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세상의 모든 일’은 지도자에 의해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바꿔내는 더 큰 힘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어디를 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지도자의 선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지면에서는 격주로 한국의 노사관계, 노정관계를 주도하는 ‘지도자’, 이른바 ‘선수’를 만난다. <편집자주>



거침이 없었다. 특유의 ‘입심’으로 열이면 열, 어떤 질문에든 술술 답을 내놓는다. “이건 박스(기사)로 빼도 좋은데”, “이 얘기는 꼭 좀 써 주시고”, “우리끼리 하는 말(오프 더 레코드)이지만”…, 이란 전제까지 달아가며. 언변은 화려했고, 때론 마른 침을 튀길 정도로 격정적이었다. <선수 인터뷰> 아홉번째, 이용범 한국노총 기획조정본부장을 지난 7일 만났다.

"87년을 향수하기만 해서야"

먼저 이것부터 궁금했다. 정치판을 떠나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 노동자 대중조직이 ‘친정’이 아닌 한국노총이었는지.

“87년 체제가 20년을 지나는 동안 양대노총은 경쟁보다는 공조나, 연대, 통합의 기반을 많이 갖췄다. 양 노총 어디를 가도 '세상에 대한 개입력을 키우는' 일은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민주노총에서 그만뒀기 때문에 민주노총 복귀 절차를 먼저 밟아야겠다고 판단해 의사를 타진했는데, 당시(2004년말~2005년초) 내부가 사회적 대화 문제 관련해서 워낙 갈등이 심해 (복귀가) 쉽지 않았다.”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이 전체적으로 자본과 권력의 공세에 노출돼 있고 보수화 경향마저 띠고 있는 데다 비정규직, 노동시장 양극화, 신자유주의 광풍 등의 문제는 더이상 ‘벽돌 빼가기’로 대표되는 양 조직의 경쟁·대립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에 그에게 ‘둘의 차이’는 선택의 주요 판단기준이 아니었다. 물론 이념지향 상 차이는 존재하지만서도.

그럼에도 그는 ‘돌아가지 못한’ 친정의 운동방식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87년을 향수하는 듯한 방식으로는 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공세적으로 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전엔 지불능력이 있는 대공장 투쟁의 성과가 중소기업으로까지 내려가는 효과가 있었고 노동조건 개선투쟁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있었지만, 이미 ‘권력화’된 노조 활동가가 취업장사까지 하는 구조가 된 상황에서 외부의 비판을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맞받아치는 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솔직해지자고 했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임금인상투쟁 시기집중이니 하는 얘기조차도 쟁점이 안 된 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단위사업장 내부 문제로 파업을 할 때 연대파업전선을 구축하는 것도 잘 안 된다. 그래놓고 내부적으로는 ㅇㅇ파는 왜 파업을 조직 안 했느냐, ㅇㅇ연맹은 뭐했느냐, 하는 식의 천박한 공방만 이어지고 있다.”

이는 사회적 대화와 관련한 양 내셔널센터 대응방식의 차이에 대한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중앙의 의제를 갖고 교섭과 투쟁을 병행하는 문제에 관한 전략전술 개발이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적이 없다”던 그는, 특히 민주노총에 대해 “자신들의 담론을 쟁점화하고 투쟁하려면 사회적 대화는 불가피한데, 민주노총은 여전히 사회적 대화를 이데올로기 문제로 보면서 87년 방식의 논쟁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한국노총에 대한 메스도 함께 들이댔다. “그동안 (사회적 대화가) 현장의 요구와 불만, 투쟁 등을 조직하기보다는 무마하거나 우회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한국노총의 전선을 확대 강화하는 데 도움이 안 됐다.”

