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계급투쟁’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노동의 흔적을 얼마나 제대로 기억하느냐에 따라 전체 역사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위치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기억되는 것은 늘 ‘주류’였다. 힘과 권력이 없는 노동자는 역사 속에서 잊혀지게 마련이고, 때론 왜곡된 채로 기억의 한 모퉁이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1970년, 여공들의 삶을 ‘그녀들의 눈높이’로 접근한 <여공 1970, 그녀들의 반(反)역사>(이매진 펴냄)라는 책이 더욱 눈에 띄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비주류 중에 비주류인 ‘여공’들의 역사에 37살 소장학자 김원 교수(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정면으로 돌진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02년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교한 <여공 담론의 남성주의 비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를 발전시켜 지난해 말 책으로 발간했다. 그는 이 책으로 고 김진균 서울대 교수를 기리는 ‘김진균상’ 학술상 부문 1회 수상자로 결정돼 11일 시상식을 갖기도 했다. 김원 교수를 지난 17일 만났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가기 전에 그에게 우선적으로 궁금했던 세 가지를 물었다. 일명 ‘김원 교수에게 묻는 세 가지 왜?’

- 왜 ‘여공’이었나.
“여공은 산업화시기 정부, 고용주 그리고 시민사회 내 구성원들이 여성노동자들을 차별하기 위해 썼던 말이다. ‘공순이’와 번갈아 사용된 이 말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다른 복합적인 의미를 가졌다. 작업장, 노동운동, 기숙사, 소모임, 생활 속에서 여공은 모두 존재했지만, 이들을 여공이라고 부르는 담론은 다층적이었다.

내가 문제를 삼는 것은 여공에 대한 ‘지배적 담론’이다. 이 글은 여공의 일상을 분석한 글이라기보다 여공을 규정하던 지배적 담론이 숨기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여공이라는 담론을 둘러싼 힘의 관계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여공'이라는 담론을 둘러싼 힘의 관계를 추적하다

- 왜 1970년대인가.
“70년대, 정확하게는 1960~70년대 이른바 발전주의 시기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해방 8년사, 한국전쟁, 그리고 1950년대와 상이한 사회가 구성된 시기다. 토대라는 수준에서 임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했고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이 국가의 지상과제로 상정됐다. 농촌사회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산업사회로 이행되던 시점이다.
이와 함께 여성노동의 경우도 이전 가부장의 종속된 대상에서 ‘근로여성’이라는 ‘노동하는 주체’로 의미가 부분적으로 강화됐다. 바로 그 시점이 1970년대 초반이다. 또 하나는 70년대는 현대 한국사회를 형성한 ‘현재진행형’ 혹은 ‘기원’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선택했다.”

- 왜 분석틀로 푸코의 ‘익명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이용했나.
“익명적 지식은 체계적인 형태로 정리되지 않은 보통사람들의 지식을 말한다. 또는 형식적인 체계 안에 포섭돼 은폐되거나 감춰진 지식을 의미한다. 지배적 담론은 자기 정당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관련 사건, 사실, 제도 등은 유지하나 정당성을 흔드는 것은 배제, 은폐, 왜곡시킨다.
이 책은 ‘여공’에 대한 책이 아닌, 여공을 ‘둘러싼 담론’에 대한 글이다. 공식 역사에서 무시되고 사료로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배적 이야기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위협하는 수다, 잡담, 수기, 노래, 낙서 등 익명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지배담론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이른바 총체성이라는 이름 아래서 역사적 개별자(개별성)를 억압한 근대지배, 근대적 지식체계에 대해 가장 도발적 비판을 제기한 사람은 푸코였다. 내 책은 지배적 역사해석을 해체하는 ‘반(反역)사’를 지향했다. 이 점에서 푸코의 익명적 지식이라는 문제설정은 의미 있다.”

이 책은 자그마치 860페이지 분량이다. 논문을 기초로 작성된 책이라 다소 딱딱할 것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여공의 수기와 인터뷰, 신문기사, 대중가요, 드라마, 소설 등 익숙한 자료들이 이용돼,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질 만큼 쉽게 읽혀진다. 당시 여공을 둘러싼 지배적 담론을 파헤치기 위한 김 교수의 노력은 정작 900페이지에 육박한 책의 두께가 아닌 내용을 보면 더욱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김 교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장 말하고 싶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동안 1970년대 여성노동에 대한 많은 자료 및 연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여성노동을 결혼 전 일시적 노동, 남성노동보다 열등하거나 여성노동의 저항을 경제적이고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 왔다. 이러한 지배적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는 것은 여성노동을 둘러싼 연구자, 노동운동가들의 남성주의 관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노동에 대한 남성주의 관점은 단지 1970년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1987년 노동자대투쟁,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재생된 여성노동에 대한 ‘특정한 담론’이 만들어낸 효과라고 본다. 여성노동을 둘러싼 담론 분석을 통해 노동운동과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 안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남성주의’를 폭로, 해체하고 싶었다.”

'격하'와 '신화화'는 동전의 양면


그의 목소리는 한 단계 올라갔다. 그러면서 이제껏 그 누구도 ‘감히’ 칼을 들이대지 않았던 70년대 여성노동자의 투쟁에 날카로운 지적을 가한다.

“또 다른 하나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노조운동을 ‘신화화’ 시키는 지배적 담론을 비판하고 싶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그간 노동문제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70년대 여성노동의 저항을 ‘경제투쟁 혹은 조합주의적 투쟁’으로 격하시켰다. 이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의 저항, 노조운동을 무모순적인 것으로 신화화 했다. 이것이 여성노동운동에 지배적 담론이 됐다.

