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도 안 되는 LG 임원들의 권위주의 때문이다.” 지금은 LG전자 고문인 이헌조(74) 전 금성사 사장이 1989년까지 LG전자 노사관계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말이다. 이 고문은 노사 문제를 발전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먼저 경영자가 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노조와 대화할 때 절대 거짓말하지 말 것, 노무관리 책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직접 나설 것, 노조를 존중하는 입장을 가질 것 등을 경영자에게 주문했다.

또한 그는 기업은 노동자와 사용자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주주, 경영자, 근로자 등 각각 역할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며, 초기 산업사회 때나 통용되던 ‘노사(勞使)’라는 말은 이제 낡은 개념이라고도 했다.

열세번째 <선수 인터뷰>는 현직 기업 임원이었다. 지난 10일 만난 LG전자 김영기 부사장(HR부문장)은 이헌조 고문의 그 철학을 현장에 오롯이 접목시켜낸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혹자는 LG전자의 노사관계(Industrial Relationship), 아니 노경관계(Labor Management) 모델을 “한국의 상황에서, 기업단위 노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치”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그 ‘장본인’의 생각과 고민이 어떤지 궁금했다.


“변화하려면 개념을 담는 그릇부터 바꾸자”

잘 알려져 있듯이 LG에서는 더이상 노사관계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회사는 물론 노조도 그렇다. 장석춘 노조위원장은 ‘LG전자노조’를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던 ‘가치창조적 노경관계’를 지향하는 노조”라고 말할 정도다.

김영기 부사장은 먼저 그 개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사란 말은 상하적, 수직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의 흐름조차 방해한다. 노경(勞經)은 수평적 관계를 말한다. 상대방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개념을 담았다. 변화하려면 개념을 담는 그릇, 용어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개념을 만들기까지 그는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 있는 유수 기업들을 찾아 배우고 느꼈다. “결국 경영자가 먼저 자성하고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더라. 일본 도요타에선 노동조합을 ‘경영자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결국 경영자가 노조에 우호적이면 우호적 태도로 다시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노동자-사용자’로서가 아니라 같이 회사를 경영하는 ‘파트너’로서 대화하고 경영문제에 대해서까지 같이 토론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같은 모델을 만들기까지 LG전자에도 변화의 계기가 되는 ‘시련’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창업회장인 고 구인회씨는 1963년에 처음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실체를 인정하는 등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경영철학을 가졌는데, 그가 지적했던 ‘임원들의 권위주의’ 탓에 임원, 사무직, 생산직이 서로 다른 식당, 통근차, 유니폼, 아이디카드 등을 사용하는 현실은 현장 노동자들이 인격적 모멸감, 거리감, 저항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가 적지 않은 노동자들은 ‘금성사’를 ‘짐승사’로 부를 정도로 냉소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70,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너무 생산에 집중하면서 성과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현장 사원들이 부속품의 하나인 느낌을 받게 됐다. 그러다 (노동자 대투쟁기였던) 87~88년을 맞으면서 경영자들이 대오각성 할 사건이 생겼다.”

바로 89년의 일이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쓴 ‘LG 전자 노사관계의 전환과 작업장 혁신’(2005) 자료에 따르면, 87년 LG그룹의 15개 계열사가 파업을 했지만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당시 노동운동이 강했던 특히 중공업 사업장 노조들이 87~88년 파업을 통해 상당한 임금인상, 노동조건과 처우 개선을 따낸 것과 견줘 금성사의 그것은 훨씬 못 미쳤다. 그래서 89년 금성사 노동자들은 임금 52.33%(일당 1,300원 가량) 인상을 내걸고 교섭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노동위의 직권중재가 내려지고 이에 불복하며 이른바 ‘불법파업’을 계속해 결국 공권력 투입으로 파업 대오가 해산됐다. 이때 주동자 17명은 구속된 뒤 해고됐다.