하지만 그는 한국노총 60주년을 맞아 제시된 ‘평등복지사회’, ‘참여와 사회연대적 노동조합주의’ 라는 새로운 운동이념과 기조에 대해서는 “잘 정리됐다”며, 산별노조 건설, 사회개혁투쟁 강화, 사회적 대화체제 구축 등 운동의 방향을 제대로 실천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노무현이 어때야 교섭할 수 있다는 거냐"

약력
1960년 출생
1979년 춘천고 졸업
1985년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
1986년 서울 수유중 도덕 교사
1988년 한국노총 섬유노련 기획부장, 조직부장, 교육부장
1990년 전노협 대협국장
1995년 민주노총 대협국장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춘천지구당 위원장
2000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
2005년 한국노총 기획조정본부장(현)
하지만 문제는 운동의 이념과 기조, 방향을 현실로 구체화시키기 위한 내부의 ‘실력’이다. “당장의 임금, 근로조건 문제도 중요하지만 내셔널센터라면 저출산 고령화 문제, 감세·증세 논쟁 등에 적극 개입해야 하는데, 그런 문제들이 제도권 정당 중심으로만 얘기되는 건 곤란”하다던 그에게 왜 개입을 못하냐고 물었더니, “관성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실력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실력을 키울까? 어떻게 정책역량, 조직역량을 강화할까?

“단위노조 교섭과정이 그렇듯이 ‘타결’이 목표가 되는 순간 협상 쟁점에 대해 굉장히 구체적인 대안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보면 사회적 의제에 대해서는 그런 부담을 안 갖고 있다. 그러니까 공자님 말씀만 하는 거다.”

실제 현장의 조합원들은 얼마의 임금요구안을 내고, 몇일간 파업을 하면 어느 수준으로 타결될지 ‘감’을 잡을 정도로 ‘빠삭’하다. 자신의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의제에 대해선 ‘감’도 안 올 뿐더러 대개 상층 단위 논의로 끝나기 때문에 현장의 이해관계로 다가오지 않는다. 또한 그 상층 논의란 것도 교섭, 대화 이런 틀에 ‘갇힌다’고 판단하는 순간 협상과 투쟁이 ‘병행’이 아닌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기 일쑤다. 그는 “그런 것도 이유가 있다. 좌파들이 바로 그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매도하면 그뿐인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최근 어느 좌담회에 참석했던 일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대화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이 어떻고 저떻고~, 하길래 까놓고 얘기했다. 그러면 개별 사업장에서는 왜 교섭하냐고, 사용자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한다는 건지 되물었다. 교섭은 이해가 다르니까 하는 것 아니냐. 노무현이 어때야 교섭할 수 있다는 건지….”

할 말은 많았다. “힘이 있는 만큼 교섭하고, 밀릴 때도 교섭하는 거다. 밀릴 때는 어느 선에서라도 저지하기 위해 교섭하고 타협한다. 그게 아니라면, 신자유주의를 분쇄할 힘이 있을 때에만 교섭하자는 거냐?”

한국노총 ‘뒷주머니 현찰’ 이미지 불식, 큰 성과

평가는 다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난해 4월, 비정규법을 놓고 국회 주도로 협상을 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사건이었다. 노개위 국면, IMF 시기 노사정 협상, 근로시간 단축 협상도 있었지만 그는 “그동안 협상과 비교할 때 가장 큰 특징은 노동이 공세적으로 의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는 양대노총 위원장 단식농성 등 투쟁도 하면서 교섭국면도 열고 비정규 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끌어올리는 최고치였다며, 이를 좀더 확대시켜 조세 문제나 사회복지 문제 등에서 구체적 성과를 따내기 위해 어떤 요구를 내걸지, 현장교육을 어떻게 할지, 어느 단위 누구와 교섭을 할지, 교섭국면에서 대중투쟁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하는 문제들로 고민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수정안’을 내는 등 한국노총의 막판 드라이브에도 아직 상황은 ‘끝’이 나지 않았고, 환경노동위를 통과한 법은 오히려 ‘수정안’보다 후퇴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의 성과로, 그는 먼저 더이상 한국노총이 ‘뒷주머니 현찰’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는 것을 꼽았다.

“양 노총 관계에서 보면 민주노총이 엄청 싸우고 있을 때 한국노총이라도 (정권과 자본과) 얘기가 되면 좋은 거고, 그러다 민주노총이 대화하겠다고 하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한국노총에겐 립서비스만 돌아오고 그랬다. 하지만 지난해는 적어도 그렇지 않았다.”

