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우리나라 기차의 등급은 새마을, 무궁화, 통일, 비둘기의 순이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열차 등급이라고 예외로 하지 않는 법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잘살아보세(새마을)'가 '평화(비둘기)'나 '통일'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제 '잘살아보세'의 자리에 영어 첫자로 엮여진 국적불명의 'KTX'가 들어섰다.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를 떠올린다면 무리한 연상일까.

우리가 경멸하고 혐오해 마지 않는 이웃나라 일본이지만, 그들이 자랑하는 고속전철 신칸센에는 히카리(빛)나 노소미(희망) 따위의 이름이 붙어 있다. 아무튼 새마을이 무궁화가 된 것 같다는 승객들의 불평을 뒤로 하고, KTX는 오늘도 달린다.

새해다. 동트는 해를 바라보며 질주하는 '꿈의 열차' KTX를 운행하는 기관사의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산다는 게 무슨 해맞이 이벤트는 아닐 것이고, '꿈의 열차'라고 하지만 그 열차를 모는 기관사와 그 열차에 타는 승객까지 '꿈의 기관사', '꿈의 승객'은 아닐 것이므로, 따로 특별한 것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윤보식 기장. 그는 철도노조 조합원이자 KTX를 운행하는 기관사다. 새해를 이틀도 채 안 남긴 12월30일, <매일노동뉴스>는 윤보식 기장이 운행하는 KTX에 동승, 20년 가까이 기관사로 살아 온 그의 과거와 현재로 달렸다. 새해 소망도 함께.

"출발! 정지!…집중! 집중!"

아침 7시15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 32호차다. 이 차를 운행할 보식씨는 출발시간 50분 전인 6시25분, 서울고속철도 기관차승무사무소에 출무를 했다.

출무란 일종의 출근인 셈인데 철도기관사의 출퇴근 시간은 한달 동안 날마다 다르다. 기관사가 출무신고를 하면 사무소의 운영팀장은 출무신고를 하는 기관사의 상태를 살펴본다. 평소와 다름없는 정상적인 상태인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다. 출무신고를 한 보식씨는 운전명령시행전달부 등을 확인하고 7시경 KTX 32호차 조종실에 올랐다.

조종실은 1평도 되지 않는다. 기장석 바로 앞에는 운전데스크, 오른쪽에는 GPS시스템이 놓여져 있다. 제동기능, 행선지 표시, 운행기록이 입력된다는 '데카'(운전데스크와 GPS시스템 중간에 위치)를 보며 운행 준비를 하고 있는 보식씨의 모습이 긴장돼 보인다.

“출발할 때와 정차할 때는 기장님들이 집중을 해야 돼서요. 사람들이 알기를 KTX는 전자동인 줄 아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승한 철도노조 정태찬 운전국장의 설명이다. 고속전철이 제 아무리 최첨단기술로 무장돼 있다 하더라도 아직 아날로그 영역이 남아 있다. 여기에다 기존선 구간이 꽤 된다. 기존선 구간에서는 고속열차라도 일반열차를 운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존 열차의 경우 2인승무제다. 기존선 구간에서 기관사와 부기관사, 둘이 하는 일을 고속철도 기장은 혼자 해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레버 형태의 엑셀레이터를 올려 출발을 하고 난 다음에도 보식씨의 눈과 손은 바쁘다.

철도의 신호시스템은 상당히 복잡하다는데,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600~800m간격으로 신호등이 있었다. 이 신호를 보며 선로마다 정해진 속도(각역의 선로마다 최고속도가 있는데, 어느 구간은 80km 구간, 어느 구간은 90km 구간, 이런 식이다)를 내줘야 한다. 절연구간이 나오면 펜터그라프(전차선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장치)를 바꾸는 단추를 누르는 등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보식씨는 손을 많이 움직였다.

"해고된 동료 생각도 운행중에는 '사치'…"

광명역부터 고속선 구간이다. 지상신호기가 보이지 않고 쭉뻗은 선로 주변에는 펜스가 쳐져 있는 게 기존선 구간과 달라 보인다. 고속전철은 신호감지기가 차체에 있다고 한다. 기관사는 고속선 구간에서는 신호에서는 어느 정도 해방되는 셈. 고속선 구간에서 속도를 자동으로 맞춰주는 기능을 이용해 운행을 할 수 있기는 한데, 중간중간 정차역이 있어 다시 손발을 움직여 운행해야 된다.