“경영자가 먼저 바뀌어야”

약력
1954년 출생
1977년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
1979년 LG화학 입사
1989년 LG그룹 기조실 인사팀 부장
1995년 LG그룹 회장실 인재개발지원팀 부장
1996년 LG그룹 회장실 인사팀장(이사)
1998년 LG그룹 구조조정본부 인사지원팀장(이사)
1999년 LG그룹 구조조정본부 인사지원팀장(상무)
중앙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현)
2000년 LG전자 HR부문장(부사장, 현)
2004년 한국전자산업환경협회 회장(현)
당시 상황은 회사쪽이 만든 ‘가치창조의 1등 지향 LG 노경’이라는 자료에도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서는 분규일수 36일, 실질적 무작업 일수 150일, 매출손실 총 4,500억원이었다며 ‘창사 이래 최대의 경영위기 봉착’이라고 쓰고 있다. 또한 사내 복지관 완전 요새화, 수십 차례의 가두투쟁 및 경찰서 습격, 관리감독자 및 사무직 사원 감금 폭행, 인사부·총무부 무단점거 농성 등의 표현에서 당시 상황을 회사쪽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나 그 과정에서 가전 분야 국내시장 1위를 삼성전자에 빼앗기기도 했다.

“파업이 수습된 뒤에 심각하게 반성했고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노사관계를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했다. 경영진들이 아침6시에 출근해서 출근하는 모든 사원들한테 인사부터 했다. 청소도 하고 점심 때에는 생산직과 같은 식당에서 밥 먹고, 본사 경영진이 생산공장을 찾을 때 노조사무실부터 찾아가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끈질기게 추진했다. 일주일? 한달? 이면 끝날 줄 알았던 사람도 있었지만 변화할 때까지 했다.” 김영기 부사장 말이다.

“한 5년 정도 하니까 정착되는 것 같더라”던 그는 “물론 이런 경영진의 마음에 동조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 간 노노 갈등도 있었고, 경영진에서도 언제까지 우리가 이래야 하느냐 하는 의구심과 회의도 있었다”며 “하지만 최고 경영자가 지속적으로 원칙을 고수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노경관계가 정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노조도 있는데 (무노조) 삼성보다 못하면 안 되지”

그가 말한 최고 경영자의 의지는 도요타자동차 창업주 도요타 기이치로 회장이나 교세라그룹의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의 그것과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노조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며 “노조가 있기 때문에 사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으며, 가치를 함께 창출할 수 있을 때 회사도 노조도 발전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노조를 만날 때나, 상급 총연맹인 한국노총 관계자들을 만날 때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삼성전자는 노조 없이도 잘 된다. 근데 우리는 노조도 있으면서 더 못하면 안 되지 않느냐.” 그러면서 중점을 두는 대목이 바로 ‘현장에서의 참여’다. “90년대 초반에 고 배무기 서울대 교수 등을 모시고 21세기 새로운 노경관계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큰 프로젝트를 했다. 그때 나온 것이 ‘신뢰, (자발적)참여, 성과’였다.”

끊임없이 현장을 찾았다. 애로사항도 듣고, 제안되는 개선조치들에 귀를 기울였다. 현장 내 조장, 반장, 계장들 모임도 만들고 한국 경제에서부터 회사의 대내외적 상황에 대해 교육도 하고 발표하게 했다. “처음에는 찾아와서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던 현장 사원들이 자신이 낸 10개의 제안 가운데 2~3개가 수용되고 현장에 적용되니까 이제 ‘부속품’이라는 생각은 안 하게 되더라.”

이를 토대로 혁신활동도 많이 했다. ‘3 * 3(3년 내에 생산성 3배 올리기)’ 운동도 했는데, 초기에는 퇴근시간도 늦고 노동강도도 세져 반발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품질이 향상돼 제품이 많이 팔리고 또 이윤이 생기고 그것이 성과급으로 다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니까 불만보다는 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더 많은 개선 과제들이 제출되더라고 한다.