‘뒷주머니 현찰’은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돈이다. 결국 한국노총이 노사관계에서든 노정관계에서든 언제든 쓸 수 있는 카드였는데, 이제 그 ‘오명’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노총만큼의 대중적 신뢰를 갖고 있지 못한 것 역시 현실이다.

“얼마 전 민주노총 관계자가 이런 얘길 하더라. 현대차노조 선거에서 보수파인 이경훈 후보가 40%대 지지를 받아도 결국 민주파가 당선되지만, 이는 현장 노동자 다수가 민주노총에 동의해서 그런 건 아닐 수 있다고. 실리적으로 볼 때 아직은 민주노총이 도움된다고 보기 때문이란 것이다. 최근 들어 이 구도도 조금씩 깨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조합원들이 한국노총으로 올 것이냐는 점에서는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연대파업, 연대투쟁은 민주노총이 갖는 큰 힘이었는데 최근 철도노조 파업에서 보듯 그런 연대전선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조합원들에게 파업에 따른 물질적 실리도 없어 ‘이탈심리’가 생길 수도 있지만 한국노총은 여전히 켜켜이 쌓인 ‘대중적 어용’ 이미지 때문에 복수노조 시대가 열려도 조직구도상의 큰 변화는 없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노총 방식대로 하면 요구가 관철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 한.


"비정규법 파업, 아무 의미없다"

그렇더라도 그는 지난 비정규 협상과정에서 민주노총이 보여줬던 태도에 대해 아쉬움이 많았다. 아니 ‘불만’이라 표현해도 될 듯하다.

“충분히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어 끌고 왔기 때문에 4월 협상을 끝으로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막판에 마무리하지 못하면서 한 얘기가 6월 가면 (상황이) 더 좋다는 거였는데 결국 뭐냐, 아무 것도 한 게 없지 않았나.”

이는 올 2월 임시국회 평가에서도 똑같다. 회기 중에는 ‘저지’를 위해 몸싸움도 불사하면서도 회기가 끝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간이 간다.

“정말 저지할 것이라면 4월 국회까지 쟁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데, 교섭 땡 치는 순간 의제는 없어졌다. 그러다 다시 또 국회가 열리면 저지한다고 파업 조직하고 할 것이냐.”

지난해 11월말 한국노총이 수정안을 낼 때도 그랬다.

“노동계 제도개선 투쟁의 가장 큰 문제는 저지투쟁이지 쟁취투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투쟁 방식도 개발돼 있지 않다. 수정안을 내기 전에 양 노총 지도부가 만난 자리에서 민주노총에게 대안을 물었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사유제한을 쟁점화시켜서 끌고갈 것인지 안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안이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는 그는 2월28일과 3월2일, 민주노총의 비정규법 처리 저지 총파업에 대해서도 “운동적으로 아무 의미없다”고 잘라 말했다.

내용적으로도 그는 노동계가 비정규법 핵심 과제로 얘기했던 ‘사유제한’에 대해 ‘원칙’이 아닌 ‘투쟁의 과제’라고 말했다. 과제를 원칙으로 삼는 최대강령주의의 오류라는 말이다. 임금 100원 인상을 요구로 걸어놓고 그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란 것이다.

또 하나,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이 취약한 리더십을 극복하고 ‘결단’을 내렸더라면 수정안보다 좀더 나은 법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여당에서 ‘사유제한을 포기하면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의제를 명시하겠다’는 안을 민주노동당에게 던지기 전에 우리한테 연락이 왔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그렇잖아…, 수정안(막판 결단)은 우리가 냈는데 성과는 그리로(민주노총·민주노동당) 가게 되니까. 고민이 왜 없었겠냐만서도…, 대중적으로 볼 때 그 안이 (수정안보다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민주노총·민주노동당에) 던지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받지 않았고, 결국 한나라당 입장이 반영되지 않았나.”

