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그의 코멘트는 ‘노동문제 한 전문가’ 또는 ‘또다른 관계자’ 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컷 얘기하다가 ‘공식 코멘트’는 아님을, ‘익명’을 전제로 한 것임을 밝힐 때는 참 허탈하다. 특히 정부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야 ‘신뢰도’ 때문에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경우들이지만 ‘국책연구기관’ 소속인 그의 처지도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작정한 듯 보였다. 선수 인터뷰 열번째,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을 지난 16일 만났다.


잃을 것밖에 없어도 협상해야

“작년과 달리 이제 감정의 골 때문에 대화를 못한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쟁점이 많기 때문에 대화가 순조롭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인터뷰 바로 전날인 15일, 정말 오랜만에 노사정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노사정 대표자회의는 노사정위 개편방안과 로드맵 처리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2004년 4월 꾸려졌는데, 그해 7월 LG칼텍스 쟁의에 대한 직권중재 회부 결정 등에 반발하며 소집권을 가진 민주노총이 회의를 무산시킨 뒤 1년8개월만에 처음으로 열렸다.

로드맵 등에 대한 시각차나 노동계와 노동부장관 간의 감정 섞인 대립으로 ‘최소한’의 의사소통마저 되지 않았던 지난해와 달리 이제 소통의 장은 마련됐다. 하지만 노사, 노정관계의 수문장처럼 비정규법이 국회 본회의 문턱에 아직 걸터앉아 있고,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이나 공무원 노사관계도 별로 답이 보이지 않는 쟁점으로 건재하다. 그리고 1년8개월만의 만남에도 민주노총은 참석하지 않았다.

“뭐든 큰 틀에서 접근했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은 것 같다. 한두 개 쟁점이 안 풀린다고 모든 대화 창구를 닫는 방식 말고 대화는 대화대로, 투쟁은 투쟁대로 가는 2트랙(two-track), 3트랙 전략을 썼으면 좋겠다. (대화의) 문을 닫지 않는다면 사회적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의외로 많을 텐데….”

시작부터 그는 ‘대화’와 ‘협상’을 힘주어 말했다. 노조가 얻는 게 없어도, 잃을 것밖에 없어도 협상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부분적인 양보를 하더라도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질서에서 자신들의 입장이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껏 민주노총은 (협상 없이) 투쟁만 한다고 하면서도 한국노총을 통해 간접적인 협상을 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노총으로선 싸우고 있는 민주노총의 주장을 완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장과 해법은 다르지만 대화하지 않고 싸우기만 하면 뒤틀려 있던 문제가 오히려 더 쌓일 뿐이다.”

‘최대공약수’적 결정만 하면 어쩌나

약력
1957년 출생
1976년 서울대 전기공학과 입학
1990년 전국택시노련 상근
1994년 영국 러스킨대 유학
2000년 영국 워릭대 산업경영학 박사(동 대학 노사관계학 석사)
2002년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고위지도자과정 주임교수
2005년 한국노동연구원 국제협력실장, 노사관계연구본부 본부장(현)
그러면서 그는 민주노총 의사결정구조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소공배수’가 아닌 ‘최대공약수’적인 결정만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직 내부에서 누구 하나 손해 볼 수 있는 결정은 안 한다. 요구수준 차이가 있어도 중간치가 아닌 최대치만 정한다. 그게 가능한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은 없다. 요구안이 높아지면 기대치가 높아지고, 웬만큼 관철해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강력한 투쟁을 배치하자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조직 내부 악순환의 고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가 지적하는 것은 ‘남발’되는 총파업 지침이다. 공무원노조까지 포함, 80만 조직이라고 하면서도 총파업 지침이 내려지면 따르는 조직은 절반은커녕 1/4 수준에도 못 미친다. 실제 지난 2일 비정규법 처리에 반발하는 총파업에 참가한 수는 민주노총 집계로 18만명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업장 문제로 이미 파업을 하고 있는 철도노조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실수(實數)’라고 보긴 어렵다. 그래서 노동부는 8만7천명이라고 집계하기도 했다.

