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토고에 승리한 뒤 월드컵 열기가 한층 더 달아오르고 있던 지난 6월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총회는 ‘고용관계(employment relationship)'에 관한 새로운 권고를 채택했다.

10년간의 노력끝에 얻은 결실

이것은 ILO의 176개 회원국 노사정이 지난 10년여간 벌인 토론끝에 얻은 소중한 성과였다. 80~90년대에 프리랜서, 위탁계약 등의 증가로 그동안의 전통적인 고용계약을 벗어나는 고용관행의 변형과 일탈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웃소싱으로 기업내부 업무들이 별도의 조직에 소속된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일들이 빠르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되는 노동자들이 노동법과 사회보장의 보호 영역에서 배제됨으로써 노동자의 권리 박탈, 노동조합 약화, 노사관계 불안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그리하여 ILO는 1997~98년 열린 제85차, 86차 총회에서 이른바 ‘도급노동(contract labour)’에 관한 협약 채택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합의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협약 채택에 관한 합의가 실패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도급노동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관한 논란 때문이었으나, 실제로는 사용자대표들이 새로운 협약이 세계화 시대의 불가피한 노동유연화를 규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ILO는 ‘도급노동’을 “통칭 사용업체로 불리는 법인 또는 자연인을 위해 고용계약과 유사하지만 고용계약은 아닌 형태로 종속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우리가 말하는 특수고용과 간접고용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특수고용은 ‘개인’에 대한 도급을 말하며 간접고용은 ‘기업간’ 도급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ILO와 각국 정부는 노동법과 사회보장법에서 ‘고용계약’을 전제로 노동자와 사용자의 권리와 의무를 각각 규율해 왔다. 그러므로 외형상 고용계약이 아닌 상업적 계약은 사용자의 각종 의무를 회피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ILO가 협약을 채택하고 회원국이 이를 비준할 경우 각국 노동입법의 규제 영역이 형식상의 고용계약의 범위를 넘어서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약 채택이 좌절된 이후에도 ILO의 끈질긴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총 39개국에 대한 실태조사가 3년간 진행됐고 2000년에는 전문가위원회 보고서가 나왔다. 이를 토대로 2003년 6월, 91차 세계총회에서는 ‘고용관계’에 관한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결의문이 채택됐다.

그후 2004년 개최된 이사회가 2006년 총회에 권고 채택 여부를 단일토의 안건으로 회부키로 결정했으며, 지난해에는 각국의 노사정을 대상으로 권고 초안에 포함될 주요 내용에 관한 설문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결국 이번 권고가 채택되기까지 ILO는 국제기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절차를 다 동원해야 했고, 엄청난 양의 조사연구와 분석, 토론이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관계위원회’의 노동자그룹 의장을 맡았던 에브라함 파텔(남아공 COSATU 사무총장)은 5월30일의 모두 발언을 통해 “고용관계 논의는 ILO가 수행해 온 조사연구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탁월한 작업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이제 50년간 토론의 결론을 맺을 때가 왔다”며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이번에 채택된 권고는 총 19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전문(preamble)과 23개 조항의 본문을 포함하고 있다. 전문의 각 문장들은 이번 권고가 채택되게 된 배경과 권고가 지향하는 방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본문에서는 △회원국들이 국내 입법과 정책에 포함시켜야 할 수단과 조치의 내용 △고용관계의 존재 여부의 판단을 위한 기준 △권고 이행 및 점검을 위한 노사정간의 협의 의무와 행정적 조치 등의 사항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밖에 별도의 결의문을 통해 향후 회원국과 ILO 이사회와 사무국의 임무를 적시하고 있다.


위장된 고용관계는 공동체에 대한 위협

이제 이번 ILO 권고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전문에서 “(권고를 채택함에 있어)노동자 보호가 ILO의 핵심적 임무이며, <노동에서의 근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1998년 선언> 및 <양질의 노동, Decent Work Agenda> 원칙에 부합해야 함을 고려한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 말하는 ‘1998년 선언’이란 “모든 노동자는 고용상 지위와 관계없이 적정한 노동조건과 존엄이 보장되는 가운데 노동해야 한다”는 원칙과 함께 이와 관련된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단체교섭권 등 8개의 ILO 핵심협약은 회원국의 비준 여부와 상관 없이 우선적 준수 의무가 있음을 천명한 것을 일컫는다.

이와 함께 “관련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가 불분명하거나, 고용관계를 위장하려는 시도가 있거나, 법체계 내지 그 해석 및 적용상에 부적절함이나 한계가 존재하는 경우 고용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계약형태로 인해 노동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로부터 박탈당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고용관계를 확정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발생할 경우 관련 노동자와 공동체, 나아가 사회 전체에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점과 “특히 여성 문제에 관한 다른 국제기준들을 함께 유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같은 내용이 노동자의 ‘권리 보호’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국가의 정책이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 양질의 노동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문 표현은 사용자와 정부 대표들의 입장을 고려한 요소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각국의 노사정 대표들은 단어 하나하나를 둘러싸고 의미는 물론 뉘앙스 차이를 놓고도 끈질긴 설전을 벌였다는 점을 밝혀둔다.

다음은 권고의 본문 부분으로 들어가자. 권고의 제1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국가 정책은 최소한 다음의 조치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제4조에 표현돼 있다.

