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일정은 모두 끝났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온 몸이 솜방망이처럼 무겁다. 오늘은 버스로 뉴욕으로 다시 이동하는 날이다. 워싱턴DC, LA, 뉴저지 등에서 온 여러 재미위원회 동지들과는 이별의 시간이다. 모두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동지애다. 더불어 함께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원정투쟁단 모두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동지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되찾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이 희망의 불씨를 주위의 동지들에게 소중하게 건네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 함께하는 투쟁. 연대 투쟁.

6월10일…“원정투쟁단이 얻은 것은 연대의 중요성”

버스에서 LA의 ‘민들레’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동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인상적인 이야기는 뉴욕의 ‘노둣돌’과 민들레를 주축으로 진행하는 “KEEP(Korea Education and Exposure Program/조국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이다. 매년 미국 전역에서 10명 내외의 젊은 재미동포(대개 1.5세대 및 2세대)를 선발하고, 이들이 8·15 행사기간에 맞춰 한국을 방문해 한국 내 여러 진보·사회단체와 만남을 통해 한국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LA의 민들레도 KEEP 프로그램이 탄생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이민 1세대가 낮선 땅에서의 정착을 위해 힘든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듯이, 어린 시절 이곳으로 건너 온 이민 1.5세대 물론이고 미국에서 태어난 2세대도 성장과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조국이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여러가지 갈등을 겪게 된다고 한다. 자신 또한 조국과 사회적 활동사이에서 수많은 갈등을 경험했지만, 한국 사람이 아닌 남미계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KEEP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고, 사회적·정신적 이슈에 대한 성찰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갈등과 고통을 통해 사회적 연대라는 답을 찾았다. 우리 원정투쟁단도 이들이 온몸으로 보여준 ‘함께하는 삶’, ‘더불어 사는 삶’의 체화된 모습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되찾았다. 원정투쟁의 성과를 말하라면,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다. 한미FTA에 대한 한미 양국 노동자의 공동성명과 집회, 미국 농민단체와의 공동 입장 표명,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과 민주당 의원과의 공동기자회견 등등.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보다 ‘함께하는 것’, 즉 연대의 중요성이다.

차장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뉴욕 도착 후 첫날 원정투쟁단이 묵었던 노둣돌 동지 집에 다시 짐을 풀었다. 바로 유경훈, 김은희 부부 동지의 집이다. 이들이 KEEP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실천했던 동지들이다. 정말 존경스럽다. 재미위원회 소속 단체인 자주통일연합이 주최하는 만찬을 위해 30분 거리에 위치한 사무실로 이동했다. 자주통일연합 사무실 근처에는 한글 이름을 단 음식점이 많이 눈에 보인다. 아마도 이 근처도 한인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인 것 같다.

동포들이 정성을 담아 준비한 한국식 만찬으로 배도 채우고, 마음도 채운 후, 뉴욕의 야경을 보고자 전철을 타고 뉴욕 중심가로 이동했다. 100여년 됐다는 뉴욕의 전철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불결해 보인다. 일반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다 보니 체계적인 관리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오늘 저녁 나는 할렘가에 사는 노둣돌 회원집으로 향했다. 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할렘의 모습이 진짜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할렘은 여지없이 나의 선입감을 부끄럽게 만든다. 미국의 주류문화가 끊임없이 그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있는 할렘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내일 동지들에게 할렘에 대해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6월11일…“우리가 생각하는 할렘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할렘(Harlem)의 모습은 무지와 편견 그 자체이다. 헐리우드 영화나, 갱단을 소재로 한 국내 만화 및 소설에서 그려지는 그런 할렘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약에 찌든 길거리의 흑인들, 폭력과 강도, 강간 등’ 미국 지배층인 백인사회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할렘의 왜곡된 모습을 그동안 우리는 아무런 검증이나 여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해 왔다.

재미위원회 노둣돌 동지들의 안내로 돌아본 할렘가 견학은 이러한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쉽게 깨닫게 만든다. 할렘의 거리는 우리나라 어느곳과 비교해도 깨끗했다. “할렘은 우리나라 달동네의 모습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다”는 할렘에서 살고 있는 동지들의 한마디가 할렘의 모습을 전달하는 가장 쉬운 말인 것 같다.

최근에는 재개발로 인하여 사람냄새 나는 할렘지역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고 한다. 백인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계층인 흑인과 남미계와 아시아계 이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할렘이 백인들의 재개발 정책으로 점차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솔솔 풍기던 한국의 달동네도 정부주도의 일방적 개발정책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고 있지 않은가.

할렘가를 돌아다니는 동안 많은 관광버스를 보았다. 관광버스는 대부분 백인들로 채워져 있었다. 안내를 맡은 동지의 말에 의하면 대개의 백인은 할렘가를 무서워 해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꺼려한다고 한다. 직접 거리를 돌아다녀 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참 황당한 일이다. 할렘 견학을 마치고 뉴욕 중심가에 위치한 브로드웨이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 안의 승객은 미국 사회의 시각으로 보아 대부분 유색인종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도 양극화가 더 진행된다면 대중교통수단이 중산층 대열에서 밀려난 서민들만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 각인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일요일 낮 브로드웨이 거리는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스쳐지나가는 백인들의 인파 속에 우리가 미국에 있다는 실감이 절로 든다. 미국에 와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다. 미국 시민사회를 향하여 한미FTA를 선전하려면 적어도 이 거리에서 집회와 선전전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명동거리를 거닐고 있다는 착각 속에 주어진 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리고 재미위원회 소속 노둣돌이 주최하는 환송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철을 탔다. 이곳 전철 요금은 가고자 하는 구간별로 요금체계가 다른 한국과는 달리, 모든 구간에 동일한 요금이 적용된다. 시장원리가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사회치고는 특이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둣돌 사무실에는 워싱턴 투쟁에 참가하지 못했던 여러 동지들도 함께 했다. 한미FTA 저지 원정투쟁을 마감하는 자리라, 모든 동지들이 한명씩 돌아가며 감회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지들의 소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지난 투쟁의 시간이 마치 슬라이드처럼 머릿속을 휘감아 돌아간다.

소감 발표를 하는 동안 몇몇 동지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살다보면 언젠가 다시 또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정든 사람들과의 헤어짐은 언제나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오늘 자리를 함께한 재미위원회 동지들 중 몇몇은 2006년 KEEP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저녁9시경 환송식을 파하고 뉴욕케네디 공항으로 이동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재미위원회 동지들이 함께 했다. 재미위원회 동지들의 끈끈한 동지애와 투쟁에의 헌신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미국의 교포사회 대다수가 이들을 공공연히 빨갱이라 손가락질 하는 현실적 여건 속에서도 한국의 미래와 민중을 생각하는 뜨거운 동포애를 생각하면, 조그마한 역경에도 피해가고자 했던 지난 일들이 너무도 부끄러워진다.

발권을 마치고 환송 나온 재미위원회 동지들 한명, 한명과 굳은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 “목표하시는 모든 일 성공하시고, 한국에 한번 꼭 오십시요." 마음속에 오가는 수많은 말들 중 이 말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출발이다.

미국 원정투쟁이 한미FTA 저지투쟁의 불씨가 되어 소수의 초국적자본이 한국 민중들의 삶을 좌우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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