“LG전자 = 숙련의 고향”

‘자원유한 지무한(資源有限 智無限)’. LG전자 창원공장 입구에 붙여있는 글귀다. 포스코 출입문에 걸린 ‘자원유한 창의무한’이란 것과도 비슷한 맥락인데, 어쩌면 LG전자를 지금의 반열에 올린 핵심 철학이기도 하다.

김영기 부사장은 자신이 직접 ‘학생’으로 참여했던 혁신학교 사례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
“4박5일 프로그램인데, 우린 1박5일이라 부를 정도로 강도높게 교육을 받는다. 강의도 듣지만 고함도 지르고 40km 행군도 한다. 또한 노동자들이 퇴근한 뒤에 생산공장으로 가서 밤새도록 현장 개선활동을 한다. 보통 새벽 3, 4시는 돼야 보고서가 만들어지는데 대개 탈락이다. 남들이 이미 다 제기한 내용이라 그렇다. 다시 써오라고 한다. 그러면 또 된다. 인간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 가서 뭔가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키우는 교육을 하는 거다. 1박5일 가능하냐고 하지만 실제 가능하더라. 극한으로 안 가면 모르는 거다.”

결국 벼랑끝까지 몰려갔을 때 인간에게서 나오는 ‘무한한 잠재력’이 바로 ‘지무한(智無限)’의 정신인 셈이다. 이는 생산현장에서 노동자 스스로의 ‘숙련’을 높여내는 과정으로도 이어진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하는 업무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사 조이는 일을 하는 사람도 그렇다. 그러다가 혹여 뜻이 안 맞거나 부득이한 사업축소로 LG를 떠나야 할 때에는 관련업체 공장장이나 상무 등 핵심인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창원공장이 혁신의 메카인데, 인근 중견업체 사장들이 늘 ‘공장에 사람이 남으면 달라’고 한다. 대개 부품업체들이니까 (모기업과의) 연관효과도 크다. LG 사람이 가게 되면 더 좋은 기술력을 그 회사에 넣게 되고 LG에서 했던 혁신활동도 전파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LG전자의 사례는 도요타의 그것과 너무 닮았다. 노사 신뢰에 기반을 뒀다는 가이젠(改善) 시스템 운영에서부터 부품업체, 해외공장에 이르기까지 나고야시에 위치한 도요타공장이 '숙련의 고향'이 되는 것은 물론 시스템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인간의 숙련’을 중시하는 것까지….

“우리 몸을 거의 던지다시피 도요타 벤치마킹에 나섰다. 기술도 훈련받지만 마인드도 훈련받는다. 사원들도 도요타에 직접 가서 현장 일을 하면서 배우는데, 일주일씩 하고 오면 다 몸살 앓는다. 그러면서 느낀다. 도요타 직원들은 그런 노동강도에서 일하면서도 왜 즐겁다고 하는가.”

도요타에서 배운 가장 핵심 철학이 뭐냐고 물었다.

“한우물만 파는 우직함이다. 남들 다 왔다갔다 할 때 한 분야에 천착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알다시피 나고야는 동경과는 떨어져 있어(366km 거리, 신칸센으로 1시간50분) 동경 유수대학 출신들이 잘 오지 않는다. 그런 환경임에도 끊임없이 교육하고 현장을 개선하면서 더 나은 물건 만들어내더라.” 그러면서 잇는 말은 이랬다. “회사는 인재를 통해 비즈니스를 최고로 할 줄 알아야 한다.”

6시그마, TDR팀

LG전자의 노경협력 사례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6시그마’를 기본 툴로 하는 ‘TDR’이라는 경영기법이다.