그것은 첫째, 고용관계의 존재 여부를 효과적으로 확정하고 노동자와 자영자를 구분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 둘째, 위장된(disguised) 고용관계를 근절함으로써 노동자의 진정한 법적 지위를 은폐하거나 노동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를 박탈당하게 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것. 셋째, 복수의 당사자가 관련된 계약을 비롯하여 모든 계약형태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할 것 등이 제시돼 있다. 이밖에 고용관계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분쟁 해결을 위한 제도적 절차를 마련하고 법원과 중재기관, 행정기관 등에 대한 교육을 제공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노동자성 인정 여부를 둘러싼 법적 기준과 효과적인 분쟁해결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접고용은 결국 절충안으로 귀결

당초 노동자들은 파견, 용역 등 간접고용에 해당하는 ‘삼각 고용관계(triangular relationship)’ 문제를 조문에 명시하여 “누가 사용자이고 누가 노동자이며, 관련된 책임이 어떻게 배분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내용을 삽입할 것을 주장했다.

노동자측은 2003년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을 시종일관 인용하면서 새로운 고용형태로 인한 노사간 불균형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개인도급 등 특수고용뿐만 아니라 기업간 도급에서 발생하는 간접고용을 포함한 포괄적인 접근을 통해 사용자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해야만 노동자의 권리보호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사용자측은 위장된 고용형태에만 토론을 집중할 것을 주장하면서, 권고의 규율 범위를 무리하게 확장할 경우 합법적인 도급과 아웃소싱에 대해서도 간섭할 가능성이 생기고, 이는 결국 일자리 창출을 어렵게 하여 관련된 당사자들과 노동행정기관에 부담을 줄 것이라고 반발했다. 특히 파견노동은 제181호 협약과 제188호 권고에 이미 규정돼 있으므로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결국 사용자단체의 완강한 반대와 함께 권고채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EU 정부 대표들의 확실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함으로써 간접고용 문제는 ‘복수의 당사자’라는 다소 모호한 규정으로 표현하는데 그쳤고, 마지막 23조에 “관련된 181호 협약과 188호 권고가 동 권고로 인해 수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부기해야 했다.

그러나 위장된 고용형태를 근절하고 모호한 고용관계에 관한 판단 기준을 명시해야 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한국을 비롯한 일부 정부 대표들의 우려 표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초안 내용 그대로 통과됐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고용관계의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은 원칙적으로 계약의 형식이나 당사자간 합의와 상관없이 사실관계(facts)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제9조)는 것이며, 그러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데 있어 노사정의 협의를 거칠 것을 전제로 “광범위한 수단을 허용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지표(indicators)가 존재할 경우 고용관계로 판단하는 법적 간주(legal presumption) 규정을 제공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11조 a,b,c).

비록 ‘해야만 한다(should)’라는 표현 대신 ‘고려한다(consider), 포함할 수 있다(might)’는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노동자성 여부를 판별하는 원칙과 지표가 구체적으로 나열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ILO가 고용관계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 가능한 폭넓은 기준으로서 종속성(subordination) 또는 의존성(dependence)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음을 별도 조항으로 예시한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제12조) 나아가 제13조에서는 사용종속성의 구체적인 지표로 △지시와 통제, 조직적 편입, 타인을 위한 노동, 시공간적 제약, 근로제공의 지속성, 도구·원료·기계의 제공 등을 제시했으며, 경제적 의존성 지표로는 △보수의 지급과 수입의존성, 부대비용의 지불, 휴일 휴가의 인정, 재정적 위험의 사용자 부담 등을 제시했다.


한국 정부의 책임, 노동계도 역량 키워야

ILO의 권고는 해당 국가가 비준할 경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발생하는 '협약'과 달리 ‘회원국의 국내 입법과 정책에 관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비강제적인(non-binding) 수단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권고의 경우에도 각 회원국들은 이행 여부와 함께 불이행 시 그 사유를 밝혀 ILO에 보고할 의무를 지게 되며, ILO 이사회와 사무국은 이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이행을 촉진할 책임을 지게 된다. 이와 함께 각국의 법원과 분쟁처리기구 등은 ILO의 권고 내용을 판결문과 법률 해석에 인용하게 되므로 유사한 규범적 효력을 발생시킨다.

한국의 경우 ‘특수고용 입법 논의’가 당장의 현안이 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권고를 각국 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할지에 대한 시험대에 제일 먼저 오르게 되는 입장에 놓여 있다. 더구나 한국 정부는 오는 8월 ILO 아태지역 총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지역 총회 개최국으로서 “ILO 권고는 권고일 뿐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종래의 입장을 다시 내보인다면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끝으로 우리 노동계도 냉정히 그동안의 활동과 대응전략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7월 양대노총은 한국 정부가 설문조사에 관한 3자협의 절차를 철저하게 무시했다는 점을 비난하면서 권고 채택에 관한 답변서를 충실히 작성한 뒤 ILO 사무국에 직송하는 발빠른 대응을 보였다. 실제로 양대노총이 답변서에서 밝힌 원칙과 내용은 그 어떤 조직보다도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국제노동기구에서 당당한 자기 주장을 펴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3자협의 과정과 사회적 대화에 더 적극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합의안 도출과정에서 확인했듯이 백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내용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이상적 원론과 구체적인 핵심 목표를 구분할 수 있는 선택과 집중, 그리고 장기전을 염두에 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올바로 파악하고 노동운동의 정신과 열정에 충만한 전문인력을 육성하고 국제활동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항의와 불만을 표출하기는 쉽지만 정책을 제안하고 영향력 있게 관철하기 위해서는 안팎으로 일관된 노력과 신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고가 채택된 15일은 마침 김태환 열사의 1주기 추모제가 있었던 다음 날이었다. ILO 총회에서 일찍 돌아온 필자는, 마석 모란공원의 열사 무덤 앞에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이제 다소나마 마음의 무게를 더는 대신 몸을 일으켜 앞으로의 각오를 새롭게 다질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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