누구의 집계가 맞느냐 시비를 가리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어쨌거나 ‘하는 곳’만 계속 ‘때려 박는’ 악순환은 이미 조직 내부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부 논의과정에서는 “파업을 못한 곳은 사유서를 제출하게 하자”, “몸으로 하기 어려우면 돈이라도 내야 한다, 파업 조직하기 힘든 곳은 조합원 1인당 5천원씩 내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총파업 지침 나와도 거의 아무도 안 따르고, 안 따라도 아무런 제재도 없다. 조직결정이 아주 우습게 된다. 모든 사람(조직)이 같이 할 수 있는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얘기한 뒤 감당 가능한 의사결정을 해서 같이 책임지고 평가해야 한다. 이건 조직 내부뿐 아니라 외부관계도 마찬가지다.”

붙들려 있는 현대차만 억울한 거지

그가 말하는 외부관계는 사회적 대화 등으로 대표되는 대정부 관계를 일컫기도 하지만 대사용자 관계도 마찬가지다. 90년대 초반 정도까지 노동운동이 힘이 있어 밀어붙이고 사용자들이 양보할 여지가 있을 때에는 ‘그런 방식’이 통했지만 이제 아주 일부,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을 제외하고 통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노동계)는 막강하다고 보는 건 오산”이라던 그는 “양보할 수 없는 것과 양보해야 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운동의 힘이 축적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그는 여전히 관료적 행태를 보이는 정부 일부 그룹들이나 특히 재벌로 대표되는 사용자들에 해서도 ‘각’을 세웠다.

“재계는 대화의 파트너로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사회적 타협이 제대로 되려면 삼성이나 엘지에서 총수가 나서야 하는데 절대 그럴 생각은 없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힘도 없고.” 이어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강한' 노조에 붙들려 있는 현대차만 억울한 거다.”

그러면서 ‘기본’을 지킬 것을 주문했다. 어쨌거나 노동계의 실질적인 발언권은 높아졌는데 그 권리를 행사할 만큼 자세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정치력이 떨어지는 게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회의 하자고 해놓고 내부 사정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 걸 쉽게 여기고, 물밑에서 얘기가 다 됐는데 협상장에서는 뒤집는 걸 예사로 생각한다.”

‘주관주의’에 빠져 있다던 노동계에 대한 질타는 이어진다. 이번엔 공무원이다. “공무원법 봐라, 어떻게 됐는지. 민주노총이, 공무원노조가 노동3권만 얘기하는 동안 정부 맘대로 시행령 만들어 버렸다. 적어도 협상을 통해 6급 이하에 대해 전면 허용하자고 했어야 했는데 안 했다. 못했다. 앞으로 공무원노조…, 어려워질 꺼야.”

그가 공무원노조운동 전망을 다소 어둡게 보는 근거는 이렇다. 지금도 해임자가 200여명인데, 1년에 4천만원 준다 해도 지금까지 모은 100억원이 넘는 구제기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또한 조직방침을 어기고 실제 각 지부별로 설립신고서를 제출할 경우 이 파열음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화되길 바라지는 않지만 “나중에 공무원노조가 껍데기만 남을 수도 있다”는 우려는 우려대로 남는다.

왜 ‘법’ 문제로만 비정규 보호 접근했나

비정규법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왜 법 문제로만 접근했는가” 하는 점에서.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를 통과한 법이 실제 시장에서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법으로 기능하겠는가 라고 묻자 그는 “당분간 긍정, 부정적 측면이 공존할 텐데, 과도기가 지나면 실효성이 입증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정부가 법안을 던지기 전에 노사 협상을 통해 비정규직 보호의 기본 방향을 세웠어야 했는데, 전략 없이 법안만 던졌다. 노동부 실책이 크다고 본다”고 했다. 물론 “거기에 대한 노동계 대응도 단선적”이었고.

그는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 대안을 함께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한다. 노동계 입장에선 사유제한을 하면 좋겠지만 사유제한을 하는 나라는 많지 않고, 정부 역시 그렇게 개혁진보 성향으로 짜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유제한을 법에 넣었다 해서 시장에서 제대로 기능할지도 미지수다.

