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갑자기 웬 성경구설을 읊는지 궁금해 하시는 독자도 있겠지만, 이번 기획은 예수님의 이 말을 해석하며 시작됐다.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답한 것은, 물론 ‘납세의 의무를 잘 지키라’는 뜻이 아니었다. 2000년이 지난 뒤 ‘운동권’들은 예수님의 이 말을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로 표현한다. 작은 일에 신경쓰지 말고, 좀더 큰 일에 신경쓰라는 것이다.

물과 기름이 같은 컵 안에 있더라도, 본시 둘은 다른 것이다.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다른 당 의원의 관계도 그러하다. 해서,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 전부터 '의회주의의 망령'으로부터 당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고심해 왔다. 이는 거꾸로, 몇십년에 걸친 민중의 투쟁으로 얻어낸 소중한 헌법기관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2년반의 시간이 흐른 지금, 민주노동당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다가올 두 번의 큰 선거를 앞두고 불안에 떨고 있다. 그 연원은 어디일까. 다시 묻자. '민중의 것은 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의 것은 민주노동당에게.' 후자가 원내진출이라면, 민주노동당, 특히 의원단은 민중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가. 그러나 이 질문도 잘못됐다. '민중의 것은 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의 것도 민중에게.' 기륭전자가 기륭전자 노동자의 것이라면, 민주노동당 의원단도 기륭전자 노동자의 것이다.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에 복무하는가. 연재순서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주>


 
1. 굳어진 패착 … '그들만의 리그' 시작되다
2. 민주노동당 의원은 민주노동당 소속인가
3. 열린우리당보다 한뼘만 더(상편)
4. 열린우리당보다 한뼘만 더(하편)
5. 호민관 하라 했지 공부하라 했어!
6. 지역이 죽어간다(상편)
7. 지역이 죽어간다 (하편)
8. 가난하지 않은 노동자와 가난한 서민
9.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10. 진보정당 소유 헌법기관의 용처(用處) 
 
 
 
단병호 민주노동당 국회의원과 이지경 포항건설노조 위원장이 7월14일 포스코 점거 농성장 한 구석에서 마주 앉았다.

이지경 위원장이 말했다. "위원장님, 이대로 나갈 순 없습니다."

단병호 의원이 답한다. "이 위원장, 항복하라는 게 아니야. 내가 남을 테니, 조합원들 데리고 나가. 오늘 하루 싸우고 말 거 아니잖아. 파업투쟁 승리해야 될 거 아닌가."

이지경 위원장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논의해보겠습니다."

단병호 의원이 말했다. "나에게 시간을 주게. 내가 설득하겠네."

농성중인 노동자들은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궁금한 듯,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남겠네”

13일 포항 건설노동자들은 계획하지 않은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하게 됐다. 본사 앞 집회 중 경찰에 밀려들어갔는데, 일단 들어간 이상 그냥 나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점거농성이 시작됐다. 노조 지도부는 이렇게 된 이상 강경한 투쟁을 벌이자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13일, 민주노총 조직실은 포스코 점거 사실을 보고받은 즉시 바로 당 대협실로, 노동위원회로 전화를 했다. 포항 건설노동자들의 점거 농성 소식은 곧 각 의원실로 전달됐다. 문성현 당대표는 성북을 보궐선거 지원유세를 하던 중 이 소식을 들었다. 당 기획조정실장은 “경찰의 강제진압도 점쳐진다”고 대표에게 보고했다. 발 빠른 보수언론들은 "국가 기간산업 마비"를 제목으로 뽑은 속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3일, 긴급 최고위원회가 소집됐다. 당 의원들도 긴급소집됐다. 익산과 청양에 출장차 내려간 최순영 의원과 현애자 의원을 제외한 의원 7명이 모였다. 문성현 대표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해 봅시다."

당 기조실장은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엄청난 수의 구속자가 발생할 것이고, 포항 건설노조의 조직력이 와해될 것"이라면서 "당이 서둘러 투쟁을 보위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 비정규직운동본부장은 이미 포항행 비행기 안에 있었다. 노동국장이 민주노총의 투쟁일정을 보고했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단병호 의원이 말했다. "일단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방책은 현장에 있든지 없든지 할 겁니다." 13일 밤 단병호 의원은 포스코 본사 정문 앞에 섰다.

