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82년 4월 하순 학교에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하자는 유인물을 뿌렸다는 혐의로 경찰서로 연행된 적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어두운 사무실 ― 전등을 다 끄고 달 빛 정도로 겨우 윤곽이 드러나는 ― 에서 10여 명의 형사들에 둘러싸여 집단린치를 당했다. 이어 소위 ‘통닭구이 고문’이 시작됐다. 발바닥을 계속 때리다 물고문이 시작됐다. 눈을 가리고 주전자 물을 입에 부었다. 계속 발버둥을 치자 거의 질식하기 직전에 멈추었다. 이런 과정이 여러날 되풀이되었고 유치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면서 그야말로 이제 생명은 건졌구나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육체적 고통이었다면 이제 하루가 십 년처럼 느껴지는 수형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과 차단된 채 1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세월이지만 필자에게는 10년쯤으로 느껴지는 세월이었다. 그것으로 내 짧은 청춘도 다 흘러갔다. 

목 졸리는 데 우아할 수 있겠는가

본질적으로 국가권력은 폭력이구나라고 느낀 것이 그때였다. 고문받을 당시에는 ‘내 손에 도끼만 쥐어진다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폭력 자체에 대한 증오는 역으로 생명존중에 대한 무게감으로 이어졌다.

좋은 폭력, 나쁜 폭력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를 때리려는 자에게 손을 꽉 붙잡고 폭력을 못하도록 힘을 행사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한번 떠올려보자. 멀리는 4·3제주도민학살사건 가깝게는 광주민중학살 등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의 기억들이 집단적 무의식 속에 엄연히 살아 있다. 학살의 책임자들과 그 당시의 집권책임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진정한 해원(解?)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폭력만 폭력이 아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라는 제도적, 이념적 폭력이 더해지고 있다. 지금도 하루 30명씩 자살을 하고 있고 지난 10년간 자살자 누계는 7만명이 넘는다. 농민들은 이미 희망을 버렸고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목 졸리는 자는 발버둥을 치기 마련이다. 언론들과 식자들은 말한다. 좀더 세련되게 발버둥칠 수 없냐고. 머리띠 두르지 말고 좀더 예쁘게 외칠 수 없느냐고, 참 부담스럽다고…. 그래서 조용히, 그리고 우아하게 집회를 하면 그때는 신문 한 줄 나지 않는다.

지금은 웬만큼 소리친다고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회가 아니다. 그저 사람이 죽고 스스로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야 간신히, 그야말로 간신히 언론에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위하는 사람들 다 붙잡고 물어 보라. 시위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폭력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문제는 시위의 폭력성(?)이 아니다. 우리 민중들이 갖고 있는 ‘살인의 추억’에 대한 집단적 피해의식에, 더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현실적 피해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다. 

신자유주의 찬가야말로 거대한 폭력찬가

말이 좋아 신자유주의이지 외세자본의 이익을 더 잘 보장해주기 위한 국가적 동원체제 아닌가? 한국경제가 없어진지는 벌써 오래 전이고 미국은 쌍둥이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한국 같은 호구를 더 쥐어짤 수밖에 없다.

한국 지식인사회, 기득권사회의 곳곳에 뿌리내린 신자유주의 찬가야말로 거대한 폭력찬가이다. 자본가들이 세련되게 민중들의 과격함을 비난하면서 평화시위를 외칠 때 우리의 어린 전경들이 그들의 구호에 맞추어 농민들을 방패로 찍어 척추를 부러뜨리는…. 이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시위대의 폭력? 좋다. 절대로 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도 더이상 어린 전경들이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집회 때마다 걸려오는 항의전화에도 신물이 난다. 그러니 이제 별 효과도 없는 과격한(?) 방식은 그만두자. 그러나 한국 민중들의 골수까지 빼가려는 미국자본과 이에 기생하고 있는 정권의 반민중 정책의 폭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건지, 목 졸려 이미 눈빛이 꺼져가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건지 분명히 좀 말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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