오전 7시37분경, KTX의 속도가 시속 300km를 돌파했다. 그제서야 보식씨가 입을 뗀다. “속도감이 느껴지죠? 이 속도감이 체질에 안 맞아 돌아간 기관사님들도 계십니다.” KTX 기장의 자격요건은 까다롭다. 2003년 1기 선발 당시 자격요건에 따르면, 경력10년의 기관사 가운데 책임사고가 없어야(무사고) 하고, 적성검사 결과 가운데 한 항목에서라도 ‘마’급이 없어야 하며, 신체검사에서도 재검사를 받지 않아야 됐다. 현재 5,600여명의 철도기관사(부기관사 포함) 가운데 KTX 기장은 5%에도 못 미치는 250여명이다.

자격요건이 됐던 보식씨는 KTX 기장 1기를 선발할 때 응시해 교육, 시운전 등 과정을 거쳐 2004년 4월1일 KTX가 개통할 때부터 일을 해 왔다. 그런데 보식씨의 차림은 KTX 기장의 유니폼이 아니라 철도노조의 쟁의복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보식씨. "사실 제가 노조 일을 꽤 했어요. 1997년부터 철도노조 서울기관차지부에서 총무부장, 조직부장, 부지부장 맡아 일을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낮에는 노조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승무하고. 새벽에 퇴근해서 다시 노조사무실로. 지쳐가던 와중에 지부장이 해고까지 돼 더 힘들어졌어요. 이때쯤 KTX 기장을 선발한다고 해서 응시를 했어요. 사실 제가 잘릴 차례였는데. 친구들 보면 미안하고 죄스럽고….”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보식씨.

출발한 지 1시간도 채 안 돼 보식씨가 운행하는 KTX는 대전 입구로 들어섰다. 정차 준비를 하는 보식씨.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보식씨는 집중했다. 사는 일이 다 이렇다. '친구들 보면 미안하지만', 승객의 안전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챙겨야 하는 KTX 기장 보식씨는 일할 때만큼은 상념에 빠질 여유가 없다. 그것이 보식씨의 일이고, 밥인 것이다. 어쩌면 슬픔이란 '유한계급'의 몫일지도 모른다.

"기차가 출발하면 오로지 혼자…그런데 아무나 할 수 있다구?"

날마다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시속 300km로 달리는, 길이 388m 중량 771.2톤의 이 거대한 열차를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기장 일이란 고독하기 짝이 없다.

물론 고속전철에는 컴퓨터를 통해 열차를 제어하는 장치인 차상컴퓨터(OBCS)와 차량의 성능과 현재 주행속도를 감안해 허용속도 초과 시 컴퓨터가 자동감속 하는 장치인 열차제동장치(ATC), 전력원격감시제어 설비(SCADA), 운전감시시스템 등이 있고, 이 모든 것을 관할하고 있는 관제실도 있지만, 기차를 움직이고 멈추게 하는 건 전적으로 보식씨의 일이다.

“운행하는 동안 긴장해서 주의 집중하고 있어야 되는데, 어렵고 피곤한 일이죠. 사람이니까 잡념이 생기기도 하고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주의력이 흐려지기도 하는데, 사고는 한순간이잖아요.”

KTX 기장들 대부분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운동을 한단다. 보식씨 역시 틈만 나면 걷고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들은 기분나면 왕창 마시는 술도 보식씨는 적게 마셔야 하고, 식사량도 조절해야 한다. KTX 기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이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명감이 있다.

“차가 출발하면 오로지 혼자예요. 중간에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우회전 좌회전도 안 되잖아요. 운전은 기본이고, 이외에 돌발상황이라든지 여러 상황에 대처해서 평소에 훈련하고 공부해야 됩니다.” 곁에 있던 철도노조 정태찬 운전국장이 볼멘 소리로 한마디 거들었다. “이런데도 파업하면 사측에서는 길가는 사람 데려다 몇시간 가르쳐주면 열차 몰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평상시, 일하는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쪽은 사측이다. 철도공사는 새마을호까지는 기관사라고 하면서 KTX는 기장이라고 말대접을 해준다. 그러나 파업을 하면 태도는 달라진다. 사측은 애써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을 하고, 노조에서는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노동의 '전문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자존심이다. 그럼에도, 속모르는 사람들은 ‘그 정도 월급에 안정된 직장에 불만이 있다면 내가 하겠다'며 한몫 거들고 나선다. 홧김에 서방질에, 지 곳간 비어가는 줄 모르고.