6시그마는 미국계 기업인 모토로라에서 시작된 ‘불량률 제로’를 위한 경영활동이다. 6시그마는 3.4PPM(Parts per million), 즉 1백만개의 제품이나 서비스 가운데 단 3.4개 정도만의 오차를 허용하는 이른바 ‘완벽경영’에 도전하는 경영혁신 활동이다. 배규식 연구위원에 따르면, 이는 작은 도서관 규모의 모든 책에서 ‘단 한 단어의 오타’가 나오는 정도로 규정되는 개념인데, 96년부터 본격적으로 6시그마 활동을 도입한 LG전자에서는 그해 신모델 불량을 70% 이상 줄였고, 99년에는 4.1PPM을 달성했다.

김영기 부사장은 “현장 사원들에까지 이 경영활동에 동참한 결과 비용을 절감한 것은 물론 일정한 숙련을 갖춘 기술자를 키워낼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 숙련을 측정하는 벨트가 마스터(가장 우수)에서부터 블랙, 그린 순으로 있는데, 반장·계장의 90% 이상이 블랙벨트를, 사원 중의 40~50%가 그린벨트를 취득하기도 했다.

또한 작업장 혁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생산라인의 배치와 공정인데, 창원공장에서는 냉장고를 생산하는 1공장의 경우 원래 200m이던 라인을 현재 60m까지 단축했고, U자 라인을 1자 라인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지속적인 공정개선, 일부 생산공정의 아웃소싱과 모듈화, 자동화 등이었다.

이와 함께 TDR(Tear-down & Redesign)이 있는데, 직역하자면 ‘파괴하고 다시 만든다’는 뜻이다. TDR팀은 작업현장의 안팎에서 발생하는 애로사항이나 문제점을 추출해 TDR의 주제로 정한 뒤 그 분야에 정통한 엔지니어, 품질관리담당자, 현장작업자 등으로 여러 기능과 부서에서 파견된 횡적 다부서 과제팀을 꾸려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1년 등 일정시간 동안 특정문제에 집중토록 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개선활동이다. 이 TDR팀에 들어가 있는 동안은 원래 자신 고유의 업무는 하지 않는다. 배규식 연구위원에 따르면, 주어진 과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개 기대수준의 60~70%를 만족시키는 결과가 나오며, 이같은 TDR팀이 창원공장에만도 200~300개가 가동되고 있다.

김 부사장은 “혁신활동의 결과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예전 같은 ‘강제 지시’가 아니라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사원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라며 “성과급으로 보상하기도 하지만 견문을 넓힐 수 있는 해외여행을 사원들이 더 선호하더라”고 한다.


“더이상 중국진출 없다”

물론 이렇게 오기까지 시련이 없지는 않았다. ‘혁신’은 노동강도 강화,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뿐 노동자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없다는 시각도 있었다. “혁신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봐라, 라인을 1/2로 줄이면 사람도 남는다.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물론 재교육을 통해 숙련 일자리에 투입시키거나 (그 사람에게 적합한) 다른 부분으로 자리를 옮기는 방식을 취했지만 노조 입장에서는 달갑지만은 않은 일도 있었다. 특히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공장 해외이전이었다.”

시장개척 차원이긴 하지만 신규사업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만 추진하면 그만큼 국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실제 2004년 말 현재 LG전자의 해외 생산법인은 미주, 유럽, 아시아, 중국 등지 30개가 넘는다. 노동자 규모도 국내(3만2천명)보다 해외(4만3천명)가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최근에는 해외진출,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한다. 중국도 인건비가 상승하고 있고, 더이상 인건비 이유 들며 해외에 나가선 성공할 수 없다. 비즈니스를 바꾸고 기술을 첨단화시키는 등 산업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LG전자는 올 8월, 파주 LCD 단지에 진출한다. 창원이나 구미 등지로 오지 않으려는 고급 R&D 인력도 흡수하기 위해서도, 인천공항 아산·평택항 등 물류조건도 활용하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외공장 많이 지어도 핵심 공정까지 다 주면 우리가 망한다. 가능한 국내에 첨단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고도화냐, 공동화냐의 공방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말은 글로벌 경쟁에서의 기업 생존의 핵심은 ‘고부가가치화’란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미 그동안 초기자본 축적에 일등공신이던 국내 노동자들은 나 몰라라 하고 시장개척 명목으로 한국을 떠나거나 일부 사업 해외이전을 추진하는 기업이 여럿 있다. 그런 곳마다 끝을 모를 장기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봐도 퇴로 없는 답답한 사업장이 많다”던 그가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우린 1년에 한번씩 노조 간부들과 해외 벤치마킹을 가는데, 우리보다 후진적인 나라에 가서는 그들 나라의 어려움도 보고 그들 입장에서 미래전략이 무엇인지 토론도 한다. 최근에는 미국 5대 공업도시 중 하나였던 버팔로에 갔다. 철강이니 자동차니 엄청 발전한 도시였다. 그런데 우리는 뭘 봤느냐, 유리창 깨진 빈 공장, 굴뚝 무너진 공장…, 해외로 이전하면서 공동화된 버팔로를 봤다. UAW(전미자동차노조)가 아무리 강하면 뭐하나. 말 안 해도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느낄 수 있다.”

