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대학로나 인사동, 명동을 지나다보면 작은 노래공연을 벌이며 모금을 벌이는 ‘거리의 가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세요. 참, 여기서 ‘밥벌이’를 위한 ‘생계형’ 노래공연은 제외입니다. ‘공공’의 목적을 위한, 예를 들어 ‘어려운 이웃’, ‘심장병 어린이’, ‘백혈병 어린이’ 등을 내건 ‘돕기형’ 자선공연만 포함됩니다.

대부분은 그들의 선의와 의지, 실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매일 또는 매주, 일정기간 동안 남을 위하는 일에 시간을 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도 때론 얄궂은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정말 자선공연일까. 혹시 내가 모금함에 넣는 돈이 딴 호주머니로 가는 것은 아닐까. 대체 어디에 전달돼 어떻게 쓰일까. 모금액은 얼마나 될까” 등등.

주위에 ‘거리의 가수’가 있으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먼저 “왜 그 일을 하시냐”부터 시작해 미안함을 무릅쓰고 얄궂은 질문까지 모두 말이죠.


그럴만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것도 노동계에서 말이죠. 바로 지난 86년부터 자선공연을 20년 넘게 벌이고 있는 한국노총 공공노련 김대성(51) 교육문화실장<사진>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근무하는 건강보험직장노조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답부터 들어볼까요. “음악을 좋아하는데 남들 술 먹는 앞에서 할 수는 없었어요. 음악이 생계를 위한 도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우연한 기회에 자선공연을 제의받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거리공연을 시작했습니다.”

모금액 관리는 의심 또는 염려 안 해도 된다는군요. “자선공연 하는 사람들이 모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압니다. 저는 모금함을 열지도 않고 통째로 신부님들에게 주거나 은행에 가져갔습니다.”

차마, 하루 모금액이 얼만지는 묻지 못했습니다. 김 실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중들이 비정하고 개인적으로만 산다고 생각할 때 모금함을 열면 포근한 인정을 느낍니다. ‘힘내세요’라는 쪽지가 항상 나와요. 세상을 끌고 간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 훈훈한 인정이 여전함을 매번 확인합니다.”

김 실장은 어머니가 가수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접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때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정부, 용산, 동두천 등 미군부대 앞 클럽에서 연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군생활도 수도경비사 군악대에서 했으니 젊은 시절 그는 음악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음악을 할 수 없었나 봅니다. 앞서도 말했듯 술집에서 음악 하는 것에 회의도 느꼈고, 호구지책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공채를 통해 82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입사를 했는데, “직장생활 참 재미없었다”라더군요. 그래서 직장에서도 동료들을 '꼬드겨서' 4인조 밴드 ‘DASH’를 결성해 활동했습니다.

86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명동 성당 반예문 신부님의 요청으로 난청 어린이들에게 보청기를 마련해주기 위한 거리공연을 시작했습니다. 85년부터 박준씨가 명동성당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김 실장은 직장 근처인 영등포역 앞에서 거리공연을 시작했습니다. 백혈병 어린이 돕기로 공연은 이어졌습니다.

93년 건강보험직장노조가 생기면서 줄곧 문화국장으로 활동했습니다. 98년부터 의료보험통합과 구조조정 등 투쟁이 격화되면서 몇 년간 자선공연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공공노련 상근자로 올라온 올 5월부터 거리공연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공공노련이 양재에 있을 때는 양재역에서, 여의도로 옮긴 후부터는 여의도우체국 앞에서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6시부터 노래를 합니다. 지금은 한미FTA 반대와 이스라엘의 학살행위 규탄 등을 내걸고 있습니다.

하반기에는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풀겠다고 합니다. 지금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한대수씨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와 ‘물 좀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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