건으로 구속됐다. 물론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창현 청장의 구속으로, 울산 동구는 보궐선거를 치르게 됐고, 김 청장의 부인인 이영순 후보가 동구청장에 당선됐다. 당시 선거에서 이영순 후보는 “남편의 부당한 구속에 항의하기 위해 후보로 나선 것”임을 전면에 내세웠다. 스스로의 당선을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남편을 지지해준 노동자들과 동구민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후보는 학생운동을 했고,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구청장에 출마하기 전에 그는 동구사랑어머니회 회장이었다. 또한 울산 여성실업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경력만으로는 울산 현대중공업노조를 기반으로 진보정치의 대표자로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역할은 스스로 개척한 게 아니라, 남편의 구속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영순 구청장은 큰 과오 없이 구청장을 마쳤다. 그가 진보정치인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홍익매점노조와 INP중공업 사내하청노조의 노조 설립필증을 내준 것이다. 많은 기초단체가 외면해, 노조 설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들에게 진보적 동구청장이 도움을 준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이영순 동구청장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제 소신껏 처리한 노동 현안들이 법적으로도 하자 없는 결정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점은 아주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이를 통해 진보적인 구청장이 사회 진보와 노동자·서민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기 때문입니다.”(구청장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문 중)

“적법해서 자랑스럽다”

진보적 구청장도 적법 안에서 활동하며 무언가를 할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이다.

그는 구청장의 경험을 인정받아,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3번으로 국회의원선거에 등록했다. 범자민통 세력은 그의 비례대표 당선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당선된 뒤 이영순 의원의 활동은 국회의 테두리 밖을 넘어서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상임위를 봐도 그렇다.

행정자치위는 경찰청을 피감기관을 한다. 이영순 의원이 행정자치위에서 활동하는 동안, 농민 전용철이 경찰에 손에 의해 열사가 됐다. 경찰고용직 노동자들이 부당해고에 반발하며 고공농성, 점거농성, 당사농성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 싸우고 있었다. 그는 호민관으로서 국가권력의 깡패 행각을 막아섰는가. 이영순 의원이 하던 주요 활동은 행자부장관 등 행정·경찰 관료를 찾아 항의 또는 중재를 하는 것이었다.

하반기 원구성에서 이영순 의원은 건설교통위로 옮겼다. 부동산 민심이 민란의 수준으로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는 동안, 이영순 의원은 관련 법제도 정비 방안을 부지런히 내고 있었다. 경기도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한강 올림픽대교 위에서 장기 농성을 하는 동안, 추석에 맞춰서 도시락을 전달했다.

포항에서 건설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고, 노동자 하중근이 ‘둥글고 무거운 물체’에 맞아 죽었다. 하지만 이영순 의원이 어떤 일을 했는지 포스코 건설노동자들은 기억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다단계 하도급 제도를 해결하는 방안을 공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영순 의원은 행자위 시절에 “경찰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나에게 오지만 조치할 수 없는게 많아서 당혹스럽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곤 했다. 읍소는 자주하다 보면 면구스럽게 마련이다. 진보는 읍소하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와 싸울 때, “붉은 기 휘날리며, 침략자의 씨를 말려버리자”는 노랠 부르던 사람들을 본받으려 하는 게 자민통 노선 아닌가? 그가 의정활동을 한 2년반 동안 제도 안에서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얼마나 많았나? 당을 지지하는, 혹은 당이 지지를 얻어야 할 핵심 지지층들은 적법의 범위 너머에서 싸우고 있었다.

화물연대가 지난 1일 오전4시에 파업에 들어갔다. 그 전후로 있었던 이영순 의원의 일정을 살펴보자. 11월30일은 비정규법이 처리되던 날이었으니 국회에 있어야 했다. 그 다음날도 국회 본회의 때문에 국회에 있었다. 이날 새벽 화물연대는 파업에 돌입했다. 2~3일, 주말에는 공지된 일정이 없었다.

12월4일 이영순 의원의 일정은 아침에 의원대표단 회의를 하고, 오전에는 건교위에서 하는 남해안 특별법 공청회에 참석했다. 오후에는 부도임대특별법 공청회에 참석했다. 또한 전국여성연대 발족식에 참석한다. 5일에는 오전에는 의원단총회에 참석하고 건교위 법안소위에 참석할 예정이다.


노동자는 파업해도, 여전히 국회 안

화물연대와 관련해 이영순 의원은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미치는 화물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보도자료를 4일자로 냈다. 정부정책의 실패가 화물노동자들의 생활상의 어려움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며, 몇가지 통계치를 제출했다. 이어진 주장은 이것이다.

“이영순 의원은 화물운송시장의 정상화와 화물노동자 생존권, 불법 다단계를 막기 위해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법률안을 제출하였다. … 이번 정기국회에서 상정, 통과되어야 한다. 그것이 화물노동자의 물류시장을 정상화 하고 화물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길이다.”

민주노동당은 9석일 따름이다. 대형화물회사와 화물 노동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다른 법안을 통과시킬 힘이 없다. 그럼, 법이 통과 안 되는 한국 정치의 현실만 탓하면 될 일인가? 화물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어렵고, 갈수록 소득이 줄고 있다는 건,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교통연구원’에서도 이미 발표한 사실이다. 4일은 화물연대에 대한 압수수색이 검토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5~6일, 파업수위가 정점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됐다. 민주택시도 4일 차량동원 무력시위를 했다. 운수산별노조의 출범을 눈앞에 두고 벌어진 파업 투쟁이다.