철도노조는 오는 2월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노조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 철도공공성의 강화다. 철도의 공공성과 철도노동자의 노동조건, 임금 문제 등은 연동돼 있다. 이리하여 철도의 공공성을 흐리려는 신자유주의정책의 대척점에 철도 노동자들이 서게 된다. 철도노조가 다른 정규직 노조보다 외주화 문제나 비정규직 투쟁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을 하는데 있어 사명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보식씨는 이번 파업 때 평상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편안하게 모셨던 승객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으면 할 게다. “아, 그 기차는 아무나 모는 줄 아요? 파업으로 불편해도 좀 참읍시다. 정 불편하면 철도 팔아먹을 궁리하는 철도공사하고 정부에 항의를 하자, 이거요!” 승객들로부터, 국민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게 되면, 보식씨들은 정말 일할 맛, 살 맛이 날 게다.


"내려갔다가 올라온다"

KTX는 10시21분 부산역에 도착했다. 정해진 시간보다 2분20초 늦었단다. 시간엄수가 중요한 보식씨는 여행을 다니면서도 계속 시계를 보며 계획했던 대로 다녔다고 한다. 어느 장소에서 지체되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식사도 거르면서까지 시간엄수를 했을 정도. 일종의 직업병이다.

이런 보식씨에게 천천히 여유를 가지며 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야박하지 않나 싶다. 외환위기 이후 한때 ‘느림’과 ‘게으름’을 찬양하는 말과 글이 쏟아져 나왔다. ‘빨리빨리’와 ‘열심히 뛰자’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여유가 없는데 여유가 있는 척하며 살아야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짐이다.

‘느림’의 선두주자 가운데 하나인 밀란 쿤데라는 그의 조국인 체코에서 사회주의 개혁운동을 주도했다가 추방당하다시피 한 망명자다. 좌절한 그가 빨리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 게으름을 찬양한 버트란트 러셀이지만 일생 동안 무려 40여권의 책을 펴냈고, 그가 남긴 명언 중에는 ‘나는 일하다 죽고 싶다’가 있다.

'느림' 역시 일정한 소유가 전제돼야 누릴 수 있다는 것일까. 하기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가장 각광받는 유행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삶의 질'과 '웰빙'이다.

기차는 섰지만 보식씨는 여전히 시계를 보며 정해진 대로 움직인다. 승객들이 내리면 운행해 온 KTX 32호차를 입환하고, 부산고속철도 기관차승무사무소에 무사귀환 했음을 알려야 한다. 사무실에서 나온 보식씨는 11시부터 12시30분까지 잠을 잔다. KTX 기장들 대부분 운행 뒤 1~2시간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한다. 혼자 식사를 하고 난 다음 다시 1시50분 출무를 한다. 오후 3시 KTX 7호차를 운행하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오전에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해야 된다.

잡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초단위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시간엄수와 맞서며.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는 막중한 사명감까지 안고, 왔던 길을 똑같이 되돌아간다.


"6개월만 하겠다던 지부 임원이 6년으로"

기차바퀴를 굴리는 보식씨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생활해 온 지 20년이 되어간다. 집안 형편이 넉넉치 못해 동대문상고를 다녔던 보식씨는 대학이 가고 싶어 철도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보통 대학과는 다른 특수한 대학이었다. “지금도 학교생활 생각하면 징글징글 해요. 교수님들도 엄하고, 고등학생들처럼 공부했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한 그해, 1989년 철도청에 입사했다.

“기관사 생활은 5년만 하려고 했어요. 그때는 철모르던 시절이었으니까 남들처럼 출세도 하고 싶었고….” 출세가 능력과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기관사는 기능직과 일반직으로 나뉘어지는데, 보식씨의 경우 기능직이었다. 대체로 철도전문대학 출신들은 일반직이 되는데 하필이면 보식씨가 취업하던 그해 일반직 자리가 없어 기능직이 됐다. 아무래도 기능직보다는 일반직에게 승진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고 한다. 이런 제도적 장벽에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오르기 위해서는 줄서기와 손바닥 비비기를 해야 되는데, 이것 역시 보식씨 체질에 맞지 않아 접고 말았다.

기관사로 사는 일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고속철도를 하니까 한밤중이나 새벽에는 운행을 하지는 않는데. 그때는 24시간 어떤 시간이든 운행을 해야 했고, 노동시간도 지금보다 훨씬 많아 정말 힘들었죠.”