“현장에 답이 있을 겁니다”

경찰은 단병호 의원의 등장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포스코 사측도 긴장했다. 단병호는 '조류독감'이며, '광우병'이고, '흑사병'이었다. 자본가와 공권력은 단병호를 전염병보다 더 무서워했다. 그가 등장하면, 항상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어, 이거 왜이래! 현장 책임자 나와! 경찰서장 오라고 해! 포스코 사장 나오라고 해!" 포스코 정문에서 막힌 단병호 의원이 고함을 치고 있었다. 사진기자들이 때로 몰려, 고함치는 단병호의 얼굴을 렌즈에 담고 있었다. 현장 책임자는 일선 경찰들에게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절대 의원에게 물리력을 사용하지 말 것. 단, 절대 단병호 의원을 절대 포스코 본사로 들여보내지 말 것."

현장 앞에서 씩씩거리던 단 의원이 잠시 숨을 고르며 보좌진과 상의를 했다. "뭐 방법이 없겠나?"

늦은 밤, 단병호 의원실 보좌관으로부터 현대차노조 위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대형 승용차가 한 대 필요한데, 구해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었다. 위원장은 걱정하지 말라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차 만드는 사람 아닙니까."

포스코 본사가 위치한 형산강 너머에서 단병호 의원과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보좌관 한 명, 현대차 노조 조합원 한 명이 대형 승용차 앞에 서 있었다. "위원장님, 좁아서 고생스러울 텐데요." "괜찮네, 지금 좁은 게 문젠가. 전에도 타본 적이 있어. 들어만 가면 되네."

현대차 조합원이 익숙한 솜씨로 차 트렁크 뒤쪽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콤프레샤를 제거하고 나니, 작은 공간이 생긴다. 그속으로 단병호 의원이 들어갔다. 조합원은 다시 트렁크 안쪽을 막았다. 이제, 트렁크만 열어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병호 의원을 실은, 아니 숨긴 고급 승용차는 포스코 정문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에서 넥타이만 하면 못 들어가는 곳이 없다. 거기다 고급승용차까지. 경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차 안과 트렁크를 검색하곤 들여보냈다.


잠입과 선동

미리 대기하고 있던 포항건설노조 간부들이 서둘러 단 의원을 차 속에서 빼냈다. "어이, 되게 좁네. 다음에는 더 큰 차로 구하라고 해야겠어." 우선 농담부터. 단 의원은 노동자들과 악수할 겨를도 없이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노동자의 의원, 단병호 위원장이 오셨습니다!" 농성장에선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콧등이 시큰해진 단 의원도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들어오던 걸음 그대로, 우선 이지경 위원장을 만난다.

"이 사람아, 싸우지 말라는 게 아니야. 이대로 가면 포항 건설노조가 뿌리채 흔들릴 게 뻔하지 않은가. 조합원들 나이가 몇인가. 수천명의 생계가 달린 문제야. 나가서 파업 계속하게. 어차피 들어온 이상 자네야 잠시 감옥에 다녀와야 할 걸세. 2선 지도부가 강고한 파업을 이어가고, 내가 안에서 버티면 되지 않겠는가."

"위원장님. 17년만입니다. 본사 건물에서 이렇게 싸우는 게, 딱 17년만입니다. 이렇게는 못 나갑니다. 조합원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가라는 거 아닌가. 17년만이니까. 지금 무너지면 다음 17년 안에는 싸울 조직이 없을 거란 말이야. 조합원들은 내가 설득하겠네. 파업투쟁 승리해야지. 건설 노동자도 주말에 쉬는 세상 보려면 우선 자네들이 이겨야 하네."

이지경 위원장은 핏발 선 눈으로 주먹만 꽉 움켜쥐고 있었다. 단 의원은 이 위원장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합원들을 모아 주게"라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조합원 여러분. 여러분의 강고한 투쟁에 경의를 보냅니다. 노동자 단병호 인사드립니다. … 제가 남겠습니다. 제가 적진에 남아 있을 테니, 어서 파업투쟁 승리해서 저를 구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궂은 일 하라고 저같은 사람 국회로 보내주신 거 아닙니까. 저는 잠시 포스코를 점령하며 쉬고 있을 테니, 여러분은 파업투쟁 승리해, 형산강을 넘어 오십시오."

조합원들은 술렁거렸다. "단병호를 혼자 남겨두고 어떻게 나가냐, 못 나간다"는 말도 간간이 터져 나왔다. 이때 이지경 위원장이 나선다. 이를 악문 채 말한다.