당초 한국노총이 던진 안은 '파견 2년 + 고용의제, 불법파견 고용의무'였다. 그런데 여당에서 기간제 사유제한을 포기한다면 불법파견에 대해 한국노총이 낸 안보다 더 노동계에 유리한 ‘고용의제’를 부여키로 했음에도 이를 거부함으로써 합법파견에도 고용의제가 아닌 고용의무만 부여되는 식으로 안이 후퇴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100% 수용하고 있는 법은 없다”며 “교섭과 투쟁을 하되 어느 시점에서는 마무리할 줄을 알아야 하는데, ‘마무리’하면 조직 내부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 때문에 못한다고 하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이 나라 노동운동은 에너지에 비해 실속이 없다’고 한 최장집 선생의 말이 적확하다며.

그런데 아직 게임은 끝이 나지 않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도 남았고, 본회의도 남았다.

“한국노총은 적어도 4월 국회 때 (환노위를 통과한 법의) 재개정을 요구할 명분이 있다고 본다. 물밑에서 얘기됐던 안이 법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도 재개정 문제와 관련, 저지가 아니라 정말 구체적으로 4월 국회에서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정책적,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거기에 맞는 실천을 해야 한다고 본다.”


로드맵, 적절한 타협지점 잘 안 보여

‘실력’에 맞는 교섭과 투쟁, 그리고 ‘적절한 시기’의 마무리가 중요하다던 그였지만, 당면한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진 못했다.

“로드맵 내용이 노동조합의 입지 자체를 규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노조 운신의 폭이 많지 않고, 운동판 선수들이 잘 알다시피 적절한 타협지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쟁점화가 유리한가에 대한 판단도 잘 서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노총 60주년 기념 새로운 운동방향에서 제시된 것처럼 ‘사회적 대화체제’를 잘 활용한다면 뭔가의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노총은 4가지 대화를 중층적으로 활성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사정위 정상화는 물론이고, (노사정위에는 참여하지 않을) 민주노총도 참여하는 노사정 대표자회의, 중앙단위 노사대화, 노사정+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 구도도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로드맵이 주요 의제로 설정돼 있는 순간, 내용에 대한 공방이 자칫 이같은 사회적 대화틀 유지 또는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대화틀이 원활히 가면서 로드맵이 더 순탄하게 논의될 수도 있고, 로드맵이 제대로 논의 안 되면서 다른 대화틀도 다 파탄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점치지만 그 역시도 로드맵 내용에 대해서는 ‘원칙’ 이상의 것을 내놓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정부가 법과 원칙이란 이름 아래 일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지는 않을 것 같고, 로드맵 일방 강행처리를 시도하지 않는 이상 사회적 대화 활성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리고 이상수 장관에 대해 ‘그림만 그린 채 현장을 핸들링 하지 못했던’ 권기홍 장관 체제나, ‘그림은 없이 현장만 핸들링 하려 했던’ 김대환 장관 체제의 장단점을 잘 융합할 것으로 본다는 기대를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곧 선거다. 한국노총은 야심차게 녹색사민당을 만들어 2004년 총선에 올인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이남순 위원장은 사퇴해야 했다. 사실 5·31 지방선거에서 노총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별로 없어 보인다. 정치방침이라고 해야 독자정당 건설,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제정당과의 연합, 등거리 외교 이 세 가지 외에 달리 없다. 이 모든 것을 한국노총 ‘단일’한 방침으로 선택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다. 오히려 문제는 당장의 5·31 지방선거 이후 한국노총을 관통할 정치방침의 결정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민주노총과의 관계설정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대중의 이해를 가장 잘 대변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데, 그럼에도 비정규법 과정에서 보듯 급진적 모습이나 이념적 문제로 (민주노동당을) 소화하지 못하는 (한국노총) 조합원도 있을 것이고, 민주노‘총’당이라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련해서 고민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 하나는 민주노동당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민주노총과 통합 문제를 고민하는, 또 하나는 민주노총과 대중적 연대를 하면서 민주노동당과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장 민주노총과의 통합을 얘기하기 부담스러우니까 전자 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현실적 경로는 민주노총과 연대공조가 있는 가운데 그것이 민주노동당 활동에 반영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 대답의 말미, 의미심장한 말도 함께 건넨다.

“지금과 같이 민주노총과의 공조연대보다 차별경쟁이 더 강해질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이념적인 운동기조 상의 차이로 틈이 벌어진다고 하면, 한국 정치체제의 재편 문제와 연동해 민주노동당과는 다른 정치적 선택도 할 수 있겠지.”

