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연구소는 지난 12월 14일 송년 토론회에서 <2005 대한민국 위기 주범 TOP 10> 및 <진보운동 위기의 5대 근원>을 발표했다. 위기 주범 TOP 10으로 노무현대통령과 한나라당, 이건희 회장 등을 선정한 가운데 그 하나로 “재벌 대기업 노조운동 진영”도 지적했다.

여기에 대해 민주노총이 자신을 한국사회 주범으로 선정한 것은 부당하다는 이의를 제기했다. 민주노총과 대기업 노동조합들이 연구소가 이러한 발표를 하게 된 진의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주체적 책임을 간과할 수 없다

심화하는 한국사회 위기의 책임을 지배세력인 자본과 정권 측에만 돌리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자본이란 원래 그냥 내버려 두면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1929년의 대공황이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정권과 정당들도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힘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자본의 이익에 더욱 노골적으로 복무할 수도 있고 복지의 확충으로 위기를 완화할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1987년 이후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경제?사회적 개혁과 진보가 지체되고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양극화가 심화된 이유는 개혁과 진보를  추진할 사회적 주체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운동의 주체적 책임이 제기되었고, 그 단위로 노동조합, 민주노동당, 진보진영 전체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송년토론회에서 임영일 교수는 “한국사회의 위기란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의 위기이다”, “운동의 위기가 사회의 위기인 이유는 사회구성원들을 주체로 불러 세우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주체가 곧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진보운동의 위기를 초래한 근원을 찾아보았다. 진보적 지식인그룹도 진보운동 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본 연구소도 진보적 지식인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연구소도 한국사회 위기에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기업별로 수천 수만명에 달하는 다수의 조합원, 매달 수천만원 내지 수억원에 달하는 조합비 수입 그리고 큰 대기업의 경우 수십명에 달하는 상근간부를 보유하고 있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핵심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 금속노조가 출범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다수의 대기업 노동조합들이 산별노조로 조직 전환을 하지 않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서의 실질적인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대기업 노동조합은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민주노총에 조합원수에 비례한 수의 대의원과 중앙위원을 파견하고 있으므로 민주노총의 역할을 결정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민주노총과 산업별 연맹을 매개로 민주노동당에 대의원과 중앙위원을 파견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노선과 실천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대기업 노동조합은 사안별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면서 연대기구의 사업방향을 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재벌 대기업 노조운동은 힘이 큰 만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기업 노조운동의 위기는 도덕성의 위기와 연대의 약화에서 비롯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귄위주의 시대의 노동자 무권리 상태를 극복하고 자주적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이 가능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민주노총은 적절한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기업 노동조합은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권력(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할 때 도덕성의 위기가 온다. 한국노총의 간부가 뿌리 깊은 건설부패와 관련되고 민주노총의 대기업 노동조합 간부가 인사 청탁 비리와 관련됨으로써 도덕성의 위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사회가 분화된 상태에서는 조직력이 센 집단이 그 힘도 크기 마련인데 대기업, 공공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대해 조직력으로 버팀으로써 자신들을 방어하고 임금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임금수준이 낮고 고용도 더욱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에 노동자계급 내부의 연대가 약화된 것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현장 조합원들로부터 간부진에 이르기까지 시야가 기업 안에 한정되었다. 기업들과 노동자?민중 전체의 삶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보고 대처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 상당부분이 불법 파견으로 판정되었는데도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채 단체교섭을 끝내는 등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의 비협조적 태도와 일반 조합원의 요구가 제약으로 작용하겠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정규직 노조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하는 것은 지도력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성의 위기와 연대의 약화가 대기업 노동조합과 그에 기반한 양대 노총의 위기를 가져왔다. 가장 큰 조직된 힘인 노조운동 진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함에 따라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다수 보통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권리 신장을 위한 실질적 민주주의는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는 곧 실질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연대의 강화를 위해서는 힘 있는 측이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

연대가 약화되어 임금 격차가 커지면 대기업들은 높은 임금을 이유로 외국으로 제조공장을 옮길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기업 노동조합의 힘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 미국의 경우 대기업과 대기업 기업별 노동조합은 협조적 관계에 있고 사회보장체제는 극히 취약하다. 그리고 최근 자동차 회사들이 종업원들에게 지원하는 의료보험료 부담을 이유로 캐나다로 공장을 옮기고 있는 실정이다. 연대의 약화는 부메랑이 되어 대기업 노동자들 자신도 공격당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의료보장제도(National Health Service)와 같은 소득재분배효과가 크고 효율적인 보편적 의료보장제도가 일자리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연대의 강화는 다소라도 힘이 더 있는 측의 양보와 희생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힘있는 세력이 시간과 관심, 수입 등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일부를 내놓고 기여해야 연대가 성립될 수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직접적인 실익이 없더라도 자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고 정치적 힘을 발휘하여 산별 노동조합을 확립하고, 민주노총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연대를 강화해야만 사회 위기의 진정한 주범인 자본 측에 맞서는 힘을 키울 수 있다. 

민주노총과 대기업 노동조합은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버티는 것은 조금씩 갉아 먹혀서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한국의 노동조합도 미국의 AFL-CIO와 같이 보수정당인 민주당을 지지하고 헛된 기대만 되풀이하는 처지로 전락할 수 있다.   

소통과 연대를 확대해서 위기 극복의 책임을 다하자

연구소가 재벌 대기업 노조운동을 위기 주범의 하나로 지적한 것은 결국 민중운동, 진보운동 진영이 스스로를 쇄신하자는 것이다. 민중 모두, 진보진영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면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에 재벌 대기업이 대표로  지목되게 되었고, 아픔을 입게 되었다. 주범이라고 표현한 것이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넓은 양해를 구한다. 그러나 비난이 아니라 대기업 노조운동이 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충정에서 비판한 것임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이번 일을 보면서 민중운동, 진보운동 진영 내의 소통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다. 앞으로 진보정치연구소는 노동조합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 진영과 소통을 확대하여 생산적 논의를 활발하게 함으로서 연대를 강화하고 한국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기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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