"동지들, 한발만 물러섭시다. 그리고, 파업투쟁 승리해서 노동자 의원, 단병호 의원을 형산강 넘어 만납시다."

“국가 기간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자”

14일 저녁, 포항건설노조 조합원들은, 대오를 갖추고 "파업가"를 부르면서 포스코 정문을 나서, 형산강을 건넜다. 의외로 일찍 끝난 점거농성에 경찰은 당황했다. 조합원들을 막을 만한 병력이 없었고, 막을지 말지도 판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별다른 제지 없이 강을 넘었다. 그리고 포스코 본사 1층 로비 한 가운데, 단병호 의원의 단식농성장이 꾸려졌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질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단 의원님"
"여러분, 여기 점거했던 노동자들이 한달에 얼마 버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설득한 겁니까, 단 의원님"
"설득은요. 파업은 계속됩니다. 파업 마칠 때까지 난 여기서 한발도 못 떠납니다. 혹시 저 여기서 끌어낼 생각을 하는 사람들 보시면 좀 전해주세요. 경찰이나, 포스코 본사 쪽에 전해주세요. 의원 한명이 안 무서우면, 뒤에 8명이 더 있다는 걸 기억하라고. 그리고, 밖에는 건설노동자 5천명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걸요."
"파업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내가 민주노총 조합원이요! 연대투쟁 하는 거라고 해 두시죠. 국가기간산업이요? 내가 국가기간 노동자 이야기 좀 들려드릴까요?"

 

 

 

 

 

 

 

 

 

 

 

 

 

 

 

 

 

 

 

‘이철의 굴욕’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은 당당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나온 이철 사장은 "이미 충분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최순영 의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본인들이 너무 쉽게 얻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철도공사 직원은 전원 공채로 선출합니다. 승무원들이 원래 있던 자리를 떠나 특채를 요구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순간 최순영 의원은 일어났다. 다짜고짜 이철 사장의 빰을 올려붙였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뜯어 말리자, 최 의원은 국정감사장에 드러누웠다. "야이, 나쁜 자식아." 누가 점잖은 최 의원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것이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최순영'이라는 이름은 바로 포탈 사이트 검색 순위 1위에 등극했다. '이철의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빰 맞는 이철 사장의 사진이 인터넷에 떠다녔다.

개혁적이라는 신문 사설에는 "YH 30년, 역사는 이렇게 되풀이 되는가"라는 제목의 사설이 등장했다. 한 칼럼리스트는 "사형수 이철, 정치적으로 사형당하다"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최순영 의원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폭력은 나쁜 겁니다. 저는 철들고 한번도 폭력을 써 본 일이 없습니다. 여성의 권리와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정책적으로 최선을 다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착하게 사는 게 너무나 어렵네요. 뺨을 때리는 폭력이 더 나쁜가요, 젊은 청춘을 일회용 휴지 쓰듯 버리는 이 사회가 더 나쁜가요. 제가 한일에 저도 놀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옛날 신민당사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다시 뺨을 때릴 겁니다."

최순영 의원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저한테 더 궁금한 거 있으면, 이제 KTX 승무원들이 농성하는 곳으로 오세요."

장관의 악몽

이용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었다. 이영순 민주노동당 의원이 행정자치위에서 건설교통위로 상임위를 옮기고 나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장관의 눈에, 이 의원은 '배지 단 깡패'였다. 이 의원이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자신을 공박하면 아예 명줄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공무원노조가 2004년 11월에 파업을 할 때, 이 의원은 행자부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의원님, 우린 법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공무원법을 위반한 공무원은 징계하는 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렇게 호소해 봐야, 씨알도 안 먹혔다.

“노동자가 파업하는데, 사용자 허락 받고 하는 거 아닙니다. 징계 운운하시는데, 그로 인한 국고낭비는 어쩌시려고 합니까.” 핏대 세우고 막말로 댓거리를 한다면 이리저리 대응이라도 하겠는데, 가녀린 몸집에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치를 따져가며 공박을 하니, 더 미운 것이다.

장관실, 차관실, 행자부 공무원단체복무팀의 업무가 마비됐다. 전용철 농민이 사망했을 때는 경찰청이 뒤집어졌다. 다짜고짜 찾아와선, 안 나가고 버텨버린다. 그렇다고 국회의원 잡아넣을 수도 없는 일이고.