긴장, 선택, 책임…"각이 있는 건 늘 다칠 수 있어"

대학을 졸업하고 한때 교편을 잡기도 했던 그는 안양에서 현장활동을 하다가 1988년 한국노총 섬유노련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다 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만들어지면서 ‘노동조합운동’을 두루 경험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섬유노련에서 광범위한 노조설립운동을 직접 경험한 것과 산하 조직 임금지침 작성, 노동법 교육 등을 도맡았던 게 큰 장점이 됐다.


“다들 혁명가들이어서 그런지 초기에는 전노협 안에서 개량주의자라는 소리도 엄청 많이 들었다”던 그는 전노협, 민주노총을 거치는 동안 민주노조운동진영의 ‘입’으로 활동하다가 96년 노사관계개혁위 활동을 계기로 이 바닥을 떠나게 된다.


“당시 민주노총 실무창구였는데, 당시 쟁점은 (법적 제약이 많았던) 집단적 노사관계는 풀고, 개별적 노사관계는 유연하게 가자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이 처음으로 이른바 ‘딜(협상)'에 나섰던 시기였다. 그런데 민주노총 합법화 등 중요한 문제가 많았음에도 조직이 그 협상의 긴장력을 이기지 못했다. 협상의 리스크가 생길 때마다 그걸 다 껴안아야 하는…, 그런 역할을 하다가 결국 사표를 낸 거지.”


그때가 ‘가장 미쳐서 살았던 시기’였음에도 스스로의 ‘흥’이 깨졌고, 열정이 떨어진 곳에서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덜컥 사표를 냈다. 그뒤 정말 6개월 가량 백수 생활을 했다.


세상에 대한 개입력을 키우려고


“우연한 기회에 당(새정치국민회의)에서 날 찾아왔다. 2년이나 공석이었던 춘천지구당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한달 정도 고민했는데, '보스'로 한번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내 구상과 기반 하에 세상을 살아보자고. 아무리 척박하더라도 재야운동 할 때만큼 힘들겠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정권교체라는 대의도 있었고….”


그러다 2000년, 2004년 두 번의 총선을, 한 번은 낙하산 공천(이상용 전 노동부장관이 춘천에서 공천을 받았다) 때문에, 한 번은 분당에도 탄핵에도 동의할 수 없어 스스로 민주당을 탈당했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치렀다. 후유증은 컸다. 특히나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선전했고,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자신의 정치행보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은 셈이 됐다. 이제는 중1, 고1이 된 아들딸에게나 약국을 운영하며 대신 생계를 맡고 있던 아내에게나 미안한 마음도 컸다. 그때 나이 마흔다섯, 그는 다시 베팅하기로 했다. 대중조직으로 컴백해서 다시 삶의 기반을 다지고 변화된 사회 속에서 거취를 다시 판단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운동을 하냐, 정치를 하냐고 물으면 ‘세상에 대한 개입력을 키우려고’ 라고 답한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양 노총 통합이 하나고, 또 하나는 통 큰 사회적 대타협이다. 5년 정도 시간을 갖고 변화를 꾀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굴곡이 심한 삶의 궤적 때문에 그는 언젠든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고 있기도 하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노총에 있는 한 차기 총선이나 대선 때 개인적인 베팅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조활동가가 정계로 진출하는 것처럼 정계에 있다가 노조로 오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으면 좋겠다.”


결단할 때는 결단해야 한걸음씩 간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에 관한 꿈을 ‘접은’ 건 아니다. 그는 늘 고민한다. “해당 시기에 내 조건 속에서 사회에 대한 발언권, 개입력을 최대한 가질 수 있는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말이다.


그의 좌우명은 ‘긴장, 선택, 책임’이다. 말 그대로 긴장 속에 선택하고,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자는 것이다. “난 ‘예각적’이란 말을 좋아한다. 각이 있는 건 늘 다칠 수 있지만 선택하지 않으면 책임질 것도 없고…, 그렇지만 한 걸음 가는 것도 없다. 그런데 자꾸 실패를 하고 좌절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살자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상황이 닥치면 예각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정기훈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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