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여당의 비정규직 법안 4월 국회 처리와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앞두고 노동 정세가 자못 심상치 않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보궐선거가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된 이후 정국은 비정규법안 문제를 두고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다.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현재 정부의 비정규법안 처리에 유일한 걸림돌은 비정규노동자들 및 이들과 연대하고 있는 민주노총이다. 따라서 민주노총과 비정규노동자들의 양보와 굴복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여기저기서 드높다.

압박의 방식과 주체들은 눈에 익다. 예의 노사정 합의기구가 재가동되고 민주노총의 불참 입장이 또다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새 장관이 수차례 민주노총을 방문하는 등 정부 정치권의 압력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는 노동운동 출신 연구자들의 보조 장단이 곁들여진다. 이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참가해야 한다’는 억지를 마다하지 않는다. '조중동'을 필두로 보수언론들이 마치 각본에 있는 것처럼 사설 논설에서 한 목소리로 목청을 높인 점도 눈에 띈다. 특히 ‘현안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이 참가의 전제조건’이라는 민주노총 일각의 목소리에 화답하는 ‘제2창간’ 신문의 호소는 애처로울 정도이다.

모두가 말한다. ‘참가해서 교섭과 투쟁을 병행하는 것이 위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다. 꿀 먹은 벙어리인 시민단체들의 처지와 ‘교섭과 투쟁의 병행’을 주장한 새 지도부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제 참가의 주객관적 정세는 충분히 형성된 셈이다.

'병행노선', 이론도 아니고 노선도 아니다

그런데 주목되는 변화는 최근 한국노총의 행보였다. 창립 60주년을 맞은 한국노총은 성대한 행사를 개최하고 이른바 새 운동이념, ‘평등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참여와 사회연대적 노동조합주의’를 공표하였다. 멋들어진 이념의 화려한 내용보다 더 주목할 지점이 있었다. 그것은 “국민과 함께하는 조직으로 사회적 대화와 투쟁을 병행” 하겠다는 위원장의 발언이었다.

이는 민주노총 4기 지도부와 보궐집행부의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 또 “더이상 어용 시비는 없다”는 단호한 선언도 눈여겨 볼 부분이었다. 이후 한국노총은 비정규법안의 ‘사유제한’ 문제에 대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탈어용’ 한국노총의 당당한 행보였던 셈이다. 일종의 도발처럼 보이지만 이는 대책 없이 ‘투쟁만’ 일삼는 민주노총이 자신의 ‘병행노선’으로 돌아올 것을 주문하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러므로 4월 투쟁의 강고한 흐름과 별개로 양 노총의 기본 운동노선은 다시 ‘병행노선’으로 수렴하고 있다. 비정규법안을 둘러싼 사소한 이견, 마찰 뒤에 진행되는 큰 흐름은 여전한 것이다. 말하자면 ‘교섭 있는 투쟁’과 ‘투쟁 있는 교섭’의 만남은 진행형이다. ‘참가 문제가 뭐 그리 대단해서 목을 맬 문제인가?’, ‘수가 맞으면 교섭하고 수틀리면 투쟁하면 된다’는 민주노총 내부로부터의 일갈도 예사롭지 않다.

필자는 이 ‘병행노선’을 별로 ‘이론 같지 않은 이론’으로 평가한 적이 있었다. ‘이론이랄 것도 없는 이론’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공약사항이 되고, 한국노총의 ‘새로운’ 운동노선에 핵심 내용이 되는 그 현실이 바로 ‘참가 문제’의 중차대함을 역설하고 있다. 참가를 위한 엄청난 압박, 뜨거운 열망이 넘쳐나고 있으나 우리의 노동현실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형국이다.

‘병행노선’은 노선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다. 그 주창자들 말처럼 그것은 노동운동의 상식 중에 상식에 불과한 것이다. 개별 ‘노조가 교섭하다 안 되면 파업하는’ 그런 상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병행이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의 시점에서’ 노사정위원회나 여타 ‘노사정 합의기구’ 참가를 정당화 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그 상식이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적용되어선 안 된다.