이영순 의원이 건교위로 갔다고, 얼마나 좋아했나. 그런데, 이 양반이 이번에는 올림픽대교 교각 밑에서 며칠동안 집에도 안 가고 버티고 있다고 한다.

올림픽대교 교각 아래에서는 한 경찰이 한숨을 쉬고 있다. 내가 어쩌다 경찰이 돼 이런 험한 꼴을 보게 되었나. 올림픽대교 교각 위에 경기도 건설노동자 3명이 농성을 시작했고,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교각 옆으로 차가 한 대 섰다. 정말 아니길 바랐는데, 차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바로 이영순 의원이다. ‘된통 걸렸다’는 생각뿐이다. 이 의원, 차 문 열고 나와서 하는 첫마디가, “식사 제공이 어떻게 되고 있나요?” “네, 가족들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만약에 사고에 대비하면, 농성자가 어서 내려오도록 하기 위해…” 이 의원이 말허리를 뚝 자른다.

“경찰청장 오라고 하세요.” “네…?” “경찰청장 당장 오라고 하세요!” “의원님 저….” “경찰청장 오라고 했습니다!”

아, 지가 의원이면 다인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이 양반 그뒤로 며칠째 교각 밑에서 자릴 잡고 앉아 있다. 아, 일개 경찰이 국회의원 잡아넣을 수도 없는 일이고.

12월1일,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감행하던 날 밤, 행자부 장관으로부터 이영순 의원에 대해 익히 들은 바 있던 건설교통부 장관은 '뿔 달린 이영순 의원'이 등장하는 악몽을 꾸었다.

제가 당을 구하겠습니다

2005년 10월8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노회찬 의원은 중앙위 의장에게 부탁을 했다. 중앙위원은 아니지만, 당의 의원으로서 중앙위원들께 한 말씀 올려도 될지를 물었다. 원칙적인 중앙위원 몇몇이 반대했지만, 김혜경 대표는 "참관인 발언으로 생각하고 들어 주면 어떻겠냐"며 중앙위원들을 달랬다.

노 의원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중앙위원들의 양해에 감사를 표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 당의 위기는 꼭 당직공직 겸직금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삼겹살 불판이 까매질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까. 저는 감히 중앙위원 여러분께 이 제도를 풀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국민승리21 시절부터 당에서 임무를 받아 수행했습니다. 창당할 때 부대표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총선 시절 사무총장과 선대본부장을 맡았습니다. 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제가 당을 구하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당원들이 평가하실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당을 사랑하는 만큼 당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빼앗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주노동당에 얼마나 훌륭한 분이 많습니까. 그러나 감히 부탁드립니다. 저에게도 도전할 기회를 주십시오."

몇몇 중앙위원들의 야유를 보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선거운동 하는 거야! 회의는 정회됐다. 중앙위에 동행했던 기자들은 일제히 노회찬 의원에게로 몰려갔다.

"저는 이미 중앙위원들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판단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속개 후 안건이 처리됐다. 민주노동당의 당직공직 겸직금지제도는 이날 중앙위를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당 홈페이지에는 "노회찬이 권력에 눈에 멀어, 중앙위원회를 능멸했다"는 주장과 "역시, 노회찬"이라는 의견이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당대표 경선의 대회전이 시작됐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권영길 의원은 2005년 2월1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주먹질과 흉기가 오갔다. TV 뉴스에서 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속으로 분통도 터지고, 속도 상하고, 심정이 말이 아니다. 조용히 펜과 종이를 준비해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다음날 아침 권영길 의원 홈페이지에는 "국민 여러분,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으로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흉한 꼴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민주노총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 주셔야 합니다. 욕 먹을 짓을 하면 욕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민주노총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밉다고, 꼴보기 싫다고 내치시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노동자 서민에게는 더 암울한 미래만 있을 뿐입니다."

2일 아침, 민주노총 상근자들은 출근길에 '석고대죄'를 하고 있는 초대 총연맹 위원장을 발견했다. 석고대회하는 권 의원 옆에는 "부족한 선배가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써 있었다. "의원님 어찌…." 상근자들은 말리지도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굳은 표정으로 무릎 꿇은 초대 위원장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수호 위원장이 다가왔다. "의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만 하시지요." 눈가가 붉어진 이수호 위원장이 권영길 의원을 일으켜 세웠다.

총연맹과 산하 연맹의 상근활동가들, 기자들이 몰려 있다. 권영길 의원은 눈물을 보였다. “민주노총이 없으면 민주노동당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고, 우리가 실패하면, 대한민국이 실패하는 겁니다.”