“스페인에서는 워낙 임시계약직이 많으니까 사회당 정부가 임시계약직 제도 자체를 없앴다. 법으로 제도를 없애면 임시계약직이 줄어들 것이라고 봤는데, 임시계약직 비스름한 변칙적 비정규직이 많이 생겼다. 결국 실패한 정책이 됐다.” 그래서 스페인이 새롭게 시도한 것이 기존의 정규직과는 다른 정규직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실제 스페인에서는 부당해고로 판정나면 1년당 45일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했는데, 이를 24일 또는 33일로 줄이고 사회보장에 대한 사용자 부담도 줄였다. 그랬더니 비정규직도 줄어들고 고용도 늘어나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정규직 과보호를 줄이자는 논리와도 맞닿아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그 한 측면만 보지 말고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다는 얘기로 이해해 달라”고 답한다. 독일 폭스바겐에서도 노사가 ‘5000 * 5000 모델’에 합의하기도 했다. 이 공장에서 일할 사람 5천명을 지역 내 실업자 중에서 채용하고 이들의 총 월급수준을 기존 정규직보다는 낮은 5천마르크로 한다는 내용이다. “임금을 낮추는 대신 5천개의 일자리를 창출한 것인데, 나름대로 어려운 상황에서 노사가 새롭게 이노베이트 한 방법을 찾은 거다. 우리도 다양한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산업정책, 지배구조 문제 등에 개입력 높여야

실제 이런 방안을 논의하려면 일단 노조가 노동시장에 대한, 산업에 대한,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어야 하고 자기 정책, 자기 정치력이 있어야 한다. 최근 현대차의 일방적 납품단가 인하(CR) 요구에 반발하며 원-하청노조들이 공동으로 대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불공정거래의 고리를 끊기까지 ‘노동조합’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아직은 막막하기만 하다. 반대하는 파업? 성명서? 집회?….

“정책개발을 해 나가야 한다. 우선 대-중소기업 간 복지혜택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에서부터 산업정책에 노조가 직접 개입하는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는 또 이런 아이디어도 내놨다. “현대차노조로서는 임금협상 타결 직전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거다. 우리가 인상분 얼마를 낼 테니 회사도 얼마를 내라, 그렇게 모은 기금을 갖고 하청업체 노사를 불러 어떻게 썼으면 좋겠는지 협의하면 어떤가. 이런 데서부터 원하청 노조 연대가 시작되는 거 아닌가.”

이와 함께 노조가 국제활동에 더욱 적극 나서줄 것도 주문했다. 이미 외국자본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업도 많고, 또한 웬만한 기업은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에 제2, 제3의 공장을 설립해 놓고 있기도 하다.

“기업단위 생산이 세계화돼 있다. 노조 간부들이라면 일단 나가서 한번 봐야 한다. 그쪽 조건과 국내 조건은 어떻게 차이 나는지, 앞으로 일자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노동자들 간 국제연대도 고민해야 한다. 애써 외면한다고 현실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국제분업구조에 맞선 노조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현대모비스를 통한 부품사 수직계열화, 글로비스의 유가증권시장 상장 등을 통한 정의선 후계체제 완성 등 지배구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역시도 “섣불리 건들기 어렵다”고 했지만 “아예 이 참에 노조가 ‘정의선이 승계하라, 대신 노조가 경영에 책임있게 참여하자’ 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 서로 간 불신이나 ‘실력’ 문제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타협들이 이뤄진다면 자유주의 모델이나 앵글로색슨 모델에 대항하는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고 한다.

더불어 강조하는 부분은 직업훈련에의 노조 참여다. “앞으로 일자리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들어지더라도 (노조원 아닌) 다른 사람한테 돌아간다. 그런데 노조는 직업훈련 문제에 관한한 인식이 아주 일천하다. 영국에는 기업별 수준에까지 노조에 훈련담당 스탭이 있을 정도다. 어차피 훈련프로그램 등은 노사가 함께 만들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 민주노총이 중앙 정부와 협상을 해서 지원비용 등을 따내야 하는 거 아닌가.”

