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냐 외자냐!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 한국 노동자에게 강요된 참으로 서글픈 선택이었다. 선천적으로 반노동자적인 재벌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때로는 ‘개혁’의 이름으로 찾아온 외자의 힘을 빌어보기도 하고 혹은 초국적 자본의 탐욕스러운 기업 사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재벌과 손을 잡기도 했던 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시대 한국 노동자들의 슬픈 자화상 아니던가! 그리고 이러한 연대(?)의 결과 늘 배신의 아픔은 노동자의 몫이 아니었던가!

국내 제2의 유선통신사업자, 하나로텔레콤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서글픈 선택의 기로야말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노동자들의 아픈 자화상의 전형이다. 하나로텔레콤은 97년 제2 시내전화사업자로 출범하였다. 출범 초기 공공성이 강한 유선통신사업을 특정 재벌이 좌우하는 데 대한 국민들의 반감에 힘입어 LG, 삼성, SK 등 국내 주요재벌들 컨소시엄의 비교적 분산적인 기업지배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를 맞다


99년에는 최초로 초고속인터넷을 출시하면서 급성장하였고 2004년 현재 가입자수 500만, 매출 1조4천억원을 상회할 만큼 성장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초기 투자가 요구되는 통신사업의 특성상 하나로통신은 계속 적자를 기록했고, 때맞춰 민영화된 KT의 공격적 마케팅으로 인해 2003년 초부터 유동성 위기를 겪게 된다.

이러한 유동성의 위기는 곧바로 하나로텔레콤을 헐값에 인수하여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LG그룹에게는 기회였다. 당시 최대주주였던 LG그룹은 하나로텔레콤의 부도 위기에 대한 뚜렷한 대안 제시 없이 외자유치안에 대해서는 계속 부결표를 행사했다.

이러한 LG의 행태에 대해 하나로텔레콤 노동자들은 회사의 위기를 방치, 헐값으로 지분을 인수하여 LG의 통신계열사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경우 하나로텔레콤은 온갖 구조조정을 통해 LG 통신 계열사들의 부실을 떠맡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우려마저 제기되었다.

이렇듯 자신들의 계열사 이익의 관점에서 하나로텔레콤의 위기를 방치하는 LG에 맞서 노동자들로서는 외자유치를 통한 독자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하나로텔레콤 노동자들은 2003년 10월 외자유치 승인을 위한 주주총회를 앞두고 13만명에 달하는 소액주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체 지분의 약 26%에 달하는 위임장을 확보하는 놀라운 괴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으로 LG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유치한 자본이 바로 AIG-뉴브리지캐피탈 컨소시엄이었다. 이로써 탐욕스러운 재벌로부터 하나로텔레콤을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로 노동자들이 선택한 AIG-뉴브리지캐피탈 컨소시엄은 하나로텔레콤 발행주식의 39.6%를 보유하는 지배주주가 되었다.

그러나 외자유치 또한 노동자의 답이 아니었다. ‘한국의 통신시장 발전과 하나로통신의 발전을 위해 10년 이상 장기투자 하겠다’던 AIG-뉴브리지캐피탈 컨소시엄은 약속과 달리 휴대인터넷사업 포기를 결정하였다. 반면 경영진에 대해서는 엄청난 스톡옵션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원 44명에게 무려 1천만주의 스톡옵션을, 특히 윤창번 사장 개인에게는 577만주라는 전무후무한 수량을 부여했다.

투자는 줄이고 경영진에게 막대한 스톡옵션이 제공되었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 아니겠는가!

대규모 구조조정이었다. 노동조합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적자를 이유로 구조조정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결국 노조는 회사의 명예퇴직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합원 찬반투표 결과 50.4% 찬성이라는 수치가 말해주듯 말 그대로 궁여지책의 선택이었다. 그 결과, 전 직원의 14%에 해당하는 197명이 명예퇴직으로 떠나야 했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결과 하나로텔레콤의 주가는 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가 상승은 AIG-뉴브리지캐피탈 컨소시엄에 많은 이익을 실현시켜 줄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LG의 횡포를 막기 위해 끌어들인 그 외자가 구조조정을 통해 주가를 올린 뒤 자신의 지분을 다시 LG에게 매각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점이다.

하나로텔레콤을 헐값에 인수하기 위해 기업 위기를 방치했던 그 LG가 말이다. 결국 하나로텔레콤을 놓고 자본은 돌고 돌며 서로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동안 기업에 대한 장기투자는 여전히 방치되어 있고 노동자들은 그 사이 계속 거리로 내몰린 셈이다. 결국 차이가 있다면 구조조정의 칼을 재벌이 휘두르냐 외자가 휘두르냐만 다를 뿐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감시자 돼야

하나로텔레콤의 사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재벌과 외자 그 어떤 것도 답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룹 내 통신계열사의 부실을 떠넘기기 위해 하나로텔레콤을 위기로 몰아 헐값에 인수하려했던 LG도, 재벌 횡포로부터 보호막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초국적 자본도 전혀 노동자의 대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로텔레콤 노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노동자의 대안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묻는다. 하나로텔레콤 노동자들의 실천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를. 부도 위기를 방치한 탐욕스러운 재벌에 맞서 외자유치를 추진한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단기이익 실현에 몰두하는 외자에 반대운동 한 게 잘못인가!

그렇다고 하나로텔레콤 노조가 내부 노사관계에서 확보할 것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로텔레콤 노사는 2003년 7월 ‘경영상의 불가피한 사정에 의하여 이 협약 체결일로부터 5년 이내에 인원을 정리하고자 할 때에는 조합과 합의 후 시행’ 한다는 고용안정협약을 체결한 바도 있다.

외자냐 국내재벌이냐 자본의 국적성이 해답이 아니듯, 기업 내 노사관계 수준의 그 어떤 협약도 노동자의 충분한 해결책이 못 되었다. 결국 하나로텔레콤노동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외자 혹은 국내 재벌 사이의 줄타기가 아니라, 기업 내 고용안정협약에 매달릴 게 아니라 기업의 경영을 꾸준히 감시할 수 있는 사회적 관심과 연대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하나로텔레콤 노동자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구체적 감시와 사회운동이 본격화 되어야 한다. 자본이 금융을 통해 ‘단기 이익’이라는 기준을 갖고 기업을 감시하듯 사회운동도 ‘노동인권’, ‘사회책임’이라는 기준을 갖고 기업을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그 성과가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꾸준한 감시가 작동될 때 하나로텔레콤에서와 같은 노동자들의 서글픈 줄타기를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기업별 노조들은 기업 내 노사간 힘겨루기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구체적 감시자로서의 역할에 자신의 돈과 인력 양 측면에서 보다 많은 역량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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