권영길 의원은 이수호 위원장과 손을 잡고 민주노총으로 들어갔다.

밥 먹으러 온 거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노동당 지도부·의원단이 함께 한 2004년 6월9일 청와대 만찬. 처음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집값 문제가 나오자 험악해졌다.

“아파트 원가공개 문제에 대해 말했는데, 포괄적으로 주택공사의 사업은 결과가 공개되고 철저히 감사받고 기획예산처의 평가도 받습니다. 특별하게 부정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가격을 가지고 주택사업에서 돈을 조금 남겼다고 부당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심상정 의원이 끼어들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노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나 마저 듣고 말씀하시죠”라며 말을 이었다.

“전체적으로 사업의 여건으로 남는 곳이 있고, 밑지는 사업도 있습니다. 지금하고 있는 임대주택사업은 무조건 밑지는 것입니다. 사업에서 남는 부분은 다 공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적어도 주택공사가 사업자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한 원가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그 얘기가 나올 때 내가 일상적으로 반복해서 말해왔습니다. 건설업계의 압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심 의원이 더 참지 못하고 대통령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니, 공기업이 주공이 사업자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시는 대통령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장사원리라니요, 지금 정부가 운영하는 기업이 국민을 상대로 장사나 하고 있게 생겼습니까. 노동자가 파업해서 임금 몇푼 올려봐야, 정부 정책 실패로 집값이 오르고, 전세값이 오르면 그길로 10년치, 20년치 소득이 저당 잡히게 됩니다. 부자들에게는 집이 재테크 수단일지 몰라도, 노동자 서민들에게는 월급 잡아먹는 괴물이 된 지 오랩니다. 그런데, 그 집값의 원가 공개하자는 게 그렇게 과한 주장입니까?”

“필요하면 대통령도 맞짱 상대”

“심상정 의원님, 큰 틀을 주시면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힐 것입니다. 구체적인 정책은 타협을 해가야 될 일이고요. 하지만 분양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장메커니즘이 존재하게 해야 하니까요.”

“오늘 이헌제 국무총리가 건설업체 사장단과 긴급 회동을 가진 자리에서 재건축규제 완화오하 공공건설 추장 확대, 최저가 낙찰제 확대 유보 등 건설사 민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 시장메커니즘은 국민을 위한 겁니까? 건설사 돈벌어주기 위한 겁니까?”

“심상정 의원님, 제 임기 중에 부동산 투기는 기필코 막아낼 것이라니까요!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난 행보를 보면 절대 믿을 수 없는 행동을 보이시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아니, 지금 저하고 맞짱토론 하러 오신 겁니까.”

“네, 필요하다면, 대통령이 아니라 그 누구와도 맞짱 뜰 용의가 있습니다.”

이날 청와대 만찬은 난장으로 끝났다. 딱딱한 표정으로 대통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헤어졌다.

민주노동당은 이 대화 대용을 다음날 아침 바로 공개했다. 심상정 의원에게는 ‘맞짱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유명세를 타면서, 욕도 많이 먹었다. 여당은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식사예절도 모른다”며 비판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이렇게 받아쳤다. “대통령의 무지함은 예의를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밥만 먹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면, 집에서 가족과 함께 먹으면 될 일이다.”

당은 ‘맞짱 서포터즈’라는 이름의 운동을 시작했다. 임대주택 주민, 세입자, 상가 임대를 하고 있던 중소 상인 등등 기존 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가 조직하고 상담해 온 사람들이 초반에 모여들었다. 운동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아니, 제가 공부할 시간이 어디있습니까?”

2004년 5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남원연수원에서 당선자 연수를 진행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기, 그런데 제가 보건복지를 모르거든요. 공부한다고 전문적인 지식이 금방 쌓이는 것도 아니고. 그 상임위 체계에 맞춰서 일할 필요가 있을까요?”

보건복지위를 배정받은 현애자 의원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원내전략을 발제하던 정책위 중견 활동가는 억장이 무너진다. 몇시간 동안 설명했는데, 이 당선자 영 알아먹질 못하는 분위기 아닌가.