정치인 이영순의 등장 자체가 부당한 법 제도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첫발부터, 그 해결점을 '적법한 진보'에서 찾았다. 단언컨대, 2006년 12월 현재 진보는 이미 '적법'을 넘어선 지 오래다.

권영길은 언제 결단하나?

권영길의 결단이 없었다면, 민주노동당은 없었다. 권영길은 1997년 12월 대선의 참혹한 패배를 딛고 일어섰다. 모든 사람이 등을 보였을 때, 한줌 남은 열혈 활동가들과 함께 추운 겨울을 버텼다. 창당과 첫 선거인 2000년 총선의 참패, 당이 무너질 계기는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권영길은 버텼고, 그의 버팀은 민주노동당이 민중당, 한국노동당이 걸었던 길을 가지 않게 만든 주춧돌이었다. 그 둥글한 리더십은 민주노동당이 유아기 사망을 넘길 수 있었던 중요한 자양분이었다.

올해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그에 따라, 대북외교에서도, 대미외교에서도 거의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는 민주노동당에 폭풍이 몰아닥쳤다. 당내 갈등 문제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다. 민주노동당은 이 문제를 세련되게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사실, 숙제는 밀렸는데, 개학이 내일로 닥친 게으른 어린이의 형상이었다.

이보다 3년 전인, 2003년 7월22일 민주노동당 상무집행위원회에선 북핵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상집에는 '정전협정 50주년을 즈음한 민주노동당 기자회견문'을 채택하기 위해, 당 정책위원회와 자통위가 현격한 시각차를 담은 안을 각각 올렸다.

우선 정책위원회의 안은 △핵 위기를 불러온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 있지만 △북한의 체제 안보를 위한 핵무기 개발 추진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반면 자통위의 안은 △위기의 근본원인은 미국이 대북한 핵 선제공격 위협을 가하는 것이며 △미국은 '북핵 문제'에 대해 폭력적 해결을 추진하면서 전쟁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책위 안과는 달리 '북핵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상집에서 논란이 됐다. 당시 상집은 "정책위원회, 자주통일위원회, 평화군축운동본부의 내부 논의와 조율을 거쳐 입장을 정리하고 당 대표단이 입장을 최종 결정"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집행권한을 가진 상집이 실무부서에 조율 책임을 떠넘기고, 당의 비공식 부서인 대표단 회의에 결정권한을 떠넘긴 것이다. 당시 상집 의장은 당대표, 즉 권영길 대표였다. 이후 장상환 정책위원장, 최규엽 자통위원장, 윤영상 군축운동본부장 등이 의견 조율에 나섰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대표단에 결정을 위임했다.

대표단의 검토를 거쳐 발표된 특별성명은 △현재의 핵 위기를 불러온 일차적 책임은 94년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은 미국에게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북한 역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함으로써 미국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의 강경 압박과 북한의 강경 대응이 주변국의 핵무기 도미노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는 '수위가 조절된' 북한 책임론을 인정한 것으로 성명 내용이 나온 것이다.

당시 정책위는 자신의 의견이 일부 반영된 성명서 내용에 반발하지 않았다. 자통위는 반발했으나, 정책위 초안에 비해 강도가 약해진 것이기에 크게 반발하진 않았다.

분쟁은, 묻어두면 더 커진다

거의 비슷한 문제가 민주노동당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이후에 터졌다. 2003년 7월에는 당내 의견그룹 간의 이견 문제였다. 이 갈등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하지만 2006년에는, 민주노동당의 당내 이견 문제가 여러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다. 2003년 권영길 대표는, 대표단 회의를 통해 적당한 봉합점을 찾았다. 2003년 권영길 의원은 당내 분쟁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무 자르듯 결단하는 리더십이 아니다. “다음에 다시 논의합시다.” 그가 당대표 시절 중앙위에서 가장 자주하던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숙성'된 이견은 올해 10월 더 큰 분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권영길의 리더십은 추대의 리더십이다. 그는 2002년 당대표로 당선될 때 겪은 정윤광 후보와의 경선 말고는 경선을 겪은 바가 없다. 당시 경선도 당내 정치지형으로 보면 추대에 가까웠다. 그는 합의하에 대표를 맡았다. 권영길을 흔쾌하게 여기는 사람은 적지 않을지언정 결사반대세력은 적다. 그러나 권영길은 통합의 권영길이었나? 혹, '봉합'의 권영길은 아니었을까.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과감한 결단도 있었다. 권 의원은 2004년 11월29일부터 12월5일까지 단식을 했다. 경찰은, 그해 11월24일, 창원에 있는 권영길 의원 사무실에 피신해 있던 공무원노조 파업 주동자 2명을 사무실까지 난입해 들어와 강제 연행했다. 분노한 권 의원은 7일간 단식을 했고,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사과하는 것을 계기로 단식을 풀었다. 단식 당시 슬로건은 “민주주의를 구하겠습니다”였다.

당시 국무총리는 권 의원의 사무실을 '침탈'한 것에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11월 총파업으로 인해 인신구속을 당한 공무원노동자에 대해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국무총리는 권 의원과 공무원노조를 분리시켰다. 당초 권 의원이 공무원노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단식을 했다면, 어쩌면 그는 단식을 풀지 못했을지 모른다.

(내일자로 9회분 하편이 이어집니다.)
 
<매일노동뉴스> 2006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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