노조 편의적 산별, 성공하기 어렵다

일자리, 고용안정, 직업훈련 등 노조가 기업 외적인 영역에 대해 개입력을 높여내야 한다는 점에는 십분 동의가 되지만 여전히 노동현장을 돌아보면 암울하다. 노사 문제에 용역깡패가 설쳐대는가 하면,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도 적지 않고 타워크레인이나 송전탑 고공농성 등 극한적 투쟁이 비일비재하다. 웬만한 장기투쟁사업장은 몇백일을 넘기기 일쑤다.

“그게 정말 안타까운 문제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노동계가 정부에 대해 왜 ‘법과 원칙’을 사용자에게는 엄정하게 적용하지 않는지 따져야 한다. 구호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몇날 몇시에 어떤 사용자가 어떤 불법행위를 했는데, 어떻게 조치됐는지, 그 조치의 문제점은 뭔지, 담당자는 누구였는지 세세하게 준비해서 강하게 따져야 한다. 그래야 ‘법과 원칙’이 노조를 옥죄기 위한 수단으로만 쓰여지는 것이라고 제대로 비판할 수 있다. 한번 문제를 제기할 때는 상대가 ‘앗 뜨거라’ 할 정도로 치밀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 현실을 보면 안타깝다. 하지만 싸움 초기부터 ‘구조조정은 안 된다’ 하고 시작하니까 문제 풀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당장 해고될지도 모르는 조합원들로서야 투쟁밖에 생각이 안 들겠지만 산별연맹이나 총연맹은 산업의 흐름을 캐치해서 일정 부분 수용하는 전술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기업별을 벗어난 산별노조, 산별교섭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업별 특권의식 때문에 산별노조로 전환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전환해도 제대로 된 산별교섭을 하기도 쉽지 않다. “사용자들이 산별교섭을 터부시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단 ‘제안’을 하는 쪽인 노조가 전략을 잘 세울 필요가 있다. 기업별로 다 묶어놓고 사용자 나와라 하는 건 노조 편의주의다. 구획정리를 해야 한다.”

결국 사용자도 얻을 게 있어야 산별교섭에 나서는 만큼 사용자에 2중3중의 부담을 주는 방식이 아닌 '(이견대립이 첨예한) 핵심 쟁점은 밖으로 끌고 나와 타협한 뒤 사업장에 적용하니 좋다‘라는 식의 산별교섭 모티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산별을 얘기하는 노조 활동가들조차 서구 산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는 지적도 한다.

“실제 산별 단일협약을 체결하는 곳은 많지 않다. 지역별이든, 소업종별이든 협약이 다 각각 있다. 산별협약이란 이름으로 있는 협약이 몇백 개 된다. 획일적 협약이 아니다. 우리가 잘못 아는 게 많다.”

그래서 보건의료노조의 경우도 산별 차원의 기본협약은 단일하게 체결하더라도 세부 협약은 대학병원과 중소병원 등 특성별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건보다 더 큰 덩치인 금속산업연맹이 오는 6월말 산별전환 동시총회를 한다.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현대차나 기아차 등 대공장노조들이 산별로 전환할지 여부다. 또한 전환한 이후 조직체계나 교섭체계를 어떻게 가져갈까 하는 점이다. “현대자동차노조와 조그마한 부품사노조를 한 틀에 묶어 교섭하자는 것은 보건에서 대병원, 중소병원 묶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완성차부터 시작해야 한다. 완성차의 교섭결과가 하나의 패턴이 돼서 부품사 노사간 교섭에서도 영향을 주도록 해야 한다. 업종의 특성이나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임금, 근로조건 차이를 무시한 채 통째로 함께 가자고 주장해선 곤란하다. 특성을 반영한 적합한 교섭구조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부품사들에 비해 지불능력이 월등한 완성차들만의 또다른 담합구조가 형성되진 않을까? “교섭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 어쨌든 하나의 산별노조로 묶여 있는 건 분명하지 않느냐. 교섭을 별도로 한다 해도 조합비는 한 곳으로 모인다. 자원배분이 달라진다. 이건 엄청난 변화다.”