1994년 전국기관사협회 파업, 그러니까 철도노조 내 기관사들의 단독파업에 보식씨도 동참한 이유다. “일이 너무 힘드니까 파업이든 뭐든 해서 고쳐야 되겠다 싶더라니까요. 그때 우리 구호가 ‘인간답게 살아보자’였어요. 이때만 하더라도 노동자의식은 없었고 노조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로서 각성을 하게 됐죠.”

보식씨는 1994년 파업을 거친 뒤 철도노조 민주화세력진영으로부터 제의를 받아 대의원에 출마를 해 당선이 됐다. 철도노조 민주화에 앞장섰던 서울기관차지부는 보식씨에게 지부 임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더 적극적인 요구를 했고, 보식씨는 “지부 임원구성이 잘 되지 않는다니 6개월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한 선배 기관사가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했지만 보식씨는 이미 노동조합의 마력에 끌리고 있어 소용이 없었다. 그 6개월이 6년이 되는 동안 보식씨는 노동조합의 핵심간부로 열심히 활동했고, 이제는 철도노조의 조합원으로서, 선진적인 의식을 가진 노동자로서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다.

철도노조 부산고속전철기관차승무지부 송하복 지부장과 철도노조 정태찬 운전국장과 함께 한 점심식사 자리. 별말이 없던 보식씨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 투쟁에서 다른 거 안받더라도 해고자들 복직만 돼도…." 그것은 조합을 여기까지 끌어왔던 보식씨들로서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관사라는 일, 자존심만큼 상처도 줬다

보식씨의 가슴에는 또 하나의 돌덩이가 들어 있다. 보식씨는 아내와 세살박이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지 못하는 아들이 둘이 있다. 열다섯살 된 큰 아들, 열두살 된 작은 아들. “아이들 문제는 정말 멍에예요. 제가 키우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잘 안 됐어요.”

가족들과 나란히 서 있으면 한국의 중산층 가장, 유니폼을 입고 KTX에 오르면 기장. 철도노조집회에서는 정규직노조의 조합원. 친구들과 술집에 앉아 있으면 40대 아저씨. 겉으로는 평범한 보식씨이지만 상처가 적지 않다. “어쩌면 노조활동이 제게는 도피처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맞벌이부부였는데 일하고 집에 가면 저는 혼자 밥 먹고 혼자 자고 했는데 그게 싫어서….”

변동적인 열차시간에 일하는 사람들의 근무시간을 끼워 맞추는 최고로 변형된 근무 형태인 교번제가 보식씨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던 게다. 물론 교번제를 하는 철도노동자라고 해서 다 가정생활에서 이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 보식씨 역시 “우리 근로형태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문제를 타인과 함께 겪을 때 축소되는 경우가 있고, 증폭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덜 여문 젊은날에는 더욱더 특별해질 수도, 증폭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정상적인 사회는 평범한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지는 않는다.

20대 청운의 꿈을 안고 철도청에 입사했던 보식씨. 직장생활을 통해 승승장구 하는 희망을 가졌지만 기관사로 만족했다. 그렇지만 자존심을 갖고 기관사로서 철저히 일했다. 무사고 운행기록을 갖고 있고, 전문분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동자로서 각성하고 노동조합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고. 자기 자신의 계발을 위해서 일어와 영어를 배우고, 여행을 다니고 단전호흡을 배우기도 하며 부지런히 살았다. 그러나 20년 기관사 생활은 KTX 기장이라는 영광도 안겨 주었지만, 상처도 함께 안겼다.

서울역에 도착했다. 저녁8시, 집으로 돌아가는 보식씨의 발걸음이 빠르다. 집에는 세살 된 딸 지원이와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보식씨는 빵집에 들러 지원이에게 줄 빵을 샀다. “집에 들어가면 ‘아빠~ 선물!’ 하는데, 요즘 선물을 많이 못 줬어요.”

보식씨가 대문을 열면 지원이는 “아빠”하고 튕기듯이 품속에 안길 것이다. 아빠가 사온 빵을 내놓으면, 지원이는 생일이 아닌데도 촛불을 켜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를 것이다. 이때만큼은 전세보증금 500만원의 사원아파트도 궁궐이 된다.

“남들은 시베리아를 지나 유럽까지 가는 대륙횡단열차를 모는 게 꿈이라고도 하고, 꿈도 많고 크던데, 저는 무사고 안전운행 했으면 좋겠고, 가족들 건강하게 지내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것 없어요.” 보식씨는 내일의 운행을 위해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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