경제적 흐름, 산업의 흐름은 데모한다고, 투쟁한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지 않아도 우리 제품을 최고수준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가치창조적 노경관계’의 핵심이다.

이는 중앙단위 노사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특히 최근 논란 중인 비정규법 관련, 그는 이런 견해를 내놨다. “지금 현행대로 가는 게 어떤가. 기업들은 어떤 법을 만들어도 다 규제로 받아들인다. 비정규 사원 개인 입장에서도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국회를 통과한 법은) 2년마다 해고할 유인책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노동계도 ‘내가 경영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를 고민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비용을 최소화하고 가치를 최대화 해야 한다. 그러면 (노동계가 선택할 것은) 뻔하다.”

“지방선거, 노조에서 많이 출마하라”

분기별 경영설명회, 사업부 혹은 사업본부별 회사 경영상황 및 성과목표 공유, 제안제도, 혁신활동 등 ‘자발적 참여’에 기초한다던 이같은 제도를 경영참여로 이해해도 될까?

“경영참여 일환이긴 하지만, 노조가 투자계획을 함께 마련하는 등의 방식으로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본다. 노조위원장한테 그랬다. 참여할 것이라면 책임을 지라고. 잘 안 되면 노조위원장도 같이 옷 벗자고 했다. 그런데, 그건 맞지 않다. 경영자는 경영을 책임지면 되고, 노조는 현장에서 혁신활동, 공정개선, 근무환경 개선 등에 힘쓰면 된다. 오히려 앞으로 노조는 현장노동자들의 ‘멘토(mentor)’가 돼 조합원들의 가정문제부터 직장 상하관계, 이성관계 등에 대한 상담역에 좀더 나섰으면 좋겠다. 사원들이 이러저러한 일로 스트레스 받으면 품질도 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그의 주문은 “노조가 우리보다 어려운 소외이웃들에 대한 사회공헌활동에 더 적극 나섰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LG전자는 노사함께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공헌활동에는 열심이다. 그것이 삼성의 8천억원과는 출발이 다른 문제라 하더라도 ‘기업 이미지 제고’를 주된 목표로 한 ‘일시적’ 도움이란 점에서는 비슷해 보인다. 오히려 원하청으로 줄줄이 엮인 산업구조를 공정한 거래관계로 만들고 중소기업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더 핵심 사회공헌이 아닐까.

“그렇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사회공헌은 고용창출이다. 몇천억이든, 몇조를 내놔도 누구한테 얼마나 주겠나. 일시적인 것이다. 핵심은 일자리다. 우리가 첨단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이유도 그런 데 있다. 지자체에 얘기하는 것은, 국내에 공장 지어도 이익 나게 할 수 있도록 금융이나 도로, 전기, 수도 등 인프라를 제대로 갖춰달라는 것이다. 일자리 만들기에 민관이 같이 노력해야 한다.”