결과적으로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내적인 모순과 한계는 지속적으로 은폐됐다. 저항과 운동의 역사에서 투쟁 주체들의 헌신과 희생은 존중되고 역사적 의의로 간직돼야 하지만 역사는 장밋빛 과거만 기록할 수 없다. 그 안에 아로새겨진 모순과 균열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운동사의 모순과 균열을 감추려는 지배적 이야기가 있다면 거침없이 그 껍데기를 벗겨내야 한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민주노조 신화 ‘뒤집어 보기’, 종교단체와 여성노동자 간의 숨겨진 비밀들 등의 주제로 책 속에 낱낱이 소개돼 있다.

남이 가지 않던 길을 만들어서 가는 길은 그만큼 고된 작업이다. 주류 사회에 저항도 이겨내야 하고 내가 가는 길이 맞기는 한 것인가 의구심도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논문과 책 발간까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어려움이라면 여공담론을 둘러싼 지배적 시각이나 담론에 대한 비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지식사회 내 움직임이다. 대표적인 예로 운동권 비판은 ‘적’을 이롭게 한다는 식의 반응이다. 또는 ‘왜 남성이 여공에 대해 연구했는가’ 등의 시각이다. 이는 여전히 한국 지식사회가 폐쇄적이며 개방적인 학문공동체로서 기본적 전제조건이 결핍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문적 영역이 마치 미식축구의 ‘땅뺏기’처럼 인식되고, 서로의 독창적인 연구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비판하기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풍토는 아직 한국 지식사회는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김원 교수의 ‘주류 비판하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9년 주류 학생운동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한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으로 김 교수는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진보적 소장학자의 운동권 비판은 보수학자들의 그것과는 강도가 달랐다. 이처럼 김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은 운동 내부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내리꽂기 때문에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다.

“전공은 한국정치를 했다. 하지만 늘 ‘과연 나의 학문적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곤 한다. 정치학, 역사학, 사회학, 여성학, 문학 등에 걸쳐 있는 제 연구는 주류 학계의 흐름이나 질서와는 한 걸음 떨어져 있다. 지배적인 해석과도 거리를 두고 있어 읽은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학자로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글쓰기, 그리고 주류적인 것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저 나름대로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잊혀진 개인과 집단들을 불러내는, 다시 말하자면 세상이 잊어버린 그들과 세상이 대화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연구의 목적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 산별로 변해도 안 바뀔 것"


내친 김에 그에게 불편한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젊은 소장학자 입장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쓴 소리’를 부탁했다. 물론 최근에는 너무 많은 쓴 소리 때문에 노동운동이 ‘고초’를 당하고 있지만 김 교수의 생각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민주노총이 과연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대표체’로 현재 기능하며 그럴 의지가 있는지 매우 회의적이다.” 처음부터 강도가 세다.

“물론 활동가들의 실천상 어려움이나 개인적 고뇌와 희생을 내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 분파의 이익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민주노총은 현재도 위기지만 반복적인 위기와 와해를 맞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일부에서 지겨울 정도로 이야기하는 산별노조로 조직이 변해도 안 바뀔 것이다. 노동운동은 그 탄생부터 직종, 성별, 지역 등을 넘어선 ‘연대’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연대를 포기한 혹은 운동적 레토릭(수식어) 정도로만 인식하는 노동운동은 ‘죽은 노동운동’이다. 주변계급과 집단을 조직대상으로 진정하게 여기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내놓기 전에는 민주노총은 앞에 수식어 ‘민주’자를 떼어야 할지도 모른다.”

노동운동에 애정을 갖고 있지만 애정 어린 말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해야 할 것 같다며 김 교수가 던진 말이다.

이 책을 쓰면서 김 교수는 스무살 당시 철거민촌 ‘봉사활동’에서 만난 어린 소녀 민정이와 연수가 기억에 많이 남았다고 한다. 이 책이 널리 알려져 지금은 20대 후반이 됐을 두 소녀들이 책을 읽어준다면 더 없이 기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 책에 쏟은 김 교수의 열정이 두 소녀에게도 부끄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주류 거리두기’ 행보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김 교수의 머리 속에는 무궁무진한 연구과제들이 담겨 있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가 주변부를 철저히 외면한 결과다.

“앞으로 1960~70년대 주변계급의 역사와 지성사에 대해 연구할 예정이다. ‘여공 1970’의 연장선상에서 저항의 흔적이 없다며 역사에서 지워졌던 산업화 시기 집단과 개인의 삶, 혹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구할 생각이다. 이와 함께 산업화 시기 그리고 1980년대 지식의 역사를 연구할 계획이다. 특히 민주주의, 민주회복, 노동해방, 민족해방 등으로 대표되던 당시 저항적 지식·담론의 역사와 구성을 살펴보고 싶다.”

물론 김 교수의 연구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또다른 측면에서 제가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산업화 이후 최근까지 ‘주변부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구조 문제다. 산업화 시기 여공과 함께 현재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시기는 다르지만 사회와 사회운동에서 ‘타자’이자 ‘주변집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주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성노동자들은 사회운동과 민주화 됐다고 자부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신자유주의 시대 여공의 다른 이름이다.”

주류와 ‘거리두기’를 통해 세상에 말을 거는 김 교수의 발길이 앞으로도 상당히 바빠질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길이 무엇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어떤 잊혀진 것들이 다시 현재에서 부활해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를 얻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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