이런 비상식적 사고의 바닥에는 노조의 단체교섭 활동과 총연맹의 3자 기구 참가/교섭활동을 대등한 것으로 비유하는 ‘비유의 오류’가 깔려 있다. 노조활동의 기본은 교섭과 투쟁의 결합이며, ‘3자 합의기구’에 대한 참가, 교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과연 단체교섭과 3자 합의기구 교섭은 같은 것인가?

먼저 3자 교섭과 단체교섭의 주체는 크게 다르다. 3자 교섭에는 정부가 중요한 행위자로 작동하고 있다. 둘째, 교섭의 의제가 다르다. 3자 교섭은 전국적이고 정치적, 제도적인 의제를 주로 다루는 반면 단체교섭은 상대적으로 협소한 문제들을 다룬다. 셋째, 절차적인 측면에서도 다르다. 단체교섭은 법적 과정이며 법적 보호를 받는 파업이 전제되어 있다. 반면에 3자 교섭에서 파업은 ‘원칙적으로 불법’이며 협의와 합의를 전제로 한 임의적, 정치적 교섭의 성격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넷째, 단체교섭과 달리 3자 교섭은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대리교섭의 성격이 강하며 그만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크다. 말하자면 노동운동의 계급성과 자주성이 곧바로 문제가 되며 그 영향도 전체 노동계급에게 미친다는 점이다.

특히 그 참가가 어떤 시점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구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비정규직 확대법안의 강행처리가 눈앞에 있고 민주노조를 근본부터 거세하려는 ‘로드맵’이 예정되어 있다. 군사정권을 방불케 하는 공무원노조 말살 탄압은 또 어떤가? ‘투쟁의 조건이 안 되므로 더욱더 참가할 필요가 있다’는 궤변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병행할 시점이 아니라 투쟁에 집중할 시점이다. 민주노조가, 자주적 민주노조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역사적 갈림길인 것이다.

요컨대 ‘병행’이라는 추상적 원칙은 아무 대상에나 아무 때나, 그렇게 ‘추상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1998년 2월 정리해고 합의, 2001년 한국노총의 복수노조 합의, 2002년 발전 파업 합의, 노동시간 단축 협의, 비정규직 협의 등 많은 3자 기구 참가 경험이 있다. 참가에 따른 파멸적 결과 중의 하나가 민주노조운동의 구조적 위기로 발현하고 있지 않는가? 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 사태로 점철하는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자주성 상실은 외면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친다?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지적해둘 문제가 있다. 일부 노동 연구자들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폭력 사태’를 민주노조운동의 가장 중요한 위기 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노조의 기본인 ‘내부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 사태’이며 1998년 2월 대의원대회부터였다고 역설한다. 민주노총 비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한가한 분석이 된다.

물론 조합민주주의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이들은 왜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지 말하지 않는다. 1998년 2월 그 대의원대회와 지금 왜 폭력이 발생했으며, 당시 지도부가 집권당에 집단 입당한 문제, 지금 어용노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는다. 또 비정규 개악법안, 로드맵, 공무원노조 탄압을 주도하는 정권의 노동정책 담당자가 대개 민주노조 출신인 것은 위기와 무관하다.

곧 참가와 위기 문제, 폭력 사태의 뿌리인 ‘자주성 상실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폭력 사태가 문제라면서 ‘폭력 없는 한국노총’의 ‘그 변신’을 높이 평가하는 데 이르면 더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나아가 민주노총 내부의 일부 정파, 반민주 폭력세력은 양대 노총 통합의 유일한 걸림돌이 된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에 대한 국가폭력, 자본폭력은 그냥 상수일 뿐이다. 이들의 그 폭력 개념, 민주주의 개념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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