이어 그는 노조에도 그런 얘길 했다고 했다. "지자체 선거에 많이 출마해서 당선된 뒤에 시의회를 움직여 이런 활동을 하라고 말이다”고.


노동과정 개입력, 노조는 뭘?…“이젠 중앙단위 활동도 나서야 할 때”

LG식의 노사관계 모델은 무노조 삼성도 아닌, 대립적인 현대도 아닌 기업 차원의 노사 파트너십이 성공한 한 사례이다. 이를 두고 최영기 노동연구원장은 “노조의 활동이 위축돼서 어용노조화 했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노조가 생산성 향상, 작업장 혁신 등에 함께 노력해 왔다는 점에서 경영자가 솔선수범하면서 기업 내 원만한 노사관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고 평을 한다.


실제 LG전자노조는 지난 2000년 직접 상품기획, 시장조사, 개발, 생산, 마켓팅, 서비스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참여한 29인치 분리형 완전평면TV인 ‘디지털 플라톤’을 생산, 2001년부터 판매했다. 노조가 만들었다고 해서 ‘유니언(union) TV'라고도 불리는데, 당시 이 모델은 10만대나 팔렸다. 2~3만대를 만들면 성공 모델이라고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전의 히트를 친 셈이다. 이를 두고 김 부사장은 “우리 노조 리더들이 굉장히 잘 선택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치창조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오히려 공을 노조에 돌린다.


배규식 연구위원은 이같은 노경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최고경영자가 앞서 변화해 솔선수범했다는 점을 꼽으면서, 무엇보다 노조 견제나 감시장치를 잘 만들어 두는 소극적 전략, 노동자들을 불신하는 시각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에 방점을 뒀다. 다수의 기업들이 사실상 포기하거나 방치해 둔 생산직들의 냉소적 태도를 극복하고 그들을 껴안고, 말문을 트게 하고, 의사소통을 하면서 임원, 관리직, 사무직 중심의 기업공동체 속으로 끌어들인 게 핵심이란 말이다.


LG전자노조는 현재 생산직 중심으로 가입돼 있기 때문에 국내 종사노동자 3만2천명 중 조합원은 1만608여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조 사무실은 인사파트 사무실 바로 옆에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일상적인 교류가 활발하다는 말인데, 이를 두고 김 부사장은 “현대 등 다른 기업 관계자들에게 이 얘길 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고 전한다.


다른 제조업에 확장시킬 수 있는 모델?


그런데 인터뷰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어용노조’라 쉽게 규정할 수도 없고 회사 역시 ‘순치’의 과정만 밟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창출된 이 모델,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최고경영자’의 철학, 그 철학을 현장에 투영시킨 경영자들의 지속적인 노력, 인간존중의 경영 등은 하나의 ‘가치’로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경영자의 이해가 여전히 대립적 관계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상생의 모델’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LG전자 모델이 기업단위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치인지에 대해서도 선뜻 판단이 되지 않았다.


또한 최근 고성과작업장 등으로 대표되는 작업장 혁신,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조합의 개입력을 다른 기업들에서는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이를 기업단위 밖으로 확장해서 산업 차원의 파트너십을 구축했느냐 하는 점에서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LG전자 전체의 약 30%, 창원공장은 50%에 육박하는 사내하청을 포함한 비정규직들조차 이 노경관계 틀 '밖'에 있다는 점에서 아무리 노경관계가 '기업(정규직)' 단위로 짜여져 있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움은 아쉬움이다.


김 부사장은 앞으로 LG전자에서 창출한 이 모델을 전 기업, 전 사회로 확장, 미래지향적 노경모델을 만드는 데 더 노력할 생각이다. 앞으로 중앙무대에서 그를 좀더 가깝게 만날 날은 머지않은 것 같다.

<편집자주> 무릇 ‘세상의 모든 일’은 지도자에 의해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바꿔내는 더 큰 힘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어디를 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지도자의 선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지면에서는 한국의 노사관계, 노정관계를 주도하는 ‘지도자’, 이른바 ‘선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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