“그러니까 현 의원님, 국회는 상임위 체계에 맞춰서 굴러갑니다. 민주노동당이 국회 진입을 했다는 것은 이 틀에 맞게 움직이며, 타당 의원들과 정책 경쟁을 하게 된다는 걸 뜻합니다. 민주노동당의 부족한 정책역량은 ‘개혁네트워크’를 구성해 시민사회 내 축적된 역량으로 보완하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현 의원님이 하신 문제제기는….”

“아니요. 그 말씀을 알겠는데요. 제가 갑자기 보건복지 전문가가 될 순 없는 일 아닙니까. 공부하다가 임기 끝낼 순 없고요. 정책이 좋아도, 의석은 3%인데. 좋은 말 한다고 관철이 되겠어요. 좀 다른 방식으로 정치가 필요한 거 아닌가요? 게다가, 현재 상임위 체계는 제가 집중할 여성농민의 문제를 집중해서 다룰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요.”

“네, 의원님. 다른 방식은 제가 설명드릴 게 아니라, 의원님들께서 논의하실 문제입니다. 다른 방식에 대한 제안서는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이때 단병호 의원의 한마디가 이어졌다. “이거 여기서 머리 싸맨다고 될 일이 아니네요. 일단 정책위가 준비한 내용은 정책위가 맡아서 진행하시면 어떨까요. 무식하다는 소릴 들어도 안 되겠지만, 사실 우리가 공부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이번 연수 마치고 현장을 좀 다녀 봅시다. 방책은 현장에 있든지, 없든지 할 겁니다.”

노동자와 굴뚝

최초의 고공농성을 감행한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 강주룡이다. 그가 1931년 평양 을밀대 위에 올라간 게 최초다. 당시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은 야만적인 착취를 당했다. 그 중 가장 싼 노동력은 여성노동자였다.

1931년 5월16일 평양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했다. 회사의 일방적인 임금인하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5월28일 단식투쟁을 결의했지만 일본 경찰에게 진압됐고, 공장에서 쫓겨났다.

그날 밤11시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강주룡은 광목을 찢어 밧줄을 만들고, 12미터 높이의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강주룡은 "우리의 임금하락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하락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죽기로 반대한다"면서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한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고 절규했다.

그의 고공농성은 9시간반 동안 지속됐다. 경찰서로 끌려간 그는 6월1일 풀려날 때까지 묵언의 단식투쟁을 했다. 풀려난 그는 집이 아닌 파업단 본부로 향했다. 며칠 뒤인 9일 그는 '평양적색노조사건'으로 연행됐다. 병보석으로 출감한 그는 평양근교의 빈민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는 31세였다.

그로부터 70여년 후, 지금도 노동자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굴뚝으로 올라가곤 한다. 때론 타워크레인으로, 때론 철탑으로, 때론 다리 교각 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공통적으로 높은 곳이다.

고공농성을 하는 첫째 이유는 잘 안 잡혀가기 때문이다. 공권력의 입장에서도 무리하게 진압하려니, 추락사고에 대한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고공농성장은 눈에 잘 보인다. 1931년 강주룡이 을밀대로 올라갔을 때는,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 터다. 지난 70여년 동안 미디어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힘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굴뚝만큼 안전하게 자신의 처지를 알릴 공간을 찾지 못하고 있다.

2004년 4월, 민주노동당에 10명의 의원이 탄생했다. 진보진영은,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와 농민과 가난한 서민들은 아주 쓸모가 많은 굴뚝 10개를 확보했다. 이 굴뚝은 신통방통하게도 이동식인 데다, 확성기도 달려 있다. 사정이 급하면 막대기 즉, 무기로도 쓸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 시현된 바가 없다. 위에 쓴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활약상은 그저 기자가 쓴 소설일 뿐이다.

포항건설노동자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이철 사장은 할 말 다하고 갔다. 행자부장관과 경찰청장은 주로 당 의원들로부터 ‘읍소’를 들었다. 민주노총이 위기에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할 말 하겠다”면서 거리 두기를 했다. 원내진출 초기에 의원들은 청와대 가서 “분양원가 공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밥만 먹고 돌아왔다. 총선 직후부터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집중한 것은 지지층의 보위와 규합이 아니라, 세련된 정책이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임기를 마칠 무렵, 각 의원들은 각 분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을지 모른다. 정책역량과 네트워크를 갖췄을 것이며, 전직 의원이라는 타이틀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지지자들과 힘없는 대중은, 노동자들은 4년 동안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었나? 굴뚝의 진화는 없었다. 이것이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잘못한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다.
 
<매일노동뉴스> 2006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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