그렇다면 현대차 회사는? 완성차로서는 거의 독점적 지위에 있는데 혼자 ‘독박’ 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만약 6월에 노조가 산별전환을 한다면 올 임금교섭 막판에 타결 조건으로 내년 산별교섭에 나올 것을 요구하면 어떤가. 완성차 노사간 산별교섭을 한다고 하면 회사도 그리 큰 부담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혼자 맞던 매를 같이 맞자는 차원에서 회사가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분 수학전공 아냐?”…“‘시장’ 모르고 ‘노동’만 언급 곤란”

76학번인 그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제 때’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졸업장을 뒷전으로 한 채 어떻게 이 시대를 살 것인가 고민하던 그에게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84년 택시노동자 박종만씨의 분신이다.


당시에는 청계피복이나 반도기계, 대우어패럴 등의 투쟁도 많았지만 택시 등 운수노동자들의 투쟁이 줄을 이었다. 그 해 5월, 사납금 인하를 요구하던 대구택시 노동자 농성을 시발로 부산, 마산, 인천 등으로 택시 노동자들의 파업은 확산됐다. 보성운수, 한성여객 등에서는 안내양들이 승차를 거부하며 기숙사에서 농성을 하거나 집단 탈출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조 탄압 중단’을 외치며 박종만씨가 분신한 것은 운수노동자들의 분노와 절망을 극한적 형태로 보여준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 길로 그는 운수노동상담소를 찾았고 운수노동자들의 처우개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택시노련 상근활동까지 10년 가까이 ‘노조 활동가’로 살았다.


그렇게 불혹에 가까웠다.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아야 할 나이,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은, 노동운동 판이 사람을 ‘키우는’ 데 인색한 동네가 아닌가. 서른여덟의 나이, 훌쩍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좌파 정치학과 노동문제 연구로 유명한 러스킨대학을 거쳐 워릭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전순옥 참여성복지터 소장, 김현준 전교조 전 부위원장, 박태주 노동교육원 교수 등이 든든한 동학(同學)이었다.


“노사관계만이 아니라 ‘시장’ 측면서 접근할 필요”


다시 돌아와 6년이 지났다. 같은 한국 땅이지만 떠날 때와는 많이 다르다.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투쟁과 3저 호황 등 경제적 환경이 맞물려 기업별 노조가 압축적으로 성장했던 시기는 지났다. 노동을 둘러싼 내·외부 환경의 변화와 함께 법제도 변화도 코앞이다. 더이상 기업별 체제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는 “변화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나같은) 노동문제 연구자들이 변화의 상을 잡고 이슈화시키고 정책제안을 해서 노사정이 각각 합리적으로 방향을 선택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 진영에는 국제적인 안목을 가질 것과 노동문제를 ‘관계’적 측면보다는 ‘시장’, ‘고용’, ‘직업훈련’ 등의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함께 주문한다. “우린 이미 동아시아 경제권에 깊숙이 편입돼 있다. 우리가 주체이기도 하다. 사업장 단위에서의 갈등적 관계를 벗어나 노동정책, 인사정책, 직업훈련, 고령화 등 중장기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개발, 해법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운동의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


다소 생뚱맞은 질문도 던져봤다. “노사관계 전공한 거 후회한 적 없는지”. 최근 거의 한계상황에 달한 듯한 기업별 중심 노동운동을 보면서 몇몇 노사관계 전공자들이 농반진반으로 “이제 IR(노사관계)에서 HR(인적자원)로 전공을 바꿔야 겠다”고 내뱉은 소리를 들은 터였다. “후회, 왜? 난 노사관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노조운동, 노사관계는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할 일이 많다.”


박태주 교수의 말처럼 “치밀하고 꼼꼼하고 진지하고, 호기심도 많고 일 욕심도 많아 매일 바쁜” 그에게 지인들은 이런 주문을 하기도 한다. “‘관변’단체 학자라서 (노동계로 볼 때는) 깎이고 들어가는 이미지가 있지만 지금처럼 중립적 태도로 노조에 대해서도 쓴 소리 아끼지 않길 바란다.”, “노동을 잘 아는 만큼 이제는 경영을 생각하는 노동을 가르쳤으면 좋겠다.”

무릇 ‘세상의 모든 일’은 지도자에 의해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바꿔내는 더 큰 힘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어디를 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지도자의 선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지면에서는 한국의 노사관계, 노정관계를 주도하는 ‘지도자’, 이른바 ‘선수’를 만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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